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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인터파크 북DB Jul 08. 2016

이금이의 '인생작품'… 역사를 끌어안은 두 소녀의 운명




교복을 입은 중학생들이 몰려왔다. 같이 온 교사가 "작가님, 우리 학교에 강연 오셨잖아요" 하면서 반가워한다. 지나가던 20대 젊은이는 테이블 위에 놓인 책을 보고는 "작가님 새 책 쓰셨네"라면서 바로 산 뒤 사인을 요구한다. 아이와 함께 온 중년 여성은 "작가님 책은 다 읽었어요"라면서 '열성팬'임을 고백한다. 

지난 6월 서울 코엑스에서 열린 서울국제도서전 중 이금이 작가 사인회 모습이다. 그가 쓴 <밤티 마을 큰돌이네 집> <너도 하늘말나리야> <유진과 유진> 등을 읽으면서 자란 어른 독자와, 이제 막 이 작가의 책을 접하고 커갈 어린 독자가 함께하는 모습 자체가 그가 걸어온 문학의 길을 말해주고 있었다. 

30년이 넘도록 아동·청소년문학 한 길을 일구었지만, 그가 작품 속에 한결같이 담아온 우리 삶의 진실한 모습은 나이를 뛰어넘어 폭넓은 독자들에게 사랑받아왔다. 그런 그가 작가 생활 32년 만에 새로운 장르에 도전했다. 역사장편소설이다. 일제강점기부터 해방, 한국전쟁에 이르는 긴 시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한국 근현대사는 이금이의 펜 속에서 어떻게 재탄생했을까. 그가 스스럼없이 '인생작품'이라고 말하는 새 작품, <거기, 내가 가면 안 돼요?>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Q 처음으로 역사소설을 썼다. 이번 작품을 구상하게 된 계기가 있나.



우리나라가 반도인데다 분단으로 막혀 있어서 섬 같다는 생각을 많이 한다. 초등학교 때 일제강점기나 근대 우리 문학작품들을 보면서 놀랐다. 그때(작가가 초등학교 때)는 벌써 분단이 고착화되고 반공이 국시였던 때인데, 소설 속에서는 중국도 가고 러시아도 막 가는 게 신기했다. 기차를 타고 그렇게 멀리 가면 어떤 기분일까 궁금했고, 성인이 돼서도 남북 철도를 연결한다는 기사를 보면 가슴이 막 뛰었다. 그래서 늘 청소년기인 아이가 한반도를 뛰어넘어 탁 트인 공간에서 활약하는 이야기를 쓰고 싶었다. 그러려면 시대는 일제강점기여야 했다. 어떻게 보면 시대적 배경은 하려고 한 이야기보다 뒤에 결정한 셈이다. 그렇게 역사소설이라는 장르를 택했다.



Q 처음 쓰는 장르여서 기존 작업과 다른 부분이 있었을 텐데.



나는 계속 '지금 여기서 일어나는 일'들을 주로 써오지 않았나. 그런데 이번 작품에서는 시간도 공간도 달라진 것이다. 경성을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지금 서울과는 다르다. 취재를 일본이나 미국으로 가도 소설 속 모습은 현재 그 장소가 아닌 것이다. 그렇게 시공간을 다 뛰어넘는 일이 많이 힘들었다. 처음엔 상상이 잘 안 돼서 내가 이렇게 상상력이 없었나 싶었다. 



역사공부도 하고 등장인물도 만들고 그들이 할 이야기도 다 짰는데도 생명이 안 들어갔다. 등장인물이 밥을 한번 먹게 하려고 해도 무슨 반찬을 먹었을지가 안 떠오르는 거다. 설령 그걸 안 쓰더라도 머릿속에서 자연스럽게 생각이 나야 하는데 안 나니까, 인물들을 움직이게 하는 데 애를 먹었다. 마지막쯤 가서야 그 재미를 느껴서 나중엔 능청스럽게 김구 선생님도 자연스럽게 등장시킬 수 있었다.





대한민국 대표 아동·청소년문학 작가 이금이의 첫 역사장편소설



Q 이번 소설은 '수남'과 '채령'이라는 두 여성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삶을 대하는 태도가 완전히 다른 두 사람인데, 짧게 캐릭터를 소개해달라.



