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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인터파크 북DB Jul 20. 2016

“작가는 다 휴머니스트… 인간 없는 문학은 성립 안돼"

<중국식 룰렛> 작가 은희경 작가 인터뷰

                        


“일단 난 어른도 못 된 것 같아. 어른이라면 내 발자국이 찍힌 곳만 딛고 살 수 없다는 거 정도는 알아야지. 안 그래? 넌 어른이 뭐라고 생각했어?”


은희경 작가의 여섯 번째 단편집 <중국식 룰렛>에 실린 작품 ‘대용품’ 중, 낯선 바닥에 발을 내딛기를 두려워하는 ‘그녀’의 자조 섞인 자기 고백이다(104쪽). 어린 시절 영재라 불릴 만큼 똑똑했던 두 소년과 하굣길마다 그들의 발걸음을 느리게 붙잡아 두었던 한 소녀. 불의의 사고로 세상을 떠난 작은 소년의 대용품처럼 살아가는 남자와 여전히 낯선 곳에 발을 내딛기를 두려워하는 다 커버린 소녀의 이야기 속에서 ‘신발’은 저마다의 삶의 무게를 지탱하는 소재로 등장한다.


일상적인 소품에 깃든 이야기들을 그리고 싶었다는 은희경 작가는 이번 작품 속에서 가방, 책, 술, 신발 등의 소품을 끌어와 누군가의 삶을 그려낸다. 그들은 하나같이 평범한 인물이면서도 결코 평범하지 않은 이야기를 고백하는 제 삶의 화자들이다. 표제작 ‘중국식 룰렛’의 배경이 되는 K의 술집은 작가가 말하고자 했던 ‘작은 행운과 불행’이 교차되는 인생의 축소판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2년 만에 신작으로 돌아온 은희경 작가와의 인터뷰는 여섯 번째 단편집에 대한 이야기에서 책 읽기의 즐거움이라는 주제로까지 흘러갔다. 우리 삶에 깃든 사소한 불행과 행운의 연속성에 대해, 개인과 사회에 대한 고민을 ‘책’을 통해 질문하는 작가에게 독자란 어떤 대상이 되어주는지에 대해, 오랜 시간 구상해왔던 차기작에 대한 이야기까지 다양한 주제들이 대화 속에 오고 갔다.



“우리 인생에 정말 필요한 것은 사소하고 작은 행운들”
 

Q 2014년 북DB와의 인터뷰를 통해서 “새 책이 나오면 그동안 내가 이렇게 살았구나, 느끼게 되어서 기쁘다”라고 하셨는데, <중국식 룰렛> 출간 후에 돌아본 시간들은 어떠셨는지 궁금하네요. 


책을 엮으려고 작품들을 다시 읽다 보면, 그때 내가 글을 썼던 장소, 그때 했던 고민들, 만났던 사람들이 모두 다 떠올라요. 한번씩 제가 살았던 시간들로 다시 거슬러 가보는, 마치 순례를 하는 그런 기분이에요.


Q 2년만의 단편집입니다. 술(‘중국식 룰렛’), 신발(‘대용품’), 책(‘별의 동굴’), 가방(‘불연속성’) 등 굉장히 친근하면서도 일상적인 소재들이 이야기를 이끌어가고 있어요. 일상 소재에 주목하게 된 이유가 있으셨나요?


전에는 소설을 큰 그림에서부터 시작했는데, 이렇게 작은 것에서부터 시작하니까 그 나름대로 쓰는 것에 재미가 있더라고요. 나와 가까이 있는 것들에 대해 쓰고 싶은 생각이 있었어요. 책, 술 이런 것들이요. 맨 처음에 쓰기 시작한 것이 술. ‘중국식 룰렛’은 그렇게 탄생한 거예요. 쓰다 보니까 우리가 친근하게 생각하는 물건에 이야기가 많이 깃들어 있더라고요.


그 시기에 마침 GQ코리아에서 수트를 가지고 글을 써달라는 청탁이 들어왔고, 그래서 탄생한 것이 ‘장미의 왕자’였어요. ‘대용품’도 신발에 대한 청탁을 받아서 쓰게 된 작품이고 가방도 마찬가지에요. 그런 청탁들이 가끔씩 들어와요. 전에는 하지 않았는데 이런 시리즈를 엮어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면서 본격적으로 작업을 하게 된 거죠. 책에 총 6개 작품이 실려 있는데 8년 전에 쓴 것부터 최근에 쓴 것까지 다양해요. 집필 순으로 나열을 했죠.


Q 평범한 인물들의 이야기였지만, 이야기 자체는 평범하게 다가오지 않았어요. 불운한 삶을 살고 있다고 생각하는 동안 자신에게 다가오는 작은 행운들을 눈치 채지 못하는 남자(‘중국식 룰렛’), 낯선 바닥 위에 발을 내딛기를 두려워하는 여자(‘대용품’)처럼 뜻밖의 운명을 향해 가고 있음을 눈치 채지 못하는 인물들의 모습이 인상적이었습니다. 각각의 인물들은 일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어떤 모습을 드러내기 위한 장치였나요?


