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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인터파크 북DB Jun 16. 2016

 "시대정신 없는 한국, '신사도'를 좌표를 삼아야"

대기자 변상욱 작가인터뷰

                  



"아, 그러세요? 오호, 이렇게 끈이 이어지다니. 변 선배한테 ’그대아침’에서 소개된 글 듣고 왔다고 꼭 강조해 얘기해주세요.^^"



출근길에 CBS 음악FM ’그대와 여는 아침(그대아침, 김용신 진행)’을 즐겨 듣는다. 프로그램 중에 한 토막 책을 읽어주는 코너가 있다. 5월 말 어느 날 변상욱 CBS 대기자의 책 <인생, 강하고 슬픈 그래서 아름다운>의 한 토막이 소개됐을 때, 짧은 낭독만 듣고 바로 마음먹었다. ’변상욱 대기자를 인터뷰해야겠다!’ 인터뷰 약속을 잡고, 서울 목동 CBS로 찾아가기로 한 날 아침 나는 ’그대와 여는 아침’에 그런 사연을 담아 문자메시지를 보냈다. 그리고 위와 같이 김용신 아나운서가 손수 보낸 답장을 받았다.



즐거운 ’끈’으로 이어진 인터뷰. 덕분에 변상욱 대기자를 만났을 때도 기분 좋게 웃으며 긴장을 풀 수 있었다. 변상욱. 그는 우리 언론계에 몇 안 되는 ’대(大)기자’다. 32년 동안 한 매체의 기자로 평생 살아온 사람. 그는 CBS의 보도 기능이 박탈당했던 전두환 정권 시절 ’프레스카드 없는’ 기자로 언론인의 길을 걷기 시작해, 이후 부활한 보도 프로그램의 취재 제작과 뉴스 앵커 등을 두루 거쳤다. 현재는 콘텐츠본부장이라는 직책을 맡고 있지만 지금도 여전히 아침 시사프로그램에서 기명 칼럼 코너를 맡고 있다.



그의 책을 먼저 읽었기 때문일까. 한눈에 보이는 그의 이미지는 ’신사’라는 말로 요약될 것 같았다. 냉정하고 고집 있는 기자의 이미지보다, 자신을 닦고 돌아보며 남을 존중하는 신사의 이미지. 평생 방송을 해온 사람답게 그의 말은 조리 있고 끊김이 없었지만, ’말하기 전에 먼저 듣는다’는 경청의 태도가 눈에 띄었다.



이번 책은 제목부터 좀 "달달"하다. 그의 이전 책 <굿바이 MB>(2012년), <대한민국은 왜 헛발질만 하는가>(2014년)와 비교하면 확실히 차이가 느껴진다. 어째서 이런 "달달한" 책을 내게 됐을까?



"기자로서, 감수성이 배어 들어가야 하는 달달한 글은 잘 안 쓰게 돼요. 2000년쯤부터 제가 페미니즘계에 발을 들여놓게 됐어요. 그리고 잡지사에서 일하는 후배들이 글을 써달라고 하면 정 때문에 거절을 못하고 계속 썼던 거죠. 글을 쓰면 미니홈피에도 올리고 그랬는데, 그중 짤막한 멘토링 글들을 출판사에서 주목해서 나온 책이 <우리 이렇게 살자>(2014년)예요. 그리고 실제로 그런 멘토링들을 제 가슴속에서 이끌어내기까지 제가 읽은 책들이나 제가 한 경험들, 제가 만난 사람들 이야기를 해설판처럼 모은 책이 이번 책이에요."





"끗발로 누르거나 지역별로 싸우거나... 시대정신 없기 때문"



책의 부제는 "CBS 변상욱 대기자의 살아가는 이유". 그가 평생을 기자로 살면서 느끼고 깨친 인생에 대한 이야기, 남성으로서 여성을 보는 것, 나이 든 세대로서 젊은 세대를 보는 것, 21세기에 생각해보는 신사론 등의 이야기로 구성돼 있다. 단순히 <우리 이렇게 살자>라는 전작의 해설판이라기보다는, 그가 기자로서, 또는 한 인간으로서 세상을 바라보고 인생을 살아가는 관점과 시각을 종합적으로 보여주는 책이다.