처음 만든 인물이 수남이다. 작품을 시작할 때면 머릿속에 처음 떠오르는 장면이 있는데, 이번 작품에서는 수남이가 태어나는 장면이었다. 시골 가난한 소작농 집에서 엄마의 배 속 양분을 파먹으면서 간신히 태어났지만 계집이라고 환영받지 못하는 모습. 그런 수남이라는 아이가 자기 공간을 넓혀가면서 인생을 경험하는 이야기를 쓰고 싶었다. 그때는 지금보다 훨씬 여성들한테 기회도 적고 신분 제약도 있었을 텐데 어떻게 공간을 넓힐까 생각하니, 얘가 도시로 가야 이야기가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이야기를 만드는 과정에서 채령이라는 인물이 떠올랐다. 친일파였던 귀족의 딸로. 수남이를 당차고 자기 운명을 개척하는 인물로 그리면서, '귀족의 딸' 하면 떠오르는 전형적인 성격이 생각났다. 채령이를 그렇게 부잣집에서 자란 철이 없고 못된 아이로만 그리는 게 맞나 싶었다. 그래서 당시 부잣집 신분 높은 여자들에게 가해지는 제약에서 자유롭지 못한 채령이를 표현했다.



"거기, 내가 가면 안 돼요?" 이 한마디로 채령의 몸종으로 팔려 경성에 왔던 수남은 채령으로 위장해 황군여자위문대에 갔다가 국경을 넘고 바다를 건너 대륙을 횡단해 일본, 미국, 중국까지 이르는 파란만장한 삶을 산다. 자작의 딸로 남부러울 것 없이 살던 채령 역시 미국에서 이민자 수용소에 갇히는 등 험난한 인생 역정을 겪는다. 두 주인공이 신분과 성별, 배움과 문화, 민족과 인종 따위의 온갖 장벽을 뛰어넘으며 자기 운명을 개척하는 동안 일제강점기와 해방 정국이라는 격동기가 그들을 거쳐간다. 이 작가는 "그들의 일대기가 우리 역사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고 역사를 상징하기도 합니다"라고 말했다.



Q 작가의 말 제목이 ‘등장인물들로부터 인생을 배우다’이다. 그들로부터 어떤 인생을 배웠나.



책에는 채령의 엄마 곽씨와 아빠 윤형만뿐만 아니라 채령네 안채 일을 책임진 술이네, 채령을 짝사랑한 준페이와 그의 삼촌 지로 등 다양한 인물들이 나온다. 주인공들의 삶은 미리 플롯을 짜고 작품을 시작했지만 보조 인물들은 그 상황에 맞춰서 그들 스스로가 자기 역할을 살아가는 경험을 했다. 영화나 드라마를 보면 꼭 주인공이 아니더라도 '이 사람 정말 열심히 자기 삶을 사는구나'라고 느껴지는 조연들이 있는데, 내 작품 등장인물들에게서 그걸 느낀 거다.



조연이어서 나는 필요한 만큼만 썼지만 내 생각에는 내가 쓰지 않은 동안에도 그들은 자기 삶을 살았을 거다. 그렇게 주어진 삶에 치열하게 사는 걸 배웠다. 그때 살았던 사람들이 얼마나 어려운 환경 속에서 살았겠는가. 내게는 인물 하나하나가 살아서, 그 시대를 살아간 인물들을 지켜보면서 쓴 것 같은 느낌이다.



Q '밤티마을' 시리즈의 '팥쥐엄마'처럼 이 작가의 작품 속 인물들이 '착하다'는 평을 많이 듣는데 이번에는 인간의 양면성이 많이 부각되었다.



그동안 동화나 청소년소설을 쓰면서, 내 작품을 읽는 어린이나 청소년 독자들에게 좋은 영향을 미쳤으면 했다. 그럴 때 악한 인물들을 보여주면서 이들을 닮지 말라고 할 수도 있지만, 그보다는 이렇게 착하고 좋은 일을 하고서도 사람은 얼마든지 멋진 사람으로 살 수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어서 선한 인물들을 많이 그렸다. 또 장르 특성상 인물을 표현하는 데 제약이 있기도 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독자층을 좀 높게 잡아서 인물들을 좀 더 입체적으로 그릴 수 있었다.



Q 주인공들의 끝이 좋지는 않다. 해피엔딩을 원하는 독자 입장에서는 가슴이 아팠다.



우리 역사를 생각하면 그게 더 현실적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모든 걸 빼앗긴 수남이의 삶은 의미가 없을까. 그렇지 않다. 사실 우리 역사는 채령이가 아니라 수남이 같은 사람들에 의해 조금씩이라도 나아지지 않았나. 어떻게 보면 가장 인간적인 삶을 산 건 수남이다. '위안부'로 끌려온 분이를 20년 동안 돌본 것도 그렇고. 



Q 마지막에 수남이가 한때 '자작의 딸'로 살았던 것에 대해 "자작이라는 칭호가 오명이 되는 세상이 오지 않았다면 영원히 자작의 딸로 살고 싶었을 거"라고 한 고백이 전해주는 울림도 있었다.



