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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인터파크 북DB May 11. 2016

'추크섬'의 한국 남자 김도헌 "천국은 나그네의 장소"



1996년 이맘때, 그러니까 눈부신 어느 봄날, 김도헌은 남태평양의 섬나라로 무작정 떠났다. 장강명의 소설 제목처럼 ’한국이 싫어서’였다. 많이 배우지도 못하고, 돈도 없고, 얼굴도 별로인 그에게 한국이라는 나라는 더 이상 희망이 없어 보였다. 그렇게 나그네가 되어 미크로네시아 연방의 ’추크’라는 섬에 발을 디딘 그는 원주민 여자를 만나고, 아이 넷을 낳아 기르면서 어느덧 20년째 그곳에 머물고 있다. 

태평양 한가운데 바늘 끝처럼 솟아 있는 적도의 섬. 지리적으로는 그리 멀지 않지만 괌에서 이곳을 오가는 비행기가 일주일에 3~4편밖에 없을 정도로 오지다. 127㎢ 면적에 3만8천여 명이 살고 있는 곳. 에메랄드 빛 바다와 눈부신 태양, 1년 내내 열대 과일이 주렁주렁 열리고, 싱싱한 물고기들이 넘쳐나 굶거나 얼어 죽을 염려가 없는 곳. 

방문객들은 이곳에서 ’천국’을 본다. 부지런해야 할 이유도 없고, 경쟁이 무엇인지도 모른다. 시간은 느리다 못해 멈춰 있는 듯하다. 세상에서 가장 바쁜 사람들의 나라 한국, 세상에서 가장 시간이 더디게 흘러가는 섬나라. 천국과 지옥만큼이나 낙차가 큰 곳에 외로이 떨어진 한국 남자는 과연 어떤 삶을 살고 있을까. 팩션 <세상 끝에 살고 싶은 섬 하나>를 쓴 작가 김도헌을 만났다.



한국이 싫어서’ 세상 끝으로 도망치다

나는 3년 전에 미크로네시아 연방의 추크섬을 여행하다가 거기서 김도헌을 만났다. 그는 오래 전에 이 먼 섬으로 건너와 원주민 여자와 결혼해서 아이를 두고 있었다. 그의 삶은 풍매하는 홑씨 한 개가 바람에 실려와 인연 없는 땅에 떨어진 것 같았는데, 이 홑씨는 살아서 외로움과 그리움을 감당하고 있었다.

- <세상 끝에 살고 싶은 섬 하나> 중, 소설가 김훈의 추천사

Q 소설가 김훈이 책의 추천사를 썼는데요, 몇 년 전 추크섬에서 만나셨다고요.

네. 김훈씨와 이병률씨가 <안녕 다정한 사람>이라는 여행 에세이를 쓰기 위해 섬을 방문한 적이 있어요. 그때 제가 안내를 맡았죠. 개인적으로 조정래의 <태백산맥>과 김훈의 <칼의 노래>를 가장 훌륭한 한국 소설이라고 생각하는데, 그 작가가 눈앞에 있으니 마냥 신기하더라고요. 이 책을 낸 것 자체보다도 김훈씨가 추천사를 써준 것이 제일 기뻤어요.

Q 두 사람과의 만남이 이 책을 쓰는 데 어떤 영향을 미쳤나요?

지나가는 얘기였겠죠. 두 분이 저희 집에 오셨는데 책장에 꽂혀 있는 책들을 보더니 ’이런 데 있으면서 글이라도 써보면 좋지 않겠느냐’고 하시더라고요. 사실 책을 좋아하지만 쓰는 것에 대해서는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거든요. 이 책을 쓴 것도 어릴 때 연애편지 이후로 처음이었어요. 섬 생활은 단순해요. 밤에 할 일이 없으니 이런 생각 저런 생각을 하게 되죠. 글을 써보라던 말이 문득문득 떠올랐어요. 아마 두 분을 만나지 못했다면 이 책은 세상에 나오지 못했을 거예요.

Q 출판사 대표이기도 한 이병률 시인의 사진이 인상적입니다.

