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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인터파크 북DB May 16. 2016

서중석 "역사교과서 국정화, 나라 수준 떨어트리는 일"



서중석 선생을 만나러 가기 바로 전날이 4월 19일이었다. 1960년 4월 19일 서울 거리를 가득 메운 20만 시위대에 경찰은 무차별 사격을 가했으며, 그날 하루에만 123명이 목숨을 잃었다. 그러나 4월 25일까지 10만 명이 넘도록 더 확산된 시위는 다음 날 이승만 정권을 물러나게 하는 ’승리의 화요일’을 만들었다. 반세기가 지난 오늘날, 이런 역사적 사실은 물론 그날의 파토스도 우리의 무지와 망각 속에 사라져가는 듯하다. 

최근 역사교과서 국정화 문제는 우리 근현대사에 대한 관심을 다시 불러일으킨다. 그렇지만 이데올로기, 신드롬, 콤플렉스가 얽힌 논전 이전에 근현대사에서 일어난 역사적 사실들도 우리는 잘 모르고 있지 않은가. 서중석 선생은 뉴라이트의 주장이나 역사적 인물에 대한 신비화를 제대로 비판하자면 이런 구체적인 사실부터 알아야 한다고 힘주어 말한다. 

성균관대 사학과 명예교수, 역사문제연구소 이사장을 맡고 있는 서중석 선생은 2013년 퇴임 후 인터넷 매체를 통해 한국 현대사의 사건들을 생생하게 들려주는 연재를 진행해왔고, 이 이야기들이 시대별로 정리되어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시리즈로 출간되어 왔다(5월 16일 현재 6권까지 출간). 4월 출간된 그 세 번째와 네 번째 책에는 이승만 정권 당시의 정치적 상황과 4월 혁명의 생생한 이야기가 실렸다. 교사 연수든 학생들 강연이든 근현대사를 알고 싶다는 요청만 들어오면 어디든지 한달음에 달려간다는 서중석 선생. 그를 서울 명륜동 연구실에서 만났다.

Q 보통 역사서는 역사적 사실들을 낱낱이 보여주는 형식을 취하는데요, 이 책은 현대사에 대해 대담 형식으로 풀어 이야기해주고 있습니다. 특별히 이런 형식을 택하게 되신 계기가 있으신지요?

2013년 8월 정년퇴임을 하게 되었는데, 6월 고별강연 때 ’프레시안’의 김덕련 기자가 취재를 왔어요. 그 후 8월경 연락이 와서 대담 형식으로 현대사를 알기 쉽게 설명하는 연재를 하자고 하더군요. 생소하긴 하지만 가만히 생각해보니 그것도 좋은 방법 같더라고요. 사실 일반인들이 현대사를 너무 몰라요. 우리 현대사를 일반인들에게 쉽게 전달할 수 있다면 어떤 방법이든지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대담으로 가져가면 더 쉽고 편하게 이야기할 수가 있을 것 같아서 그렇게 하자고 했지요. 처음에는 6·25전쟁부터 사건별로 이야기를 해나갔는데, 가만히 생각해보니 기왕 이렇게 하는 김에 체계적으로 정리하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지요.

Q 글이 대화체라서 수월하고 재미있긴 합니다만, 당시 정황을 잘 몰라 쉽게 이해되지 않는 부분도 있어서 다른 현대사 책들과 함께 읽어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렇게 한다면 참 좋겠지요. 대부분의 젊은 세대나 일반인들은 제가 이야기하는 역사적 상황들에 대해 잘 모르고 있기 때문에 이해나 공감이 잘 안 될 수도 있겠다 싶어요. 그렇다고 이런 형식에서 학문적 근거를 세세히 제시할 수는 없는 노릇이지요. 또 현대사 부분은 논쟁거리가 참 많아요. 뉴라이트가 억지주장을 많이 한다고 하지만, 경청할 만한 부분이 아주 없진 않아요. 그렇기 때문에 제 이야기를 다른 글을 통해 확인해보는 일도 필요하고 좋은 방법이라고 봐요. 좀 더 자세하게 알아보고 싶다면 제가 쓴 <사진과 그림으로 보는 한국 현대사>나 다른 분이 쓰신 현대사 책들을 참고해가면서 보는 것도 좋은 방법이겠지요.



