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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인터파크 북DB May 26. 2016

산업화 아버지와 민주화 딸의 대화...

작가 인터뷰 <아버버지의 라듸오> 김진주 작가


          



라디오를 듣고 자란 딸의 청춘은 그 라디오를 만든 아버지를 부정한 시간이었다. 아버지가 가꾼 안락한 울타리를 벗어나 약사라는 안정된 직업을 버린 채 노동운동에 뛰어들었다. 속으로 아버지를 "부끄럽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그랬던 딸이 인생을 돌고 돌아 아버지와 함께 아버지의 인생을 담은 책을 엮었다. '나눔문화'에서 운영하고 있는 '라Ra카페 갤러리'에서 부녀가 함께 만든 책 <아버지의 라듸오>를 앞에 두고 딸 김진주(61) 작가와 아버지 고(故) 김해수 선생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이젠 세상에 없는 아버지를 떠올리면서 김진주 작가는 "아버지께 늘 미안하고 죄송하다"며 눈물을 보였다.  

구로공단 봉제공장의 미싱사로 일하면서 사노맹(남한사회주의노동자연맹)의 핵심으로 활동하다 잡혀간 법정에서 '사회주의 혁명 만세'를 결기 있게 외치던 김진주 작가의 모습은 사라지고 없었다. 하지만 "화려한 조명이 비추는 곳에서 앙상한 지성만 갖고 사는 세상보다 손발로 노동하면서 사랑하며 사는 세상이 행복한 세상"이라고 말하는 김진주 작가는 여전히 새 세상을 꿈꾸고 있었다.  

깊이가 느껴지는 느릿한 말투와 자꾸만 눈길이 가는 말간 얼굴. 국산 라디오 1호를 만든 아버지 김해수나 얼굴 없는 노동자 시인에서 이젠 사진작가로 유명한 그의 남편 박노해보다, 인생 후반기를 살고 있는 여성 김진주가 더 궁금했던 인터뷰였다. 



Q 딸이 아버지의 인생을 엮은 책이 흔치는 않다. 어떻게 책을 만들게 됐나. 



젊어서 아버지 속을 많이 썩였다. 아버지가 2005년에 돌아가셨는데 2003년 가을쯤 마지막으로 해드릴 효도가 없을까 궁리하다가 아버지 인생을 기록으로 남겨드려야겠다는 착한 생각을 했다. 원고를 세상에 널리 알리겠다는 생각보다는 편찮으시니까 옆에 있으면서 대화를 해야겠다는 마음으로 시작했다. 



Q 그 착한 생각이 정식 출판물로 결실을 맺었다. 



아버지 이야기를 엮다 보니 아버지가 하신 일들이 공적으로도 의미가 있다는 걸 알게 됐다. 1959년 국산 라디오 1호 개발 이후 국산 TV 1호 개발, 선풍기, 전화기, 전선 등 전자산업에 필요한 온갖 부품 개발에 관여하셨다. 이처럼 산업사회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던 엔지니어의 이야기이니까 젊은 사람들이 자신이 살고 있는 사회의 뿌리를 과학, 기술 측면에서 아는 데 도움이 될 거라 생각했다. 꽃이나 가지, 잎뿐 아니라 숨은 뿌리의 노고를 알고 감사하면서 우리도 스스로 뿌리가 될 수 있는 마음가짐을 가지자는 뜻으로 책을 냈다. 



책을 쓰는 과정 자체가 아버지와 딸이 서로를 이해하는 시간이었다. 아버지가 원고지에 꼭지별로 원고를 써서 딸에게 보냈다. 원고를 받은 딸은 수정하거나 보완할 부분을 체크해 아버지를 찾아뵀다. 아버지는 원고를 수정한 최종원고를 '고맙다, 수고시켜서 미안하다.'는 메모와 함께 다시 딸에게 보내왔다. 같은 서울에 살아도 일이 있을 때만 만났던 부녀는 책을 쓰는 동안은 거의 일주일에 한 번씩 만났다. 만나도 서먹하게 밥만 먹던 아버지와 딸 사이에 대화거리도 넘쳤다.





"숨은 뿌리의 노고 알고 우리 스스로 뿌리가 되자는 뜻으로 책 냈다" 



Q 김진주에게 김해수는 어떤 아버지였나. 