저는 특이한 경험을 갖고 있다거나 독특한 사연이 있는 인물들을 그리지 않고 평범한 사람들을 그리고 주목해요. 하지만 그 ‘평범’이라는 것도 일반화적인 시선이겠죠. 모두의 인생은 각자 다르니까요. 그래서 그 이면을 상상해보는 게 재미있어요. 누구에게나 다 그런 이면은 존재한다고 생각하고요. 평범해 보일지라도 마음 속에 자기만의 고민이나 자기가 생각하는 스스로의 약점, 슬픔 같은 것이 있다고 생각하는데, 그런 인물들을 그려가는 과정 속에서 또 다른 타인의 존재가 된 나를 생각해보게 되는 거죠. 


그리고 그들을 통해 독자 자신이 자신을 들여다볼 수 있기를 바랐어요. 저 역시 지금의 내가 어떤 감정을 갖고 있는지, 내 속에 어떤 문제가 있는지 알 수 없을 때, 내가 직접 상황과 인간관계와 감정 등을 부여해 작품 속 인물을 완성해가는 과정 속에서 도리어 나의 슬픔과 고민, 고통 같은 것들을 알게 된 거예요. 책은 그 과정의 완성이고 책을 읽은 독자들 역시 책을 통해 ‘나만 그런 것이 아니구나’라고 생각하게 되는 게 제가 바란 것이 아닌가 싶어요.


Q “어른이라면 내 발자국이 찍힌 곳만 딛고 살 수 없다는 거 정도는 알아야지.” ‘대용품’ 속 그녀의 말이 기억에 오래 남았습니다. 아마 책을 읽은 분들 역시 각자의 고민과 맞닿아 있는 작품이나 인물에 애착이 갈 것 같은데, 작가님에게는 그런 인물이 누구였나요?


인물을 통해 나를 돌아보게 되는 것, 내 고민을 생각해보게 된 것, 그게 제가 원했던 거예요. 그 감정에 대해 별로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을 수는 있지만 사실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는 무엇인가 때문에 영향을 받고 있어요. 이 작품들의 인물을 통해서 우리가 명확히 알 수 없었던 내면의 어떤 고민들을 눈치챌 수 있었다면, 그건 제가 의도했던 바대로 이루어진 거예요.


개인적으로는 ‘별의 동굴’의 주인공에게 많은 애착이 갔어요. 어느 날 문득, 집에 있던 많은 책을 정리하면서 주인공과 같은 심정을 느낀 거죠. 내가 이걸 다 읽을 것도 아니면서 왜 이렇게 갖고 있었을까, 왜 품고 있었을까. 결국은 부족하고 불안한 나를 느꼈기 때문이었을 거예요. ‘별의 동굴’ 주인공이 책을 던지고 밟는 장면에서는 마치 내 모습을 보는 것처럼 대입하게 됐고, 주인공의 마음이 이해돼서 울컥하더라고요.


Q 한 인터뷰를 통해, ‘우연이 만들어준 위로’를 ‘다정한 부력’이라고 표현하신 것을 봤습니다. 그 말처럼 작품 속 인물들은 우연을 통해 알게 모르게 위로받으며 살아갑니다. 무겁게 가라앉는 삶을 지탱해주는 ‘다정한 부력’의 도움을 받는 셈이죠. 이런 연출에는 어떤 의도가 숨어 있던 걸까요? 


사실 우리는 큰 사건들이 인생에 변화를 가져다 준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나를 바꾸는 것은 아주 작은 사건들이에요. 그 사소함의 연속으로 인생의 변화가 생기는 거죠. 다만 우리는 그것이 어떤 사건일지, 언제 일어날 것인지 모르기 때문에 더 두려워하게 되는 거예요. 불행의 이유가 작을수록 작은 행운이 필요한 것처럼, 우리의 인생에 정말 필요한 것은 사소하고 작은 행운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런 것들을 표현하기 위한 마음이 드러났던 것 같아요.



“작가 의도 알아차리는 독자 만날 때 소설이 완성되는 기분”


Q 그 어느 때보다 책 읽기에 대한 관심도가 떨어지고 있다는 우려가 많습니다. 출판계의 위기라면 위기겠지만, 그래서 더욱 책을 탐독하고자 하는 시도가 활발해지는 때이기도 합니다. 최근 출연하신 방송 프로그램 ‘비밀독서단’ 역시 그것의 일환이고요. 작가로서 어떤 책임감을 느끼시는지 궁금합니다.


책임감을 느끼죠. 이전에 작가의 역할은 책만 쓰는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에요. 저는 작가가 무엇인가 미리 깨달아서 책을 통해 독자들에게 비전을 제시해주는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그냥 동시대를 살아가는 사람으로서, 같이 살아가는 사회에 너무나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고 많은 사람들이 행복하게 살았으면 하는 마음을 가지고 끊임없이 책, 나아가서는 이 사회의 무언가를 함께 논의하고 공유할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전 기본적으로 모든 작가들은 다 휴머니스트라고 생각해요. 인간을 좋아하지 않고, 인간을 생각하지 않는다면 문학작품을 쓴다는 것 자체가 성립되지 않는다고 생각하거든요. 그래서 다들 ‘인간이 행복해질 수 없는 걸까?’, ‘삶이라는 건 뭘까?’ 생각하는 거죠. 그런 고민들을 위해 어떤 이야기를 포착해서 질문을 던지는 것 자체가 작가의 활동인 거고요. 그런 책을 읽지 않는다면 작가로서 뭐랄까, 서운하다고 해야 할까? 그런 마음도 들 수 있을 것 같고요.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에 대해 나는 이렇게 생각해. 그리고 당신의 생각도 알고 싶어.’ 이런 질문의 과정들을 중요하게 생각하게 됐어요.