"이승만 동상 건립, 헌법에 명시된 4.19 민주이념 반박하는 것"

Q 앞서 출간된 1·2권에서는 각각 해방·분단과 친일파, 그리고 한국전쟁과 민간인 학살 등을 다루셨고, 3·4권에서는 이승만 정권 시기가 집중 조명되고 있습니다. 이승만 정권에 대해서 ’백색 전제’라는 규정이 눈에 띄는데요.

성균관대를 창설한 총장이자 유림계의 거두라고 할 수 있는 김창숙 선생이 50년대에 이승만 정권을 백색 전제라고 이야기한 바가 있어요. 당시 우리는 지구상에 두 가지 형태의 독재가 있다고 말하곤 했어요. 하나는 공산주의 독재로 이를 ’적색 전제’라고 부르고, 공산주의가 아닌 독재의 형태를 ’백색 전제’라고 부르는 것이지요. 4월 혁명이 일어났을 때 서울대 문리대가 발표한 선언문은 아주 훌륭하다고 평가되는데, 거기에서 학생들은 "적색 전제"와 함께 "민주주의를 위장한 백색 전제에의 항의를 가장 높은 영광으로 우리는 자부한다"고 천명하고 있습니다. 이승만 정권이 반공을 내세우면서 파쇼적인 독재를 했다는 것이지요.

Q 최근 ’건국절’ 행사라든지 이승만 정권에 대한 재평가를 주장하는 움직임이 있는데, 이런 주장들은 왜 나온 것이라 보십니까?

이승만 정권에 대한 평가는 심지어 박정희 정권, 전두환 정권에서도 좋게 평가된 적이 없어요. 더구나 현대사 연구가 1980년 중반부터 활발해지고 관심이 커지면서 해방 직후 역사에서 독재와 반공 이데올로기를 합리화시켰던 주장들이 먹혀들지 않게 되었지요. 80년대 거세진 통일운동 또한 이승만의 단독정부 수립이나 반공 독재를 더욱 비판하는 분위기를 형성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독재와 반공 이데올로기는 이승만 정권과 연관성이 크기 때문에 이승만 정권을 좋게 평가해야만 반공 이데올로기를 합리화할 수 있어요. 이승만에 대한 재평가는 이승만을 어떻게든 좋게 평가해서 반대편을 종북이나 용공세력으로 몰아가고자 하는 의도지요.

문제는 이승만을 추앙하려는 사람들이 대개 친일파하고 관련 있거나 해방 후 분단을 고착화시킨 독재 협력세력들이자, 지금까지 우리나라의 기득권 세력으로 자리하고 있다는 거예요. 예전에는 반공·냉전 이데올로기가 국가권력에 의해 전파되었어요. 그런데 6월항쟁 이후 이게 어려워졌고, 노무현 정권 때는 마침내 근현대사 역사교과서가 검정으로 바뀌었지요. 그런 위기의식에서 2004~2005년경부터 뉴라이트라는 극우세력이 부상하고, 이명박 정부, 박근혜 정부가 들어서자 그 세력들의 지지기반이 강고해지면서 더욱 공세적이 된 것이라 보입니다.

Q 저는 책을 읽다가 "오늘날 국회 본회의장 입구에 이승만 대통령을 ’의회 지도자’로 기리는 동상이 있다"는 이야기를 읽고 깜짝 놀랐는데요. 어떻게 된 건지 궁금합니다.

제가 알기로는 2000년경 국회의 반대가 상당히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추진되었지요.(기자 주 : 국회 본회의장 입구의 이승만 동상은 2000년 세워졌다. 이승만기념사업회가 1997년 국회에 동상 건립 추천서를 제출, 1999년 ’의회 지도자상 건립안’이 국회를 통과했고, 2000년 5월 15일 제막식이 열렸다. 프레시안, 2013년 9월 25일 보도 인용.) 그뿐 아니라 이승만을 추앙하는 세력들은 광화문 광장에도 이승만 동상을 세우려고 추진했어요.

2010년이 4월 혁명이 일어난 지 50주년 되는 해였는데, 2011년에 이승만 대통령의 양자인 이인수 박사와 이승만기념사업회가 4월 혁명 묘지에 사과하고 참배하겠다고 왔어요. 4월 혁명 유가족들과 단체들이 강력하게 반발했지요. 말로는 역사적 화해 운운하지만, 광화문 광장에 세종대왕 동상과 함께 이승만 동상을 세우려다가 반대여론에 부딪히자 사과를 한다고 나선 거라는 거지요.

