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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인터파크 북DB May 10. 2016

김영란, 한국 사회 10대 판결을 돌아보다




서울에 첫눈이 내린 날. 신촌 한 카페에서 김영란 전 대법관을 만났다. 카페에서 인터뷰를 준비하는 모습을 본 손님 한 명이 놀란 눈으로 ‘김영란 대법관님’이 아니냐며 재차 물었다. 그 한마디에 문득 실감한 김영란 전 대법관의 존재. ‘대한민국 최초의 여성 대법관’이자 ’소수자의 법관’, 김영란에게 그런 수식어가 따라붙는 건, 법 논리에 대한 신뢰와 타자에 대한 존중 때문임을 인터뷰 내내 확인할 수 있었다.

<판결을 다시 생각한다>는 한국 사회를 뒤흔든 10대의 판결이 어떤 법 논리에 따라 전개되었는지 설명한다. 총 열 개의 판결은 안락사라는 무거운 주제를 시작으로 재벌 지배 세습을 다룬 삼성사건과 환경가치를 쟁점으로 삼은 새만금 사건까지 사회적으로 치열하게 논쟁했던 사건들을 다룬다. 김 전 대법관은 10개의 사건이 새로운 사회 변화를 요구하는 사건들이라며 법 해석 앞에서 어떤 선택이 좋을지 늘 고민할 수밖에 없는 어려움을 전했다. 그러나 복잡한 갈등을 사회가 함께 고민하고 느린 걸음으로 해결해 가면서 사회가 성숙해지는 것 아니겠냐며 책을 쓴 동기를 밝혔다. 이 책을 통해 독자들이 활발하게 사회적 문제를 논쟁하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며, 논쟁을 통해 사회가 어느 방향으로 나아가면 좋을지 다양한 논의가 필요한 시대임을 다시 한 번 환기했다.



‘김영란법’ 발의는 대한민국에 필요했던 '거절의 자유'를 위한 것


 Q. 어떤 계기로 책을 쓰게 되셨는지 궁금합니다.

 예전에 대법원에 재판연구관으로 근무를 했어요. 대법원 재판 연구관은 대법원 사건의 리서치를 하고 보고서 작성하는 일인데, 5년간 그 일을 해서 대법관이 많이 생소하지는 않았고요. 대법관은 단조로운 일을 해요. 하루 종일 기록보고 합의하고 판결문 쓰고 선고하고. 거의 사람 만날 시간도 없이 그 일만 하면서 그렇게 6년을 살았죠. 그렇게 무수하게 판결을 선고했고 6년이란 세월을 그 일만을 했는데 그걸 그냥 지났다고 잊어버리는 게 옳은가, 이 시절에 대해 반추해봐야겠다는 생각이 기본적으로 있었어요. 그래서 책을 쓰게 됐죠.



Q. 소수자의 대법관, 독수리 5남매라는 별명이 있으신데요, 이런 경우는 흔하지 않은 것 같아요. 소감이 어떠신가요?

제가 처음 여성 대법관이고 또 다른 분들보다 젊은 나이에 대법관이 되었고 그래서 주목을 받은 것 같아요. 판결 내용과 관련해서도 제가 상대적으로 젊은 나이였으니까 바뀌는 세상이나 젊은 사람들이 바라는 바를 판결에 담길 수 있게, 일종의 가교 역할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고요. 그런 노력 때문에 (주목받는 게) 아닐까 생각해요.



Q. 특히 2012년 ‘김영란법’을 발의하셔서 크게 이슈가 되었습니다. 발의는 어떤 이유 때문이었는지 대법관님께 직접 그 속내를 듣고 싶었습니다. 현재는 현재 어떻게 진행되고 있나요?

대법관을 퇴임하고, 2011년 1월에 권익위원장을 맡게 됐어요. 권익위원회는 국민 고충처리, 행정심판, 그리고 부패 방지 업무, 이렇게 세 업무를 하는 곳인데요, 고충처리와 행정심판은 구체적인 사건을 처리하는 업무지만 부패 방지는 정책을 만들어 내거나 집행하는 업무였거든요. 그래서 제가 법률가이긴 하지만 부패방지를 위해서 우리나라에서 가장 필요한 핵심이 뭘까 고민할 수밖에 없는 자리에 앉게 된 거죠. 우리나라는 집단주의 문화, 수직적인 서열 문화가 강한 사회인데 선배나 상사가 뭘 부탁하면 거절할 수가 없잖아요. 거절하고 싶어도 거절할 수 없는 문화고 고가의 선물을 돌려주면 버릇없는 사람이 될 수도 있고요. 

