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골독서가의 세상읽기
확실히 하고 가자. 나, 머리 감는 사람이다. 앞머리가 많이 빠져 속칭 ‘대머리’가 됐지만, 아침마다 머리 감으며 하루를 시작한다. 나랑 무려 3년째 살고 있는 여자가 최근 이렇게 말했다.
"선배도 머리를 감아? 정말? 그냥 세수를 넓고 크게 하는 거 아니었어?!"
얼마 안 남은 머리마저 다 빠져버리는 듯한 충격을 받았다. 도대체 나랑 살면서 뭘 봤단 말인가. 함께 사는 사람이 이렇게 말할 지경이니, 혹시라도 독자들이 오해할까봐 명확히 밝힌다.
그날 아침에도, 나는 분명히 욕실에서 머리를 감고 있었다. 라디오에서 놀라운 뉴스가 흘러 나왔다. 확실하지는 않지만 대략 이랬다.
"한국의 여성 무기수 가운데 절반 이상은 남편을 살해한 여성들입니다."
비누 거품으로 머리를 문지르며 생각했다. '그녀들은 왜 칼을 들었을까.' 이게 출발이었다. 나는 여성 살인범 기획취재를 시작했다. 그날 이후 3년째 거의 살인사건만 취재하고 있다. 날이면 날마다 살인사건 기록을 보고, 뉴스를 읽고, 책을 훑다보니 '수사반장'이 되기는커녕 밤마다 악몽만 꾸었다. 칼만 봐도 무서웠다.
지리산 피아골의 내 방에는 여전히 호신용(?) 몽둥이 두 개가 있다. 몽둥이를 옆에 두고 자면 그나마 숙면을 한다. 주룩주룩 비 내리는 여름밤에, 몽둥이 만지작거리며 <그녀는 왜 연쇄살인범이 되었나>(알마, 2011년)를 읽으니 내 넓은 이마에 식은땀이 맺히는 듯했다.
독일 연쇄살인 전문 수사관 슈테판 하르보르트가 쓴 이 책은 제목 그대로 독일의 여성 연쇄살인범 탄생과정과 배경 등을 분석한 책이다. 실제 사건을 통해 여성들이 어떻게 살인범, 그것도 연쇄살인범이 되는지를 르포 형식으로 보여주는 이 책은 충격 그 자체이다.
사건이 끔찍하고, 여성 살인범이 잔인하기 때문이 아니다. 아무리 잔인하다 하더라도 그녀들의 범죄는 남성 살인범의 그것을 뛰어넘지 못한다. 이 책이 주는 충격의 근원에는 살인사건에도 남녀차별이 존재한다는 불편한 진실이 있다.
대개의 사람은 남성이 저지른 살인사건에 익숙하고, 그래서 관대하다. 하지만 여성이 살인을 저지르면 사회는 전설 속의 악마가 인간 세상에 태어나기라도 한 듯이 큰 충격을 받는다. 여성 살인범은 쉽고 빠르게 악마 취급을 받는다. 특히 자신이 낳은 영아를 살해한 여성은 '악의 화신'으로 거듭난다.
여자 혼자 아이를 가질 수는 노릇이다. 세상의 온갖 비난과 욕설이 엄마에게 향할 때, 아버지(남성)는 어디로 사라진 걸까? 영아 살해의 모든 책임을 여성이 뒤집어쓰는 건 독일도 마찬가지인 듯하다. 책에는 자신이 낳은 아이 9명을 죽이거나 죽게 한 여성이 나온다. 그녀는 처벌받았지만, 남편은 그렇지 않았다.
그는 수사기관에서 아내가 임신한지 몰랐다고 잡아뗐다. 본인이 임신을 시켜놓고선 평소 아내에게 "임신은 절대 안 돼!"라고 소리쳤다. 아이는 남녀가 함께 만들었지만, 여자 혼자 그 아이를 '처리'했고, 그래서 그녀만 처벌받았다.
영아 살해는 경찰의 범죄 통계에서 여성이 범인으로 압도적인 비중을 차지하는 유일한 범행이다. 또 그게 사안의 본성상 어쩔 수 없는 노릇이기도 하다. 결과적으로 임신을 숨기고 부정하다가 아이를 낳아 죽이는 주체는 여성이기 때문이다. 물론 사회적인 모든 연관을 솎아버리고 비극의 책임을 여성에게만 묻는 것은 근본적으로 잘못된 것이다. 원치 않은 임신의 씨를 뿌린 남성 역시 그 책임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 <그녀는 왜 연쇄살인범이 되었나> 111쪽
세상은 영아를 살해한 여성에게 '모성애가 없다'고 비난을 퍼붓는다. 저자는 이런 비난에 대해서도 생각해볼 문제를 던져준다.