딸들은 이상형이 아버지이거나 아버지와 전혀 다른 사람이라고 하는데 나는 후자였다. 자라면서 아버지와 문화코드가 안 맞는다고 생각했다. TV를 봐도 아버지는 권투나 코미디, 가요무대 같은 걸 보셨는데 나는 팝송이나 클래식을 좋아했으니까. 아버지가 집에서 짜증을 좀 내셨다. 어려서는 잘 몰랐는데 밖에서 굉장히 힘들게 일하고 오셔서 지치고 피곤한 마음을 그렇게 표현하신 것 같다. 그런데 나는 그게 싫어서 아버지가 쉬는 날 같이 화초에 물을 주자고 하면 공부한다고 내 방에 틀어박혀 있곤 했다. 그게 지금 많이 후회된다.



Q 어머니에겐 어떤 남편이었던 것 같나. 



이상형이 아버지와 다른 사람이었다고 했는데 내가 사랑이나 사람을 잘 몰랐던 거다. 지금 돌아보면 아버지는 굉장히 로맨틱하셨다. 남자들을 보면 사랑을 받으려고만 하지 사랑하는 능력이 모자란 사람들이 많다. 실제 사랑은 노동을 통해서 이루어지는데도. 아버지는 달랐다. 쉬는 날도 늘 공구함을 들고서 이것저것 고치고 만들어서 집 안 구석구석 불편한 곳이 없도록 했다. 부엌에 있는 조그만 고리 하나까지 챙기셨다. 엄마는 굉장히 훌륭한 비서를 두셨던 셈이다. 아는 것도 많아서 뭘 물어보면 금방 대답해주는 사전이기도 했고….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엄마가 갑자기 비서가 없어져서 많이 불편하다고 말씀하신다. 



Q 그럼 남편인 박노해 시인은 아버지와 다른 편인가. 



아니다. 사위가 장인 닮는다는 말이 있는데 비슷한 점이 많다. 시인이나 노동운동가로 알려졌는데 사실은 엔지니어였다. 선반기능공이었고, 버스회사 정비사였으니까. 아버지하고 사위가 만나면 기술적인 얘기를 한참씩 하고 그랬다. 박 시인이 지금 사진을 찍고 있는데 처음 카메라를 잡게 해준 사람이 아버지였다. 신혼여행을 가는데 아버지가 즐겨 쓰던 카메라를 빌려주시면서 카메라 작동법을 알려주셨다. 참 사진도 잘 찍고 기계를 잘 만진다고 놀라워하셨던 기억이 난다.



<아버지의 라듸오> 속엔 김진주가 노동운동을 접하면서 박노해 시인을 만나 결혼하고 사노맹 사건으로 옥살이를 했던 과정이 짧게 그려진다. 그와 함께 일제 때 일본에서 전기 기술을 배워 한국전쟁 중 부산에서 미군 PX의 라디오 수리점을 성공적으로 운영한 후, 금성사(현재의 LG)에 공채 수석으로 입사해 한국 전자산업계에서 승승장구했던 김해수가 거실 한가운데 자랑스럽게 걸어뒀던 1979년 박정희 전 대통령에게 받은 '산업포장'을 슬그머니 서랍 속에 집어넣는 대목도 나온다. 



Q 김해수와 김진주의 삶을 보면 산업화 시대와 민주화 시대의 상징적 인물 같다. 책을 쓰면서 아버지 세대를 이해하게 됐나. 



운동을 막 시작할 때 아버지를 굉장히 비판적으로 봤다. 아버지가 일제 때는 친일 협력자였고, 군사정권 때는 선전도구 역할을 한 라디오를 만들고 자본가를 위해 기술개발을 하면서 일한 게 부끄럽고 사회에 빚진 느낌이었다. 내가 아버지를 대신해 속죄해야겠다는 생각으로 운동을 하기도 했다.



그런데 아버지의 삶을 기록하면서 아버지와 같은 산업화 세대가 이룬 성과에 비해 우리 민주화 세대가 온몸 바쳐서 하고자 했던 것들은 참 미진하고 부끄럽다는 생각을 했다. 구체적으로 사람들의 삶에 얼마나 도움이 됐는지, 사람들을 얼마나 행복하게 했는지를 되돌아보면 우리 세대가 했던 역할은 많이 부족하고, 앞으로도 내가 해왔던 일을 완성하기 위해 노력해야 할 사명이 있다는 걸 느낀다.