그는 자신이 읽은 책, 들은 음악, 본 영화나 그림 속에서 인생의 의미를 찾아 보여준다. 특히 책 속에는 동서양의 명화들이 많이 등장한다. 그의 미니홈피 사진첩에 그림들이 계속 올라오는 것을 눈여겨본 출판사 편집자가 이번 책에 특별히 명화 이미지를 넣자고 제안했기 때문이다. 변상욱 대기자는 손수 자기가 좋아하는 그림들을 골라 책에 실었다. 그중에서 가장 아끼는 그림은? 185쪽에 실린 요하네스 얀 페르메이르의 ’델프트의 풍경’이다. 그 부분의 소제목이 "누가 이 나라를 ’헬조선’으로 만드는가"인데, 350여 년 전 네덜란드의 풍경화와 ’헬조선’ 사이에는 어떤 연관성이 있을지. 궁금한 독자들은 책을 통해 직접 확인하길 바란다.



책을 읽으며, 안에서 시작해 밖으로 향하는 성찰의 시선이 느껴졌다. 자신의 내면을 돌아보고 반성하고, 가족으로, 이웃으로, 사회로, 전 인류로 그 성찰의 눈을 넓혀나가는 한 인간의 ’수양의 기록’ 같았다. 성찰의 키워드는 ’존중’이라고 읽었다. 진정한 존중은 자신에 대한 존중부터 시작해 타인과 사회에 대한 존중과 배려로 나아가는 것이다. 그리고 존중을 통해 닦아가는 인간성의 목적지에는 ’신사’라는 단어가 있었다.



"(성찰의 시선이 흐르는 방향은) 사실 신학적 방향과 관련이 있습니다. ’존재의 가장 깊은 곳에 신이 존재한다.’ 그걸 들여다보는 게 신앙의 시작입니다. 자기 안으로 깊이 들어가서 신을 발견한 다음에는 다시 바깥으로 나아가야 되는 거죠. 책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내 안으로 들어오고 들어왔다가, 다시 나가고 나가서 별과 별 사이의 어둠을 보는 것까지, 결국 방향성이에요. 가장 안으로 들어가서 자기라는 존재를 확인하고 자기가 얼마나 신으로부터 배려받고 있는지 느끼고, 다시 그걸 가지고 밖으로 확장시켜서 우주에 대해 인식하는 과정. 그게 들어 있죠.



그리고 ’신사’란 멋진 양복을 입었다고 신사가 아니에요. 제일 중요한 건 사회가 그들을 좌표로 삼는다는 거죠. 신사들은 가끔 있을 수 있어요. 우리 사회의 가장 큰 문제는 그게 사회의 좌표가 되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냥 개인적으로 멋지고 똑똑하고 예의바른 것으로 끝나죠. 지금 페미니즘이다 아니다 엄청나게 싸우고, 나이 든 사람과 젊은 사람 간의 갈등을 조장하는 풍조도 있습니다. 적어도 남을 배려하도록 자신을 계속 갈고 닦는 모습, 바로 신사도(紳士道) 정도가 당장 받아들여질 수 있는 좌표가 아닐까 해요."



변상욱 대기자는 신사도의 의미를 조금 넓혀보면 우리 사회의 시대정신까지 생각할 수 있다고 했다. 그는 우리 사회의 가장 큰 약점이 지배철학, 즉 시대정신이 없는 것이라고 짚었다. 그렇기 때문에 “끗발로 누르거나 나이로 누르거나 지역별로 싸우거나” 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사회의 중심을 당장은 찾기가 어렵기 때문에, 적어도 남을 배려하는 21세기 신사숙녀의 모습이 합리적이고 실용적인 첫 단계라고 보는 것이다.





김영란법 비판하는 기자들... "적어도 기자라면 ’사실’에는 정직해야"



기자로 살아온 30여 년의 시간. 요즘 들어 ’조로(早老)현상’이 심해지고 마흔만 넘어도 ’인생 2모작’을 준비해야 한다는 기자사회에서 그의 이력은 당연히 빛나 보인다. 더군다나 ’고분고분함’과는 거리가 멀었던 그가 기자인생을 지금껏 이어올 수 있었던 비결은 뭘까. 그에게 기자로서 자신의 장단점은 무엇이라 생각하는지 물었다. 그가 스스로 꼽은 장점은 눈치가 빠르다는 것. 그리고 단점은 숫기가 없어서 낯을 가린다는 것.