정말 주저 없이 올바른 걸 선택하고 자기를 희생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누구나 무수한 고민 끝에 선택하는 거다. 결국 수남이의 고백은 내 자신의 고백이자 우리 인간의 고백이기도 하다. 이 책을 읽는 독자들에게도 끊임없는 흔들림 속에서도 결국 우리는 무엇을 선택해야 하는지에 대해 말하고 싶었다. 또 하나, 사람이 자신의 과오를 고백하기가 쉽지 않은데 수남이가 그렇게 솔직하게 고백한 건 굉장히 용기 있는 행동이었다고 생각한다. 





"요즘 아이들, 자기 운명 개척하는 능력 빼앗기고 있다"



Q <유진과 유진>에서 성폭력 문제를 전면으로 다루었는데 이번 소설에서도 '위안부' 문제가 중요한 사건으로 등장한다. 여성작가여서 성문제를 더 섬세하게 다루고 있는 듯하다.



요즘 뉴스를 보면 성폭력 사건 뉴스가 없는 날이 없지 않은가. 우리 여성들이 일상에서 늘 느끼는 공포나 두려움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유진과 유진>을 쓸 때는 성폭력 문제를 다룬 작품이 별로 없어서 이슈가 되긴 했지만, 사실은 포괄적인 상처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었다. 사춘기 아이들의 예민한 감수성과 부모와 소통하지 못할 때 겪는 상처에 대해. 성폭력 피해가 어떻게 보면 가장 치유하기 힘든 상처이기도 하고. 이번에는 일제강점기에 사는 여성의 이야기를 하면서 ‘위안부’ 이야기를 안 하고 넘어가는 건, (일제강점기 여성) 이야기를 제대로 안 하는 거라고 생각했다. 말씀한 것처럼 여성이기 때문에도 더더군다나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Q <유진과 유진>이 상처에 관한 이야기였다면 이번 작품에서는 무엇을 말하고 싶었나.



처음 구상을 한마디로 하면 '도전'이었다. 삶과 공간, 시대에 대한 도전. 안 되더라도 일단 해보는 용기. 그랬는데 구상을 펼쳐내면서 그냥 '인물들의 삶 자체를 그리자'라고 바꿨다. 좋은 날도 있고 나쁜 날도 있고, 또 앞에 뭐가 펼쳐질지 모르는 게 우리 삶이라고.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인간으로 태어난 이상 자기에게 주어진 몫을 다해 끝까지 가야 한다고. 



Q 제목에 나온 '거기'’라는 단어 또한 여러 가지 의미를 품고 있는 것 같다.



처음에 수남이가 채령이의 몸종으로 갈 때 '거기'는 경성이었지만 그 다음부터 '거기'는 폭이 넓어진다. 이처럼 거기란 어떤 장소를 말하기도 하고 '불가능하다고 여겨지는 무언가'를 뜻하기도 한다. 



Q 이번 작품 취재노트에 "작가란 늘 남들이 경험하지 못한 '거기'에 가고 싶어 몸살을 앓는 사람들"이라고 썼다. 이 작가에게도 작가로서 넘고 싶은 '거기'가 있을 것 같다.



작가로서 '거기'는 이번 작품보다 나 자신을 갱신하는 다음 작품을 쓰는 것이다. 이번 작품은 시공간을 달리하는 도전을 했고, 분량도 2000매로 지금까지 쓴 작품 중에서 가장 길다. 지금까지 주로 엄마와 자식 사이의 이야기를 많이 썼다. 여성작가니까 여성의 마음을 더 많이 알고 대변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한편으로는 좀 쉽게 작업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그래서 다음 작품에서는 사춘기 자녀를 둔 아빠들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Q '들어가는 글'에 요즘 청소년들에 대한 안타까운 마음을 잠깐 드러냈다. 마지막으로 아동·청소년문학 작가로서 현재를 살고 있는 청소년들에게 한마디 해달라.



고생으로 치면 이번 작품 속에 나오는 아이들이 요즘 아이들보다 훨씬 고생을 많이 하지만 이들은 스스로 자기 운명을 개척해나간다. 우리 아이들한테도 그런 능력이 있다고 생각하는데 그런 능력을 다 빼앗기고 있는 것 같다. 우리 아들이 중학교 다닐 때 “엄마, 내 친구들 중에는 자기를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애들이 너무 많아. ‘농구할래?’라고 물으면 엄마한테 물어봐야 한대.”라고 말한 적이 있다. 이게 요즘 청소년들의 현실인데, 더 안타까운 건 어린이나 청소년들조차 부모가 시키는 대로 해서 좋은 대학 가고 좋은 직장에 취직해야 한다고 생각한다는 거다. 그런 모습이 너무 안타까워서 한마디 하고 싶다. "우리 아이들에게 자유를 허하라."





사진 : 남경호(스튜디오2M)

취재 : 신정임(북DB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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