1960년 4월 19일 오전 9시 15분경 분노한 서울시민들이 탑골공원에 있는 이승만 동상을 끌어내려 광화문까지 질질 끌고 갔고, 남산에 있던 거대한 이승만 동상도 너무나 튼튼해서 나중에 기중기를 동원해서 간신히 부쉈지요. 그 자리에 남산 야외음악당이 들어선 거예요. 이런 역사를 기억한다면, 다시 이승만 동상을 세우는 것을 어떻게 봐야 하는지…. 헌법에도 명시된 4.19 민주이념을 정면으로 반박한다고 봐야 하지 않나 싶습니다.



Q 특히 3권은 조봉암과 이승만의 대결구도를 중심으로 정치사 이야기를 들려주시고 계시는데요, 이렇게 조봉암이라는 인물을 재조명하시며 역점을 두신 이유는 무엇인가요?

해방 직후 진보세력이 굉장히 강력했어요. 사회주의 세력뿐 아니라 중도파에서 진보세력이 강했고 심지어 우익세력에서도 일견 진보적인 주장이 많이 나왔어요. 그런데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진보세력이 많이 다치고, 정치적으로 어려워졌지요. 그런 상황에서 조봉암은 1956년 대통령 선거에서 굉장한 지지를 받았어요. 216만 표를 받았는데, 그 또한 부정선거가 많았기에 실제 지지표는 그보다 월등히 많았을 거예요. 이승만의 강력한 라이벌로 떠오른 것이지요.

무엇보다도 50, 60년대 사람들은 극우반공세력에 대한 비판세력, 즉 민족주의와 평화통일을 대변하는 대표적 인물이 조봉암이라고 기억해요. 2000년대 들어서 조봉암에 대한 재판결이 하부법원을 거치지 않은 채 바로 대법원에서 진행되었고, 그 결과 전원일치로 무죄선고가 내려졌지 않습니까? 이것도 조봉암이라는 인물이 당시 한국인들에게 얼마나 희망과 꿈을 가지게 했는지, 이승만 독재를 벗어나 좋은 세상을 만들고자 하는 기대를 얼마나 갖게 했는지 잘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 있지요.

Q 조봉암 선생을 ’용기 있는 정치인’이라고 이야기하셨는데, 신념이 투철한 사상가와는 조금 다른 측면, 그러니까 현실 정치에 발 딛고 있는 정치인의 측면을 강조하신 듯합니다.

결국 이승만 정권에 의해 사형까지 당했지만, 진보세력이 배겨내기 힘든 아주 어려운 시대와 여건에서 그런 정치력을 발휘했다는 점은 후세에 많은 참고가 될 수 있다고 봐요. 당시 많은 진보세력이 암살당하고 납북당하는 상황에서, 살아남기 위해 어찌 보면 이승만 세력과 결탁하는 것처럼 보이는 정치적 곡예를 보여주기도 했지요.

그렇지만 조봉암은 평생을 통해서 자신의 기본적 신념을 투철하게 보여주었어요. 예컨대 당시 보도연맹을 비롯해 군경에 의한 집단적 주민학살이 많이 저질러졌는데, 어떤 정치인도 이런 사실들을 발언하기 꺼려했지요. 그 사실 자체가 6월항쟁 이전에 거의 베일에 가려져 있었어요. 그러나 조봉암은 당시 그런 사실들을 발언하면서 "피해대중을 위한 정치를 하겠다"고 선언했거든요. 그런 점에서 저는 오늘날 진보세력들, 그러니까 6월항쟁 이후부터 2000년대 이후 국회에 진출한 진보적 정치인들은 조봉암에게 배울 점들이 많다고 봐요. 그의 용기와 현실정치에 능란한 수완, 대중 정서에 대한 민감함 등을 주목해야 한다고 봅니다.



"역사교과서 국정화, 우리나라 수준을 밑바닥으로 떨어뜨리는 일"

Q 4월 혁명 이야기를 조금 해보겠습니다. 사진으로도 접할 수 있지만 당시 중고생들이 시위를 주도했고 초등학생까지 시위에 참여한 사실들이 지금 젊은 세대로서는 잘 상상이 안 됩니다.