그러니까 거절의 자유가 없는 거예요. 이제 공무원들이 집단적으로 어울려 다니면서 서로 접대하는 문화에서 벗어나도 되겠다 그런 때가 됐다는 생각을 했고, 그럴 때 노(NO)라고 할 수 있는 법을 만들자 싶었죠. 접대, 선물, 청탁 받기 곤란하다는 말할 수 있는 근거가 되는 법을 만들자고 직원들과 상의했어요. 그래서 입법예고하고 여러 부처와 협의하고 이러던 중에 권익위원장을 그만두게 됐고요. 그 뒤에 이 법이 알려지면서 국민들과 언론기관에 많은 지지를 받게 됐어요. 특히 세월호 사건 이후에 이 법에 대한 필요성을 얘기하기 시작해서 결국 국회의원들이 통과시킬 수밖에 없게 됐죠. 

현재는 위헌 소송 중인데요, 헌재의 결정을 떠나서 사람들이 관심을 가져 주시고 어느 것이 옳겠다고 생각하는 그런 과정이 처음부터 중요했고요. 이 법이 많은 관심을 불러일으켜서 여기까지 오게 된 것이 더 의미가 있다고 생각해요.





일명 '삼성사건' 판결에 대한 고민이 가장 많았다



Q. 책에 쓴 10가지 판결은 어떤 기준으로 고르셨나요? 특히 삼성사건은 아쉬움이 남는 판결이라고 하셨는데 어떤 이유인지 궁금합니다.

대법원에서 어떤 식으로 결정을 내리는지 보여드리고 싶었어요. 그래서 일단 일반인들이 관심을 갖는 문제들, 또 논쟁이 뜨거웠던 사건들 그리고 학생들에게도 도움을 줄 수 있는 판결들을 골랐어요. 그리고 책에 있는 10개의 주제들은 사회가 변화하면서 겪고 있는 문제잖아요. 법적 안정성이 중요한데요, 법이나 법 해석이 자꾸 변하면 어떻게 법을 지키겠어요. 그래서 ‘법률 불소급 원칙’이 있는 거거든요. 그런데 책에 있는 사건들은 전부 법의식이나 사회가 변화하는 와중에 놓여있는 사건들이에요. 그러니까 법정 안정성을 뛰어넘는 질문들이죠. 옛날식 해석을 유지할 것이냐, 아니면 새로운 해석을 할 것이냐가 문제 된 사건들이죠. 

삼성사건(삼성 그룹의 지배 세습을 다룬 사건)에 가장 힘을 들여서 썼어요. 다른 사건은 다 판결의 논리를 토대로 썼는데, 삼성은 맞다 틀리다의 문제가 아니라 논리를 찾아내야 했어요. 삼성 사건도 나름 논리 정합적으로 판결이 나기는 했는데 뭔가 더 해설을 해야 했어요. 그게 뭘까 고민을 참 많이 했어요. 고민을 해결하지 못하면 책을 쓸 수가 없겠더라고요. 이 사건만 논리를 세우지 못하면 안 되잖아요. 결국 우리나라 글로벌 대기업들이 지배 구조 문제에 있어서 글로벌한가, 주식회사 형태를 띠고 있지만 지배주주가 경영권을 갖고 있는 것 아닌가, 주주권과 경영권이 서로 견제하고 감시하는 시스템이 없는 우리나라에서는 지배 구조 문제를 어떻게 다루어야 하나, 이 문제를 고민하지 않았던 것 아닌가 싶어요. 놓친 게 이거였구나 싶었죠. 죄의 유무를 떠나서 그 사건의 근원적인 문제는 그것이었는데, 그 부분을 생각하지 못한 것 아닌가 싶었습니다.



