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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인터파크 북DB Mar 14. 2016

괭이부리말 김중미 "헬조선이란 말, 냉소 아닌 현실"



2000년 <괭이부리말 아이들> 발표 후 작가 김중미는 ’철지난 가난 이야기를 썼다’는 비판을 종종 받았다. 강연회 같은 데를 가면 ’아직도 그런 가난한 동네가 있느냐’, ’왜 가난 이야기만 쓰느냐’라는 질문이 단골로 등장했다. ’가난 이야기가 불편하다’는 노골적인 불만도 적지 않았다. 

하지만 가난은 철지난 바닷가처럼 지나간 시절의 그 무엇이 아니다. 때로는 낭만이나 추억으로 포장되기도 하지만, 여전히 가난한 사람들은 존재하고 오히려 빈곤의 문제는 더욱 심화되고 있다는 게 김중미의 생각이다. 그래서 평범한 사람들이 불편하게 생각하는 줄 알면서도 자꾸 가난한 이야기를 쓴다. 불편한 것이 시작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김중미는 스물네 살이던 1987년, 괭이부리말이라 불리는 인천 만석동의 달동네로 들어갔다. 고등학교 졸업 후 대학병원 원무과에서 근무하며 자본주의 사회의 모순을 목도하고, 천주교도시빈민회에서 빈민운동에 참여하다가 스스로 가난한 자의 삶을 선택했다. 그곳에서 무료 공부방을 열어 괭이부리말 아이들의 ’이모’가 됐고, 결혼해 아이 둘을 낳았다. 그는 큰딸 단비가 태어났을 때에야 비로소 ’단비 엄마’라는 이름으로 주민들에게 받아들여졌다. 올해 2월 출간된 김중미 작가의 첫 에세이집 <꽃은 많을수록 좋다>는 30년 동안 만석동 주민으로 살아온 작가의 삶을 돌아본 책이다. 

김중미의 책을 읽노라면 평범한 일상과 소박한 행복이 이기적이고 미안한 일처럼 느껴진다. ’나만의 성공이 행복의 조건이 될 수 있느냐’고 자꾸만 묻게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불편하고, 외면하고 싶다. 하지만 가난한 사람들과 30년을 부대끼면서 스스로 가난한 자로 살아온 그는 남들이 다 가는 고속도로를 벗어나 좁은 길로 가도 큰일 나지 않는다고 말한다. 오히려 그곳에 더 아름다운 풍경이 펼쳐진다고 증언한다. 김중미의 책을 읽는다는 것은 앞만 보고 질주하다가 잠시 제동을 거는 일이며, 조금은 불편한 진실을 마주하는 작은 용기일지도 모른다.




괭이부리말 30년, 과도한 칭찬과 왜곡된 시선 사이

Q 그동안 소설을 통해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해오셨는데, 처음으로 에세이를 쓰신 이유가 궁금합니다.

작년에 한겨레 신문과 창비 블로그에 6개월여 동안 칼럼을 연재하면서, 책으로 엮자는 이야기가 나왔어요. 그런데 연재를 할 때도 칼럼 성격상 제 삶의 기반이 되는 아이들 이야기를 배제하고 쓰려니 무척 힘들더라고요. 과연 이런 글들이 때 독자들의 공감을 얻을 수 있을까 망설이던 즈음에 인천 만석동 재개발 사업의 일환인 괭이부리말 ’옛생활체험관’ 문제가 불거졌어요. 이를 반대하는 과정에서 우리 공동체 사람들이 드러날 수밖에 없었는데, 우리가 살아온 삶이 때로는 과도하게 부풀려지기도 하고, 한편으로 왜곡된 시선 또한 많다는 걸 알게 됐어요. 객관적으로 우리 이야기를 정리할 필요를 느꼈죠.


Q 공동체에 대한 왜곡된 시선이란 어떤 걸 말하나요?

만석동 주민들이 ‘옛생활체험관’을 반대한 이유는 인천 동구청장이 지역민들의 삶의 질 개선보다는 가난을 상품화해 자신들의 치적을 앞세우려 했기 때문이에요. 그런데 오히려 그들이 저한테 ‘괭이부리말을 팔아서 돈을 벌어놓고 만석동에서 봉건영주처럼 군림하고 싶어한다’면서 공격을 했지요. 바라보는 관점에 따라 오해의 소지가 있을 수도 있겠다는 걸 알게 됐죠.