아기에게 모든 정성을 쏟는 모성애라는 신비는 20세기 들어 여러 학문이 앞다투어 연구해온 주제다. (줄임) 최근의 연구에 따르면, 엄마가 아기와의 밀접한 관계를 형성하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요소들이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밝혀졌다.
우선, 생후 첫 달을 넘길 즈음에 아기와 눈을 맞추는 경험은 황홀하다 못해 환상적이다. 이때 아기는 처음으로 엄마를 향해 의식적으로 미소를 짓는다. 또 생후 약 9주가 지나고 나면 아기는 엄마와 다른 사람을 구별할 줄 안다. 그러니까 지난 이론에서 당연한 것으로 여겼던 자동적으로 본능적인 모성애라는 것은 설득력이 없다.
다시 말해서 임신 기간에 모성애가 저절로 생겨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엄마와 아기의 밀접한 관계는 상당 부분 출산 이후에야 비로소 만들어지는 것임에 틀림없다. 몇 주에 걸쳐 아기를 돌보면서 맛보는 기쁨과 고통이 서로 어울려 작용하면서 생겨나고 발달하는 게 모성애라는 말이다. - <그녀는 왜 연쇄살인범이 되었나> 109쪽
이 책이 여성의 영아살해만을 다룬 건 아니다. 치정 사건도 있고, 병원에서 17명의 환자를 살해한 간호사도 나온다. 일부 예외적인 상황을 제외하면, 남성 (연쇄)살인범과 여성 (연쇄)살인범의 차이점은 뚜렷하다.
남성은 보통 전혀 모르는 타인을 상대로 범행을 저지르는 반면, 여성은 주로 가까운 사이에 있는 아이, 남자, 여자를 공격 대상으로 삼는다. 친척이나 친지 혹은 이웃 등 평소 잘 알고 지내며, 또 자신이 돌봐야 할 책임이 있다고 여기는 사람을 해치는 것이다. (줄임)
아무래도 남성 연쇄살인범과 여성 연쇄살인범 간에 가장 두드러진 차이는 그때그때 저지르는 살인의 동기일 것이다. 남성은 대개 상대를 제압하거나 제거하기 위해 범행을 저지르는 반면, 여성은 제압당하거나 제거당하지 않으려고 살인을 범한다. (줄임) 여성에게 문제가 되는 것은 자존심을 지키려는 자기보호이자 자기방어다. - <그녀는 왜 연쇄살인범이 되었나> 142쪽
이건 독일만의 상황이 아니다. 한국도 마찬가지다. 한국의 여성 무기수의 절반 이상은 남편을 살해한 이들이다. 그녀들은 거의 모두가 남편의 가정폭력을 견디다 못해 칼을 들었다. 기혼 여성이 아니어도 여성 살인범 대부분은 폭력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는 과정에서 칼을 든다. '강남역 사건'이 보여주듯이 구체적인 이유 없이 모르는 여자를 향해 칼을 휘두르는 남성과는 많이 다르다.
한국에도 여성 연쇄살인범이 있었을까? 내가 그런 소식을 접한 기억은 없다. 하지만 현실에는 사람을 여러 명 살해한 여성이 존재할 거다. 다만 아직 드러나지 않았을 뿐. 이는 괜한 추측이 아니다. 뉴스에 자주 등장하는 한 범죄전문가도 나와의 인터뷰에서 그렇게 말했다. 세계 여러 나라에서 공통적으로 연쇄살인이 자주 벌어지는 바로 그곳, 한국의 그곳에서도 이상한 일이 벌어지고 있을 거다.
무섭고 떨리는가? 그럴 필요까지는 없다. 진짜 공포는 따로 있다. 한국에서 여성은 2~3일에 한 명 꼴로 남편이나 애인에게 살해를 당한다.
2007년 6월 수원에서 영아 사체가 발견됐다. 얼마 뒤 경찰은 지적장애가 있는 미성년 노숙인 여성을 범인으로 체포했다. 하지만 그녀는 아이를 낳은 적이 없었다. 아이를 낳지도 않았는데, 자기 아이를 죽였다고 자백했다는 여성.
어떤가. 뭔가 조작의 냄새가 나지 않나? 최소한 둘 중 하나다. 경찰이 지적장애가 있는 미성년 여성에게 누명을 씌웠거나, 실수로 엉뚱한 범인을 잡았거나. 어쨌든 경찰의 잘못이다. 죄 없는 여성, 그것도 미성년 지적장애인만 14일 동안 구속됐다가 풀려났다. 수사기관 그 누구도 책임지지 않았다. 문제의 그 경찰, 징계 없이 지금도 경찰 생활을 하고 있다.
다시 묻는다. 무엇이 무섭고 떨리는가?
글 : 칼럼니스트 박상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