Q. 전원 합의체는 다수결의 원칙을 따릅니다. 혹 다수결 원칙이 아쉬웠던 적은 없으셨는지요.

전원 합의가 다수 의견이라는 것은 현재는 그 생각이 다수라고 받아들이기로 하고 합의를 하는 거니까요. 다수를 만들 수 있을 것 같은데 소수가 됐거나 하면 당연히 아쉽죠. ‘이것은 다수가 될 수 있을 거야’ 생각했는데 의외로 토론 과정에서 반대가 되는 경우가 많이 있거든요. 아쉽지만 아직까지는 여기까지구나 생각하죠. 그리고 치열하게 토론하고 왜 반대 의견에 도달했는지 그 과정을 다 써야 하니까, 선택을 할 때 깊이 생각을 하게 됩니다. 다 공개되니까.



Q 1978년 미국 텔리코 댐 건설 중지와 관련된 대목이 인상적이었는데요, 특히 환경 관련 사건은 입법부 행정부 사법부의 역할에 관해 진지하게 논의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어떤 뜻인가요?

대형 국책사업의 경우 오랜 시간에 걸쳐서 해야 하고 돈이 많이 들어가고 결과도 나라를 바꾸게 되는 사업들이잖아요. 환경 영향 평가라든가 그 사업과 관련한 사회적 논의를 충분히 해야 하는데 대부분 정치적 논리, 지역 발전을 이유로 시작하니까 환경에 미치는 영향을 고려하지 않아요. 그리고 일단 벌려만 놓으면 중지할 수 없다는 논리가 무의식적으로 작용하게 되죠. 그리고 건설 사업은 환경 영향 평가를 했어도 간과했던 문제들이 나중에 생기기도 하거든요. 그럴 때 어떡하느냐의 문제예요.



새만금도 그렇게 문제가 생겨서 다시 조사를 했는데, 그 사이에 환경가치가 많이 바뀐 거예요. 전에는 개발가치가 늘 우세했는데 환경가치가 점점 중요해지면서 새만금 사건이 크게 부각됐던 사건이죠. 미래의 가치라는 걸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는 사실 불가능한 문제인데 불가능하다고 해서 무시할 것인지, 그게 아니라면 어떤 방법으로 미래가치를 평가할 것인지 깊이 생각해볼 수 있는 사건이 된 거죠.





현재 대한민국은 토론과 논쟁이 필요한 시대


Q. 사건에 대해 사회적인 시각 없이 민법적으로만 해석하는 경우의 문제점을 지적해주셨습니다. 법도 결국 사람이 판단하는 일입니다. 법관으로서의 자세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갖고 계신가요?

그게 참 어려운 거죠. 저도 그게 늘 궁금하고 지금도 모르는 건데요. 판사들의 근본적인 고민이죠. 퇴임 후에 판사들 상대로 강연할 때 그런 고민을 나누는데요, 그럴 때 그런 얘기해요. 마사 너스바움의 <시적 정의>라는 책을 보면 판사들은 소설을 읽는 독자의 관점을 가져야 한다고 해요. 그러니까 독자는 제2자이지만 주인공에 감정이입을 하잖아요. 독자들이 주인공의 감정 변화를 쫓아가면서 그 속에서 자기를 객관화시켜서 사건을 보잖아요. 판사도 그런 관점으로 사건을 봐야 한다는 내용이거든요. 