또 하나의 시선은, 저희 공부방(기찻길옆작은학교)은 지역아동센터처럼 기관의 관리를 받는 곳이 아니라는 데서 기인한 거예요. 가령 후원금을 제대로 쓰고 있는지 등에 대한 뒷말이 생기는 거죠. 공부방 운영에 대한 이런저런 비판에 대해서는 곱씹어볼 만한 것이라면 수용하고, 터무니없을 땐 싸우기도 하고, 말도 안 되는 이야기는 무시하기도 하면서 적절히 대응해나가고 있어요. 혼자라면 그런 결정을 내리는 게 힘들겠지만 공동체가 같이 풀어가니까 큰 어려움은 없어요.


Q 그런 오해가 있다면 공부방을 정식으로 인가받아 운영할 수도 있을 텐데요.

기관에 속하거나 지도를 받게 되면 자유의지가 없어져요. 돈이 없기 때문에 저희도 1천만 원 정도 규모의 사업을 하려면 사회복지공동모금회 같은 곳에 제안서를 넣거든요. 그런데 서류가 너무너무 많아요. 실제로 지역아동센터를 보면 온갖 서류들에 치이고, 프로그램 또한 가시적으로 보여야 하니 정작 중요한 아이들은 방치되고 있어요. 저희는 그렇게 하지 않아도 자율적으로 운영이 가능한데 굳이 비효율적인 관료사회 속으로 들어갈 필요가 없지요.


Q ’꽃은 많을수록 좋다’라는 이번 책 제목은 무슨 뜻인가요?

저희 공부방이 백령도 아이들과 방학 캠프를 함께한 지 몇 년 됐어요. 프로그램 중에 ‘자기만의 화분’이라는 게 있는데, 몸도 뚱뚱하고 사회성이 부족해서 또래한테 소외된 초등학교 1학년 아이가 화분에 꽃들을 가득 그려 넣고 옆에 서툰 한글로 이런 시를 써놓았더라고요. "꽃은 많을수록 좋다/ 마음에 사랑을 담아서/ 아직 안 자란 꽃도 있다". 마음을 좀처럼 열지 않는 아이라 그 안에 그렇게 섬세하고 여린 구석이 있는 줄 몰랐거든요.

사실 "아직 안 자란 꽃도 있다"라는 부분이 그 아이가 하고 싶었던 말이고, 우리가 모든 사람한테 하고 싶은 이야기인데, 앞에 문장이 없으면 완성되지 않는 말이라 책 제목은 ‘꽃은 많을수록 좋다’라고 지었어요. 그 아이는 자기 꽃만 아직 피지 않았다는 것을 누군가 알아줬으면, 꽃이 필 때까지 누군가 기다려줬으면 했던 거예요. 사람들은 화려하게 핀 꽃만 보지만, 더 많은 꽃이 피려면 땅 속에 있는 씨앗이나 아직 피지 않은 꽃들이 더 소중하잖아요. 우리가 아이들을 만나면서 갖고 있는 생각도 똑같거든요.



"공동체는 장소 아니라 ’가치’... 끊임없이 가치 찾아 노력"


Q 2001년에는 강화의 시골 마을로 이사를 하셨죠?

여름방학에 농촌공동체로 캠프를 가곤 했는데 아이들이 흙을 만지고 농사일을 도우면서 너무너무 좋아하는 거예요. 시골에 공부방을 만들었으면 좋겠다고 하더라고요. 남편도 농촌공동체에 대한 비전을 가지고 몇 년 동안 공부도 하고 여기저기 농촌을 다니면서 경험도 한 터라 귀농을 결심했죠. 그렇게 몇 년 농사를 짓다가 마을의 세 남매를 돌봐줄 곳이 필요하다는 이야기를 듣고 저희가 사는 강화 집에 공부방을 만들었어요. 지금은 7명의 아이들이 다니고 있어요. 강화에서 4천 평 규모의 농사를 짓고 공부방을 운영하면서 만석동을 오가고 있어요.


Q 두 군데 공부방이 모두 무료로 운영되고 있는데 재원 조달은 어떻게 하는지 궁금해요.

농사와 공동체 식구들의 공제비로 운영되고 있어요. 개인들의 후원비도 약간 있고요. 기업 후원을 받으면 경제적으로 많이 도움이 될 테지만, 공동체의 자유의지를 지켜나가기 위해 받지 않고 있어요. 후원비는 전기세나 참고서 구입 등 전적으로 공부방 운영에만 사용하고 있고요. 지역 일만 하는 이모, 삼촌들의 활동비를 마련하는 게 제일 큰 어려움이에요. 농사를 지어봤자 한 사람 인건비도 나오지 않기 때문에 계속 공제회비를 늘려가고 있어서 부담이 커지고 있는 게 사실이죠. 어쨌든 돈이 필요한 일이라 계속 고민하고 풀어나가야 할 숙제예요.