당시 청소년들은 민족과 분단을 진심으로 걱정하는 정서가 지배적이었어요. 물론 청소년기가 원래 정의감이 강하고 순수한 감정을 많이 가지긴 하지요. 한국사회에서는 어른이 되면 금방 현실에 안착하고 급속하게 보수화되는 것 같아요. 일제 때도 그렇고, 해방 후 50, 60년대까지 청소년들은 어른들 못지않게 독립운동, 민족의 운명, 이런 것들에 대한 공감과 열정을 많이 가지고 있었어요.

그런 정서가 70년대 들어서 많이 약화되었다고 봐요. 직접적 계기는 평준화와 입시교육, 갈수록 입시에만 매몰되어 현실을 외면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겠지요. 90년대 후반부터는 대학생들마저 그런 정서가 지배적이 된 것 같아요. 또 당시에는 정보에 대한 욕구가 컸어요. 현실 정치에 대한 정보를 오로지 신문을 통해서만 접할 수 있었기에, 젊은 사람들은 물론 중고등학생, 초등학생들까지 신문 쪼가리를 돌려 읽었어요. 그래서 4월 혁명에서 언론의 역할도 컸다고 할 수 있어요.

Q 4월 혁명의 승리 요인 가운데 하나로 군의 중립을 언급하셨는데요, 군이 시위대에 발포하거나 적극적으로 진압하지 않았던 점이 80년 광주(5.18광주민주화운동)와 대비됩니다.

만일 4월 19일 계엄 때 출동한 군인들이 중립을 지키지 않았다면 80년 광주처럼 끔찍한 사태가 일어났을 겁니다. 공수부대도 나오지 않았고 이렇게 군이 중립을 지킨 이유에 대해서 일부에서는 미국의 영향이 컸던 거 아니냐는 주장을 해요. 물론 그 점도 있다고 봐요. 분명 송요찬 계엄사령관 같은 수뇌부에게는 미국의 영향력이 컸을 겁니다. 하지만 그것만은 아니라고 봅니다. 당시 군 장교들 사이에도 이승만 정권이 너무 썩었다는 인식과 정서가 팽배했어요. 이 장교들이 다 20대 후반부터 30, 40대 사람들인데, 이들도 집에 가서나 친구를 만나면 이승만 정권에 대한 폭정을 듣고 체감할 수밖에 없었겠지요.

게다가 3.15부정선거 때 군이 부정투표를 엄청 강요받아서 나름 불만이 컸단 말이지요. 학생들이 시위할 때 군인들도 내심 박수를 치고 싶은 생각이 있었을 거예요. 마산의거 때 경찰이 바로 총을 발포한 점을 두고 경찰에 대한 반감과 비판도 있었을 거예요. 그래서 4·19때 계엄으로 군이 출동했을 때 장교들은 총기사용을 엄격히 규제하는 명령을 내렸어요. 군이 직접 시위대와 만난 것은 4월 25, 26일야인데, 그때는 또 엄청난 시위대가 바로 탱크와 장갑차에 달라붙고 군이 시위대에 파묻혀버려서 진압하고 말고가 없었어요. 정말 놀라운 일이지요. 이때의 군은 우리가 부마항쟁, 광주항쟁을 거치면서 겪게 된 군과 아주 다르지요.

Q 앞으로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시리즈를 통해 한국 현대정치사의 면면을 계속 알려주실 텐데요, 독자들에게 꼭 하시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요.

역사교과서 국정화는 역사를 거꾸로 되돌리려 한다는 점에서 세계적으로 참 창피한 일이자 우리나라의 수준을 밑바닥으로 떨어뜨리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역사 교과서 국정화에 대한 젊은 세대의 거부감은 다양하고 폭넓은 생각을 규제한다는 데서 오는 저항이자 거부감이지요. 정말 당연하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저는 거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각자의 다양성 못지않게 우리의 현실을 제대로 들여다보는 인식도 필요하다고 봐요. 역사만큼 현실을 잘 이야기해줄 수 있는 건 없습니다. 역사는 현재를 비추는 거울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독자들이 조금만 시간을 내어 우리 근현대사에 쟁점이 되고 있는 사안에 대해 관심을 가졌으면 합니다.

사진 : 남경호(스튜디오2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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