Q 이런 시도들을 통해 최근에는 책을 해석하고 소화하는 독자들 개개인의 다양성이 더욱 존중되고 있는 느낌을 받아요. 좋은 현상인 거죠.


그럼요. 책은 자기 마음대로 읽는 거예요. 책을 읽는 방식에서부터 억압을 느끼고 부담스러워하는 것이 안타깝죠. 마치 저 사람이 읽은 대로 나도 이 책을 그렇게 이해하고 읽어야 한다는 생각이 드는 분들이 있을 거예요. 그래서 독자들과 제가 쓴 글에 대해 서로의 생각을 공유하는 시간을 더 많이 갖고 싶어요. 내 작품을 설명하는 방식이 아니라, 책을 통해 내가 던진 질문에 대한 독자들의 생각을 낭독회 같은 기회를 통해 많이 나누고 싶죠. 나는 답이 아니라 질문을 던지는 것이기 때문에 이 책을 읽은 독자들의 답이 모두 다를 거라고 생각하거든요. 그랬으면 좋겠어요. 독자들이 내 질문을 어떻게 받아들이는지 늘 궁금하고요. 


그러다가 어쩔 때는 제 의도를 딱 짚어내는 분들의 이야기를 듣고 깜짝 놀라기도 해요. 그럴 때는 작가로서 쓸 맛이 나요. 마치 이 소설이 살아 있는 유기체로 작용하는 느낌이라고 할까요? 나의 의도를 알아차린 독자로 인해 이 작품이 완성되는 기분이 들어요. 하지만 그것은 나의 의도를 알아준다는 것의 기쁨이에요. 문학은 답이 아니기 때문에 늘 열어놓고 서로 교감하는 과정에서 완성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Q 해석의 존중이 책 읽기의 재미로 연결될 수 있다고 봅니다. 사실 그동안 책 읽는 행위에 대한 강박들이 도리어 책 읽기의 즐거움을 앗아갔던 건 아닌가 싶어요.


이제는 ‘책은 당연히 읽어야 하고, 안 읽으면 문화인이 아니야’ 이런 방식의 사고는 통하지 않잖아요. 그 이론적 근거도 없을뿐더러, 문화라는 것은 온갖 군데에 다 있는 건데 마치 책에만 있다는 듯이 말할 수는 없는 거죠. 그냥 저에게는 삶에 대한 질문을 던지는 과정에서, 책이라는 것이 시간과 돈을 적게 들이면서도 재미있게 다가갈 수 있는 하나의 방법이었던 거예요. 삶을 이해하는 방법 중 하나이죠. 



Q 등단 후 21년이 흘렀습니다. 초기 작품과 비교하여 작가님의 변화를 이야기하는 분들이 많은데요. 그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는 지요.


초반에는 사회에 대한 문제제기를 하고자 하는 마음이 컸어요. ‘문제제기’라는 것은 결국 비판적인 태도이기 때문에 고스란히 작품에도 드러났던 거죠.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저 자신에게도 변화가 생겼고, 자연스럽게 사회를 바라보는 관점에도 변화가 생기면서 작품에도 영향을 주었던 것 같아요. 태도나 가치관 등의 변화가 있었기 때문에 독자 분들이 더욱 크게 느끼는 것 같고요. 저는 인간의 행복을 탐구하는 것이 작가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작품을 통해 수없이 질문을 던지는 과정을 살고 있어요. 그런 과정들을 시간이 갈수록 더 중요하게 생각하게 됐고 앞으로도 그럴 것 같고요.


Q 차기작 소식이 들려오던데, 간략하게 소개해주세요.


이거 이야기할 때마다 너무 멋쩍어요. 지금 <중국식 룰렛> 일정 때문에 신작 마감을 못 지키게 생겼어요.(웃음) 인터뷰 일정이 바빠서 새 작품을 쓰다가 중단해버렸거든요. 아무튼 오래전부터 쓰려고 준비했던 작품이었어요. 쓸 때마다 ‘아, 아직은 아니구나’ 했는데 이번에는 진짜로 써요. 1970년대 말, 여자대학 기숙사를 배경으로 한 이야기예요. 성년이 되어가는 문으로 들어가는 사람들, 낯선 세계에 대한 긴장과 혼란과 두려움 속에서 자기 인생을 만들어가야 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어요. 기숙사라는 집단은 이질적인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잖아요. 불완전한 나이에 이질적인 사람들이 모여서 완성되는 이야기들이 재미있을 것 같아요.



사진 : 남경호(스튜디오2M)

취재 : 임인영(북DB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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