Q가난하게 태어나는 것과 가난을 선택한다는 것은 계급의 문제인데요, 실제로 80년대에 빈민운동을 하러 들어갔던 많은 지식인들이 다시 제자리로 돌아왔고요. 작가님이 포기하지 않고 자발적 가난을 실천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무엇인가요?

저는 빈민운동을 접했을 때부터, 이걸 선택한다면 전적인 것이어야 하지 발을 담갔다 빼는 건 아니라고 생각했어요. 제가 학생운동의 세례를 받지 않은 게 장점일 수도 있고, 아무것도 내세울 게 없는 사람이어서 그런 것도 같아요. 그런데 저는 상상력도 중요한 것 같아요. 현장에 있다 보면 앞이 보이지 않고 막다른 골목만 놓여 있는 것 같은 상황에 직면할 때가 많아요. 대부분 절망하고 떠나죠.

그런데 저는 그 너머가 보이더라고요. 그곳에 사람이 있었어요. 만석동에 들어오고 나서 한 4년 동안은 아이들이 만날 저를 붙잡고 "이모 언제 나갈 거야?"라고 물었어요. 그 아이들 절반은 엄마 또는 아빠가 없거나 조손가정이에요. 이미 누군가 떠난 것을 경험한 아이들이죠. 그런 아이들한테 또 다시 누군가 떠나는 아픔을 주고 싶지 않았어요. 그럴 거면 오지 말았어야죠. 개인적으로 큰 힘이었던 것은 제가 결혼하고 아이를 낳고 나서 그 질문이 끊어진 거예요. 그러고 나니까 후배들도 하나둘씩 결혼해 아이를 낳고 정착하면서 지금의 공동체가 됐어요. 가장 큰 건 사람이에요. 그 믿음을 저버리고 싶지 않은 거죠.


Q 30년 동안 공동체를 이어오면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원칙이 있다면요?

저희 원칙은 혼자 자발적 가난을 실천하는 게 아니라 연대하는 거예요. 가난하게 살면서 우리끼리 마음을 나누는 것만이 아니라 어려운 사람들이 손을 내밀 때 외면하지 말고 실질적인 도움을 주기 위해 노력한다는 거죠. 혼자라면 망설이다가 말 수도 있지만 우리는 같이 하니까 실천이 훨씬 쉬워요. 또 하나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공동체는 장소가 아니라 ’가치’라는 거예요. 건물처럼 다 쌓아올리고 나서 완공됐다고 끝나는 게 아니라, 지금 함께하는 사람들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정확히 인식하고 거기에 맞는 가치를 찾아가는 노력을 끊임없이 하는 거죠.



“밥 굶지 않는다고 풍요로운 삶? 풍요의 패러다임 바뀌어야” 


Q 무한 경쟁 사회에서 ’우리’라는 가치를 지켜나가는 게 쉽지 않은 일이에요.

그런 의미에서 아이들에게 공부방은 마냥 좋기만 한 곳은 아니에요. 끊임없이 불편하게 하기 때문이죠. 공동체 아이들은 가끔 다른 아이들과 달라서 곤란할 때가 있다고 해요. 식당을 고를 때나 옷을 살 때 그것이 마땅한 소비인지 고민하는 것을 친구들은 이해 못하죠. 학교에서 따돌림을 당하는 친구나 약한 친구를 모른척하지 못하는 것도 마찬가지예요. 누가 강요하는 것도 아닌데 책임감 때문에 어딜 가도 궂은일을 도맡다 보면 때로는 억울하다는 생각도 든대요.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면 그게 옳대요.


어느 날은 프랜차이즈 미용실에서 헤어디자이너로 일하는 공부방 졸업생이 ‘왜 우리를 이렇게 키웠냐’고 투덜대더라고요. 이익을 많이 남기려면 굳이 안 써도 되는 비싼 파마약도 사용하고 영양제도 권해야 하는데 돈이 없는 줄 뻔히 아는 아주머니들에게 그렇게 할 수가 없는 거예요. 공부방을 졸업한 아이들은 다 이렇게 딜레마에 빠져요. 나쁜 짓을 못하니까 사는 게 힘들어지는 거죠. ’이게 다 공부방 탓’이라고 원망할 땐, 쉬운 길 놔두고 어려운 길을 가라고 하는 것 같아 미안하기도 하죠. 하지만 어떡해요. 이게 사람답게 사는 건데.