"아버지 삶 기록하면서 우리 민주화세대는 미진하고 부끄럽다 생각"



Q 2000년대 들어 나눔문화 활동을 한 것도 그런 생각의 연장인가. 



극단적인 좌익, 우익을 넘어서 합리적인 보수와 진보가 함께할 수 있는 운동, 새로운 진보를 꿈꾸면서 비영리사회단체인 나눔문화를 만들었다. 초창기에 창립선언문 작성부터 사단법인 만들고 기부금 지정단체 만들 때의 사무 처리부터 소소한 토론모임, 기획행사 진행을 챙기는 것은 물론 청소, 회원들 오면 밥상 차리는 일까지 했다. 15년 넘게 잘 뿌리내려 지금은 회원이 3500명이 넘어서고 있어서 여기 올 때마다 보람을 느낀다.



Q 한 역할에 비해 외부에 잘 알려지지 않은 데 대한 서운함은 없나. 나눔문화만 해도 박노해 시인이 더 떠오른다. 



박 시인이 워낙 탁월한 리더십이 있는 지도자이니까. 내가 2008년에 나눔문화를 떠났는데, 여기가 싫거나 상처를 받아서 떠난 게 아니라 내 이름으로 살아보고 싶어서였다. 어딜 가나 '박 시인의 누구'로 소개되니까. 사람들을 만나면 처음에 박 시인을 어떻게 만났냐고 많이 묻는데, 혼자서 운동을 계속할 자신이 없었다. 의지할 상대가 필요했는데 박 시인을 붙잡으면 내가 끝까지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땐 굉장히 의존적이었는데 나눔문화를 떠날 때는 그런 의존성을 탈피해 독립된 여성으로서 내 길을 가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Q 김진주라는 이름으로 지금은 어떤 일을 하고 있나. 



거제도의 한 요양병원에서 파트타임 약사로 일하면서 대체의학을 연구하고 있다. 지금은 다들 앞만 보고 달려서인지 안 아픈 사람이 없다. 그게 다 도시생활 속에서 상품화된 음식을 먹고 너무 많은 위험요소를 안고 살아서인데, 대체의학이 별게 아니다. 도시화된 삶에서 얻은 병을 생활습관이나 마음가짐을 바꿔 스스로 죽어 있던 야생성이나 자연치유력을 회복하는 방향을 안내하는 것이다. 음식이 중요해서 장도 직접 담그고 사람들이 와서 쉴 수 있는 공간도 마련하고 있다. 



Q 아버지의 뜻을 이어 하고 싶은 일은 없는지. 



아버지가 당신을 낮춰서 '전기쟁이'로 부르셨는데 우리나라는 장인들을 쟁이로 부르면서 천시하지 않나. 최근 장영실을 다룬 드라마도 했는데, 쟁이 문화를 좀 더 자랑스럽게 어린이나 젊은이들에게 전수할 수 있는 학교나 문화공간이 만들어지면 좋겠다. 꼭 내가 아니더라도 누군가 한다면 돕고 싶다. 



김해수 선생의 삶은 5월 5일 방송된 '과학의 달' 기념 KBS 특별 다큐 '빅 아이디어' 4부 '아버지의 라디오'를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김진주 작가는 다큐에 나오는, 국내에 서너 대밖에 남아 있지 않아서 어렵게 찾아낸 국산 라디오 1호에서 아버지가 직접 그린 회로도를 발견한 이야기를 하면서 아이처럼 기뻐했다. 그가 아버지의 삶을 기록으로 남겼기 때문에 이런 기쁨도 맛볼 수 있었을 거다. 김진주 작가는 박 시인 어머니의 삶을 담아서 '어머니의 꽃밭'을, 자신의 어머니의 삶을 담은 '어머니의 덧버선'도 기록으로 남기고 싶다고 했다. 



"5월이 가정의 달인데, 그런 게 없으면 만나도 대부분 대화 없이 밥만 먹잖아요. 사회적으로 의미가 크든 작든 어머니, 아버지가 살아온 생애를 기록으로 남기는 일은 소중한 것 같아요. 그건 자식들만이 할 수 있죠." 





사진 : 남경호(스튜디오2M)

취재 : 신정임(북DB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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