그는 숫기가 없다는 건 "기자로서 무지하게 치명적인 단점"이라면서, "어떻게 살아남았는지 모르겠다"고 말하며 웃었다. 손석희 JTBC 보도부문 사장 같은 저돌적인 취재 스타일을 보이지 못하는 것 때문에 남모를 열등감도 있었다고. 눈치가 빠르기 때문에 ’이렇게 말하면 저 사람이 기분 나쁠 것 같은데……’ 하는 생각을 먼저 하게 된단다. 대신 눈치 빠른 것이 장점으로 작용하면 취재원을 보는 순간 "좋은 나라인지 나쁜 나라인지" 육감적으로 바로 알아차릴 수 있기 때문에 그건 참 좋다고 말했다.



그에게도 기자생활이 버겁고, 그만 내려놓고 싶다고 생각한 때가 있었을까? 분명 살인적인 취재일정이 계속될 때는 "내 생명이 통째로 깎여나가는 느낌"을 받으면서, 일을 계속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하기도 했단다. 그리고 기자라는 직업 자체에 회의를 느낀 적도 한 번 있었다.



"영등포에 한강성심병원이라고 있어요. 밤마다 병원을 돌게 돼 있는데 (기사 거리를) 한 건도 못 건졌어요. 한강성심병원이 마지막이었는데 막 구급차에서 환자가 실려왔어요. 본능적으로 응급실로 따라 들어갔는데, 피가 막 뿜어져 나오고 난리가 났죠. 두세 시간 지나 새벽이 오고 있는데, 문득 내 자신을 발견한 거예요. 저 사람이 죽기를 기다리고 있는 거야. 죽어야 기사가 되니까. 죽어가는 아이 옆에서 독수리가 기다리고 있는 것처럼……. 완전히 발가벗겨진 느낌이었죠. 수첩과 볼펜만 들고 사람들 앞에 발가벗고 서 있는 느낌. 내가 언론이라는 것에 몸담아야 되는지, 그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생각했던 것 같아요. 트라우마 때문에 한동안 취재를 못 나갔어요. 그때가 제일 힘들었던 것 같아요."



조금씩 조금씩 마음을 다잡으면서 그는 "기자는 기도해야 한다"는 깨달음을 얻게 됐다. 여기서 말하는 기도는 꼭 종교적인 기도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자기 영혼, 자기 욕망, 기자로서 가져야 할 투쟁의지" 같은 것들을 깨끗하게 지키기 위해 자신을 들여다보는 행동은 모두 기도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자기 욕망’이라는 말이 불편한 가시처럼 마음에 걸린다. 최근 각기 다른 매체에서 기자로 일하는 선후배들과 모일 기회가 있었는데, 그 자리에서 들은 말이 생각난다. 어느 유력 신문의 신입기자가 "하필 내가 기자가 되자마자 김영란법이 시행돼서 밥도 못 얻어먹게 생겼다"라고 푸념했다는 것을 그 자리에서 전해 들었기 때문이다. 공직자와 언론인 등의 부정청탁과 금품수수를 막기 위한 법인 김영란법. 5월 초 시행령안이 발표된 뒤 일부 언론은 공개적으로 비판하고 나섰지만, 국민들의 여론은 우호적으로 보인다.



"적어도 기자라면, ’사실’에는 정직해야 돼요. 사실이면 받아들여야죠. 내 입장이나 내 회사의 입장이 무엇이든 사실에는 열려 있어야 한다는 것. 예를 들어 여성혐오가 존재한다는 게 사실이면 받아들여야 하는데, 묘한 글솜씨로 빠져나가거나 덮으려고 하면 안 되는 거죠. 기자가 관(官)과 유착해서 돈이 왔다 갔다 하는 게 누가 봐도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라면, 안 되는 일이라고 인정해야죠. 그런데 거기다 대고 얼마까지는 괜찮지 않냐는 둥, 시기상조라는 둥, 꽃값이 떨어지고 골프장이 망한다는 둥……, 명백한 사실에 대해서 기자가 열려 있지 않는 거죠. 시대가 바뀌는데 새로운 사실에 대해 기자가 열려 있지 않는 거예요."