원고를 절반쯤 쓰고 출판사에 원고를 보냈는데 반응이 시큰둥했어요.(웃음) 다시 써보겠다고 하고 5~6개월쯤 후에 마무리해서 보냈더니 책을 내도 괜찮을 것 같다고 하더라고요. 원고 작업이 끝난 후 이병률 시인이 사진 촬영을 위해 한 번 더 섬에 오셨죠. 아름다운 사진들 덕분에 보잘것없는 내용이 훨씬 풍요로워졌어요.

Q 책을 쓴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닌데요.

옛말이 별로 틀린 게 없는 것 같아요.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그러잖아요. 아무 생각이 없었어요. 써보고 싶다? 쓸까? 그렇게 저녁에 한 시간씩 1년쯤 썼어요. 물론 글을 쓰는 게 쉽지는 않았죠. 그런데 이걸 쓰면서 잘 써보겠다, 뭘 해보겠다, 이런 욕심은 전혀 없었어요. 그냥 써보고 싶으니까 썼어요. 제가 올해로 쉰네 살인데, 오십대가 되면서 생각이 많아지더라고요. 저뿐만 아니라 어느 정도 나이가 들면 ’나는 이제껏 뭘 하고 살았나’ 이런 생각들 많이 하잖아요. 글을 쓴다는 것은 어쩌면 ’변명’의 다른 이름인 것 같아요. ’내가 왜 여기 섬에 있는가’에 대해 변명이 하고 싶었던 건지도 모르죠.



세상에서 시간이 가장 더디게 흘러가는 적도의 섬

짙푸른 숲, 시퍼런 바다, 강렬한 태양이 전부인 세상에서 사는 것은 차라리 시간을 잊는 일이다. 어떤 추억도, 어떤 바람도, 이곳에서는 감정의 얼개들이 맥없이 삭아내려 풍화되고, 들끓던 사념들이 퇴색해 욕망의 본질만이 남는다.

- <세상 끝에 살고 싶은 섬 하나> 98쪽

Q 책을 보면 섬사람들의 삶이 무척이나 여유로워 보여요.

열불 날 정도로 여유롭죠.(웃음) 더운 날씨 때문이기도 하지만, 근본적으로는 부지런해야 할 이유가 없으니까요. 자연환경이 무척 풍요로워요. ’빵나무’라는 게 있어요. 두리안처럼 생긴 열매인데 작은 수박만 해요. 1년에 두 번씩 나무 한 그루에서 200~300개가 열리는데, 한 개면 한 끼 식사가 돼요. 두세 개만 있으면 하루를 살 수 있죠. 그런 나무 열 개만 있으면 먹고사는 데 지장이 없어요. 바로 집 앞에 물고기도 많고, 따비오 같은 열대작물도 잘 자라고요. 사람 사는 데 중요한 게 물인데 강우량도 풍부해요. 가만히 있어도 굶어죽지 않고 얼어 죽을 걱정 없을 정도로 기본적인 건 다 있다고 보면 돼요.

Q 섬에서 적응하는 게 쉽지만은 않았을 텐데요.

가장 힘든 건 천천히, 느리게 흘러가는 사람들의 시간에 내 시간을 맞추는 거였어요. 사실 지금도 힘들어요.(웃음) 문화 차이 때문에 집사람과도 많이 싸웠죠. 우리 기준으로 보면 너무 게으르고, 표현도 잘 안 하니까 속이 터져요. 그런데 한번 폭발하면 거리낌이 없어요. 우리처럼 멱살 잡고 소리 몇 번 지르고 끝나는 싸움은 없어요. 누가 하나 크게 다치든지 죽든지 그렇게 결말이 나요. 대신 그렇게까지 번지는 싸움은 거의 일어나지 않죠. 경찰이나 법원이 여기처럼 한적한 곳도 없을 겁니다.

Q ’인디언들의 지혜’가 연상될 정도로 사람들이 지혜롭다는 인상을 받았어요.