Q 책에서 이 땅의 부모들에게 ‘나만의 성공이 행복의 조건이 될 수 있느냐’는 질문에 대답해보라고 하셨죠.

일명 SKY를 나오고 유학까지 다녀와 남부럽지 않은 회사를 다니다가 어느 날 갑자기 공허함을 느끼고 정신과 상담을 받는 사람들이 많다고 하잖아요. 부모들은 자기를 희생하며 최선을 다해 키웠지만 아이들은 내적으로 감당할 만한 힘을 기르지 못한 거예요. 또 내 자식을 귀하게 키웠어도 그 아이가 살아갈 세상은 우리가 만든 이 모양의 사회라는 거예요. 내 아이를 상품 가치가 있는 사람으로 만들어놨다고 해서 끝인가 하면 그렇지 않다는 거죠. 사회가 이러니까 정신없이 휘말려가지만 어느 순간 이게 아니라는 걸 직면할 수밖에 없어요. ’내 아이만이라도’는 불가능한 꿈이에요.


Q 이런 말씀이 ’평범한’ 사람들에게는 불편하게 들릴 수도 있을 듯해요.

내가 살아가는 방식이 아이한테 최선이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을 가졌으면 좋겠어요. 제 책을 보면 평범한 일상이나 소소한 행복이 미안해진다는 말씀들을 하세요. 원래 그래야 되거든요. 약한 사람을 보면 마음이 움직이고, 아닌 걸 보면 아니라고 말하고 싶은 게 인간이거든요. 그런데 그걸 하면 피해 본다는 생각이 만연해 있어요. 세월호 참사로 자식을 잃은 부모 마음을 왜 모르겠어요? 그런데 어느 순간, 안 보고 싶은 거예요. 불편하니까. 하지만 내가 안 본다고 그 삶이 없어지는 건 아니거든요. 불편함을 다른 걸로 덮는다고 나아지지 않거든요. 불편한 게 시작이라고 생각해요. 그래야 거기서 벗어나고 싶다는 마음도 생기니까요.


Q 풍요의 시대에 ’철지난 가난 이야기’를 쓴다는 비판도 많이 받으셨다고요.

가난한 시대는 갔다고 하지만, 빈곤율은 오히려 높아지고 있어요. 청년들이 하는 ‘헬조선’이란 말이 농담이나 냉소가 아니에요. 4년제를 졸업한 아이들 연봉이 2천만 원도 안 되고 그나마도 학자금 대출을 갚느라 허덕이죠. 청년들의 빈곤은 앞으로 심각한 문제가 될 거예요. 예전에는 도시빈민 문제가 집단으로 있어서 눈에 확 들어왔지만, 이제는 고시원이나 원룸으로 스며들어 개별화돼 눈에 띄지 않을 뿐이거든요. 앞으로 대다수의 사람들은 가난할 수밖에 없는 구조예요. 지금 빚 없이 사는 사람들이 거의 없잖아요.

우리 공동체 사람들은 실제로 가난해요. 차도 없고, 아이들 핸드폰 하나를 사줄 때도 수없이 토론을 거치죠. 그런데도 진짜 가난한 것 같지는 않아요. 이 삶을 선택해서 얻는 자유가 있기 때문이죠. 사교육비 부담이나 남보다 앞서야 한다는 조바심이 없기 때문에 더 여유로워요. 그 여유가 아이들한테도 여유를 줄 수 있거든요. 내가 어느 날 사라져도 나만큼 내 아이들을 지켜줄 사람들이 있다는 게 든든한 거예요. 그게 아주 큰 거거든요. 사람들이 더 많이 벌려고 하고 가진 것을 놓지 못하는 이유는 자기밖에 자신과 자식을 지켜줄 사람이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에요. 사회가 우리에게 안전도 미래도 건강도 이웃도 보장해주지 못하잖아요.

가난이라는 개념을 보릿고개 같은 어른들의 시선으로 봐서는 사회가 변하지 않아요. 풍요롭다는 말 또한 마찬가지예요. 단순히 밥을 굶지 않고 편하게 산다고 해서 풍요로운 삶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바로 지금이 빈곤과 풍요의 패러다임이 바뀌어야 할 시점인 듯해요. 사람들의 인식이 바뀌면 접근 방법도 달라지고 해결 방법도 나오겠죠.



취재:이미회(북DB 객원기자)


사진 : 남경호(스튜디오2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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