"나는 좌파-우파 아닌 ’인간적 정직파’... 좋은 이야기꾼 되고 싶다"



이번 책 <인생, 강하고 슬픈 그래서 아름다운>에는 그가 읽은 여러 권의 책이 소개돼 있다. 그런데 내가 놀랐던 것은 그의 독서 요령(?)을 고백한 대목이었다. "머리글과 목차, 결론과 후기만 읽고 다음 책으로 옮겨 가는 방식"이라는데, 이거 좀 ’꼼수’ 아닌가 싶기도 하다. "아, 내가 그 얘긴 안 쓰려고 했는데……"라고 멋쩍게 웃던 그는 결국 "트렌드를 쫓아가기 위해서" 만들어낸 궁여지책이라고 해명(?)했다. 기자생활을 하면 할수록 트렌드를 더 잘 알아야 하는데 읽을 것은 너무 많고 시간은 없어서 그렇게라도 읽는다는 거였다.



물론 그것은 그의 독서법 중 하나의 과정일 뿐이다. 그는 "어느 저자에게 꽂히면 그의 책은 모조리 구해 여러 번 되풀이해 읽"고 "몇몇은 소중히 보관하면서 평생 읽"는다. 속독 요령으로 수많은 책을 접해보고, 그중에서 자신이 파고들고 싶은 저자와 책을 발견하면 집요하게 읽고 또 읽는 것이 그의 독서법이다.



그가 꽂힌 저자들은 장일순, 노자, 장자, 틱낫한, 송천성, 앤소니 드 멜로, 에두아르도 갈레아노 등과 같은 이들이다. 그들의 책은 몇 군데 서점을 뒤져서라도 구하는 대로 사두고 "항상 머리맡에 두고 이사 갈 때도 제일 먼저 챙긴"다고 한다. 그가 좋아하는 작가들의 이름을 쭉 듣고 보니, <인생, 강하고 슬픈 그래서 아름다운>에 담겨 있는 그의 인생에 대한 가치관과 깊이가 어디서부터 왔는지도 짐작할 수 있을 것 같다.



이 책은 ’진정한 신사로 깊어가고 싶은 이들에게’ 신사다움, 인간다움이란 무엇인지 이야기하는 책이라 볼 수 있다. 그들에게 권해주고 싶은 다른 책이 또 있을까? 변상욱 대기자가 권한 책은 <사람, 장소, 환대>(2015년)다. 저자인 인류학자 김현경 박사는, 사람이 된다는 것은 자리(장소)를 갖는다는 것이며 환대란 자리를 주는 행위라고 봤다. 구조기능주의에서 벗어나 사람, 장소, 환대라는 세 개념을 중심으로 사회를 다시 정의한 책이다. 이 책 저자가 말하는 환대란, 변상욱 대기자가 말하는 신사의 배려와 일맥상통한다. 그리고 앤소니 드 멜로의 <깨어나십시오>(2005년) 역시 함께 읽으면 좋을 책으로 추천했다.



마지막으로, 어떤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은지 물었더니 그는 "그저 좋은 이야기꾼이 되는 것이 목표”라고 답했다. 좌파도 우파도 아닌 "인간적 정직파"로서 "일단 정직하게 가봐야” 하겠다고 담담하게 덧붙이며.



인터뷰 초반, 그에게 "살아가는 이유"에 대해 물은 바 있다. 그의 대답은 "흔들리고 있어요"라고 시작했다. 하지만 대답을 끝까지 듣고 나서야 나는 그것이 일종의 ’겸손의 표현’임을 알 수 있었다. 자신을 돌아볼 줄 모르는 자는 자신이 흔들리고 있는지 아닌지조차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고학력자는 많지만 지식인은 없는 세상. 그가 끝까지 ’흔들리는 지식인’으로 남아, 사람과 우주를 고민하고 성찰하고 또 실천하기를 바란다.



"가장 희망을 준 말은, 한 영화의 대사인데, ’들꽃도 햇볕을 쫓아 자리를 옮겨다니지 않는다’라는 말이에요. 결코 피하지 않는, 내게 주어진 것을 당당하게 받아들이는 모습이죠. 어차피 혼돈의 세상이지만, ‘이게 조금 더 편하거나 유리하지 않을까’ 얍삽하게 옮겨 다니는 경우가 있잖아요. (흔들릴 때마다) ’풀 한 포기도 그렇게는 안 하는데, 인간이라고 자존심을 갖고 있다면서 그럴 수는 없지 않은가’ 그렇게 생각하는 거죠."





사진 : 신동석


취재 : 최규화(북DB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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