태평양 한가운데 바늘 끝처럼 솟은 섬이잖아요. 거기다 오지고요. 폐쇄적이고 단절된 사회에서 살아가려면 지혜로울 수밖에 없겠죠. 서로 융합하지 못하고 조화롭게 살지 못하면 살아남을 수가 없는 환경이니까요. 마음 가는 대로 사니까 어떤 면에서 보면 인생을 잘 사는 거죠. 또 상대편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요. 섬에선 할 게 정말 없어요. 수다를 떠는 게 일이자 놀이죠. 그렇기 때문에 비밀이 없어요. 동네에 무슨 일이 있는지 서로 다 안다고 보면 돼요. 그런데도 전혀 내색을 하지 않아요. 타인을 인정하고 존중해주는 거죠. 이런 게 깨지면 더 이상 공동체가 존재할 수 없다는 걸 오랜 세월을 거치며 깨달은 거예요.

Q 책을 보면서 많은 사람들이 ’천국’을 상상할 것 같아요.

좋은 것만 보면 그렇죠. 날씨 좋은 날 바닷가나 사람들을 보면 다 천국이라고 그러죠. 그렇지만 바람이 불고 파도가 일면 평화로운 모습은 사라지죠. 사람 사는 곳은 어디든 비슷하잖아요. 익숙해지는 순간 설렘은 사라지고 생활이 되는 거죠. 제가 책에도 썼지만, 천국은 사는 사람들에게는 이미 천국이 아니에요. 그냥 일상일 뿐이죠. 천국은 나그네들이나 느낄 수 있는 거겠죠.



이쪽도 저쪽도 아닌 경계에서 서성이다

인간은 이 세상에 대한 진정한 이해나 존경도 없이 인간만이 선택받은 존재이고, 모든 것을 인간이 소비하고 소유할 수 있다고 당연하게 생각하는 거야. 얼마나 무지한 교만이야?

- <세상 끝에 살고 싶은 섬 하나> 98쪽

Q 섬사람들 중 ’베네딕’이란 인물이 굉장히 신비로웠어요. 거센 바다에서 눈빛으로 광선을 쏴 길을 찾고, 알바트로스들이 떼 지어 날아와 그를 데려가는 죽음 장면은 흡사 소설과 같던데요.

많은 분들이 베네딕이란 존재에 대해 궁금해하더라고요. 사실 이 책은 처음에 소설로 썼던 것인데 출판 과정에서 에세이로 바뀌었어요. 그래서 어느 정도 제 상상력이 들어간 부분이 있어요. 베네딕의 모델은 실제로 있어요. 섬의 추장으로 제가 섬에서 자리 잡는 데 많은 도움을 주었죠. 지금도 가장 의지하는 친한 친구이고요. 다만 지금 살아 있는 사람이라는 게 책과는 다른 점이죠. 아직 그 친구에게 책의 내용에 대해서는 말하지 못했어요.(웃음)


Q 부인과 사랑에 빠지는 부분도 상당히 로맨틱하게 묘사됐던데요.

이 부분도 사실과 다른 부분이 좀 있어요. 실제 제 결혼 과정은 그렇게 로맨틱하지 못했어요.(웃음) 섬에서 나그네로 사는 몸이라 결혼 같은 건 안 하겠다고 생각했었어요. 그런데 갑자기 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홀로 계신 어머니를 보니 마음이 흔들리더라고요. 회사를 운영하며 리조트에서 일할 때였는데, 집사람도 같은 리조트에서 근무했어요. 연애 기간도 없이 그쪽 풍습에 따라 만난 지 2주 만에 결혼식을 올렸어요.

Q 굉장히 독특한 에세이라는 느낌이었는데, 출판 과정에서 소설이 팩션(팩트+픽션)으로 바뀐 거네요. 애초에 어떤 이야기를 쓰고 싶었어요?