판사가 재판을 받는 당사자에 동의하지 않지만, 그 사람의 행동을 이해하게 되면 결론을 내리기가 쉽지 않겠느냐는 이야기이지요. 그런데 구체적인 사건에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는 저도 모르는 거죠. 경험의 축적에 의해서 하는 건데, 그걸 리걸 마인드(legal mind)라고 말하긴 하거든요. 하지만 그게 뭔지는 아무도 몰라요.(웃음)



Q. 판사로서 가장 고민되었던 것을 회고해보신다면 어떤 것을 꼽을 수 있으신가요?

판사 생활을 오래 하면 법조문에 함몰돼서 매너리즘에 빠질 수가 있어요. 예를 들어 수학 기호는 수학 문제를 쉽게 표현하려고 만든 것인데, 문제를 풀다 보면 기호의 의미를 잊잖아요. 법도 기호처럼 그렇게 될 수가 있거든요. 법의 진정한 의미를 잊어버릴 위험성이 늘 있어요. 물론 대부분의 사건은 법칙대로 하는 게 옳지만, 매너리즘 빠지면 자칫 법을 무의식적으로 써버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죠. 그런데 대법원은 공식만 적용해서는 안 되고 공식을 만들거나 고치기도 해요. 그럼 원래 공식의 원리를 잊지 않았나 하고 느끼는 순간이 있죠.

전원 합의체 연구관이 되면 양쪽 견해를 다 생각해 봐요. 반대 입장을 가정해서 반대 가능한 이론들을 생각해 보는 거예요. 그게 ‘악마의 변호사’라는 건데요. 집단 토론할 때 악마의 변호를 맡은 분의 논리에 답을 해보는 거지요. 그런 논리에 따라 이론을 구성하는 거예요. 반대 의견의 논리도 이론 구성이 가능한 거예요. 법에 절대적인 답이 있다면 반대 이론은 불가능할 텐데 그렇지 않죠. 논리라는 게 어느 쪽으로도 다 가능하니까 무서운 거구나 알게 됐죠. 결국 선택의 문제가 되는 경우가 많아져요. 그런 경험을 많이 하면서 어떤 선택을 할 것이냐가 중요한 것이고 그 선택은 무엇을 배경으로 하나, 그것이 순전히 법 논리만 배경으로 하지는 않잖아요. 법 해석을 어떤 이유로 요구하는지, 또 우리 사회가 법 논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도 알아야 하죠. 대충 할 수가 없게 됐고요. 제대로 된 법률가가 되려면 더 넓고 깊게 생각해야겠다 싶은 생각이 들면서 그때 정신이 바짝 들었죠. 



Q. 머리말에서 “전원 합의 판결 논리를 보면 우리 사회가 어떤 변화를 향해 가는 게 옳은지 알 수 있다”라고 하셨습니다. 근래의 대법원이 내린 판결들을 보며 어떤 생각을 하시는지 궁금합니다. 

라디오에서도 그 질문을 하고, 손석희 씨도 그 질문을 하시기에 주절주절 답을 했더니 “조심스럽게 답하시네요” 이러셨어요.(웃음) 어려운 문제예요. 사회가 변화는 와중에 있어서 그 사회 흐름을 읽고 판결을 내리는 거지, 사회는 변하지 않았는데 이론적으로 옳다는 이유로 판결을 내리는 건 쉬운 문제는 아니거든요. 대법원 구성원 성향에 따라 판결이 다를 수야 있지만 그것이 사회 변화와 같이 가는 거니까 일도 양단적으로 얘기하는 건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논의 자체는 활발했으면 해요. 여러 사회적 토론이 활발한 사회였으면 좋겠어요. 논쟁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어요. 민주주의가 그런 거잖아요. 사회적 토론을 많이 해가면서 자신의 의견 발현해서 이끌어나가는 게 국민주권의 의미니까요. 누구나 자기 생각은 다 있잖아요.

그런데 상대방 생각을 좀 헤아릴 필요는 있어요. 같은 생각의 사람만 만나면 남들이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 수 없어요. 나와 다른 사람의 생각을 알려고 노력해야죠. 그래야 설득도 할 수 있고요. 생각이 다른 사람들끼리 어떻게 살아가는가를 생각할 시대가 된 것 같아요. 무조건 내 편으로 만드는 게 20세기 합리주의 방식이었다면, 21세기 포스트모던 시대에는 서로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함께 살아야 하는가 고민해야죠.



사진 : 기준서(스튜디오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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