책 제목을 붙인다면 ’네안데르탈인과의 대화’가 가장 적합할 거예요. 아셨는지 모르지만 베네딕이라는 존재가 네안데르탈인이었거든요. 인류의 사촌, 즉 다른 종이 현재의 인류인 호미사피엔스를 비판적인 시각으로 바라본 거예요. ’우리는 이대로 괜찮은가’라는 질문을 던져보고 싶었어요. 안 괜찮은 것 같거든요. 우리는 길을 잃은 것 같아요. 어디로 가야 하는지, 뭘 해야 하는지, 왜 살아야 하는지 어느 것 하나 제대로 대답할 수 없지 않나요? 이대로 가다가 우리도 네안데르탈인처럼 멸종하지 않을까, 인류의 지도자가 나타나 지표를 제시해줬으면 좋겠다, 그런 상상력으로 써본 이야기예요. 베네딕이라는 인물이 그 역할을 해주길 바란 거고요.

Q 첫 책이 나온 건데, 앞으로도 계속 쓰실 생각인가요?

이상해요. 중독이 되더라고요. 자꾸만 쓰고 싶어져요. 제가 생각했던 것을 표현해내는 데서 희열을 느껴요. 거기선 할 일이 없잖아요. 복잡한 게 없으니까요. 멍하니 있는 거죠. 이런 시간에 많은 생각이 떠오르잖아요. 예전에는 그저 생각만 했다면 이젠 그걸 글로 표현하는 거죠. 아마 복잡한 한국에 있다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일 거예요. 다음번에는 무협지를 써볼까 해요. 억압되고 복잡한 세상에 무협지만큼 좋은 것도 없는 것 같거든요.



어차피 후회할 거라면 마음 가는 대로!

"나는 한국이 점점 더 불편해진다. 이곳이 몇 년 사이 급속하게 변화한 모습을 보여주는 가장 대표적인 것을 말해보자면 스마트폰이다. 버스나 지하철에서 모든 사람들이 고개 숙이고 휴대폰으로 무엇인가에 열중하고 있는 모습을 볼 때면 공포영화의 한 장면이 떠오르며 소름이 돋는다."

- <세상 끝에 살고 싶은 섬 하나> 16쪽

Q 이제 한국으로 돌아올 생각은 없는 건가요?

오고는 싶죠. 동생들도 친구들도 다 여기 있고요. 그런데 솔직히 (한국에서) 살 자신은 없어요. 책임져야 할 가족들이 (추크섬에) 있다는 것도 이유고, 또 한국이 나를 부르는 것도 아닌데 굳이 와서 뭐하겠나, 이런 생각이 드는 거죠. 여기도 불편하고, 거기도 아직 조금 불편하고 그래요. 여기 오면 너무 변화가 빠르니까 정신이 없어요. 2주 정도 있으면 불안해져요. 밤에 소음이 심한 것도 힘들더라고요. 거기는 저녁때가 되면 바람 소리 외엔 아무 소리도 안 들려요. 바람이라도 없는 날은 적막 그 자체죠. 반면 섬 생활은 외롭다는 게 힘든 점이죠. 김훈 선생님이 추천사에서 ’경계인’이라는 표현을 쓰셨는데, 맞는 말인 것 같아요.

Q 떠나고 싶은 사람들에게 먼저 떠나본 자로서 한 말씀 해주신다면요?

마음 가는 대로 사는 게 어떨까요? 이렇게 해도 후회하고 저렇게 해도 후회할 거라면요. 어떤 책에서 읽은 구절이 떠오르네요. ’새로운 출발이란 알 수 없는 미래에 대한 확신을 갖고 한 발 내딛는 것이다.’ 내일 일을 누가 알겠어요. 다만 본인이 믿고 행하는 것뿐이죠.

Q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요.

이 말씀을 꼭 드리고 싶었어요. 책값이 1만4300원인데요, 이 책을 사서 보시는 분들한테 그만큼 값어치가 있었으면 좋겠어요. 한국에 나오면 서점에 가서 신중에 신중을 기해 책을 골라 가도 몇 권 중에 한 권은 돈 아까운 책들이 있더라고요. 책을 내놓고 나서 제일 큰 걱정이 (독자들이) 괜히 저 때문에 하루 일용할 돈을 낭비하는 것은 아닌지 하는 거예요. 모쪼록 부족한 제 책이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사진 : 남경호(스튜디오2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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