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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인터파크 북DB Aug 09. 2016

두 여자, 지리산에서의 80년

산골독서가의 세상읽기

                     

#1. 중기댁


이른 아침, 중기댁 엄니가 내 방문을 두드렸다. 머리가 아프다고 병원까지 태워달라고 부탁했다. 잠시 뒤, 중기댁은 마을 엄니 세 분과 함께 나타났다. 차를 구한 김에 읍내에 갈 마을 엄니들을 불러 모은 것이다. 여인들의 달콤한 말은 차 안에서 가득 퍼졌다.  

"우리 동네에 이렇게 좋은 분이 이사왔으니, 우린 복 받은겨!"
"말해 뭣혀!"
"참 고마운 분이여!"
"말해 뭣혀!"
"자식맹키로(자식처럼) 부려 먹어서 미안하네."
"말해 뭣혀!"

다른 엄니들의 칭찬이 나올 때마다 중기댁은 "말해 뭣혀!"로 정리해버렸다. 운전기사를 섭외한 중기댁은 자연스럽게 차 안에서 엄니들의 좌장이 됐다. 팔순을 넘겼으니 살아온 세월도 제일 길긴 했다.

중기댁은 지리산 피아골에서 나고 자랐다. 동네 오빠랑 결혼해, 자신이 태어난 곳에서 자식 여덟 명을 낳아 키웠다. 중기댁은 지리산에서만 80년을 살았다. 이쯤되면 ‘지리산의 여인’으로 불러도 어색하지 않다. 그런 엄니에게 물었다. 

"엄니, 옛날에 빨치산도 보셨겠네요?"
"그럼, 당연히 봤지!"

중기댁은 좌장답게 근엄하게 말했다. 

"우와, 그럼 재밌는 기억이 많겠네요?"
"그게 재밌니? 얼매나 무서웠다고! 낮에는 군인이 찾아오고, 밤에는 산에서 빨치산 내려와 식량 좀 달라 하고, 다음 날 아침에 또 군인이 와서 주민 추궁하고…. 그게 사는 거니!"

엄니는 버럭 했다. 차 안에 찬바람이 불었다. 뒷좌석의 엄니들도 일제히 입을 닫았다. 모두들 창밖만 가만히 바라봤다. 칭찬 릴레이는 엄니들의 어색한 하차로 끝났다. 작년 초가을의 일이다. 

그 이후 한동안 중기댁 엄니를 마을에서 볼 수 없었다. 자꾸 머리가 아파 큰 병원이 있는 대도시의 아들 집으로 갔다고, 다른 엄니들이 알려줬다. 

마당의 큰 감나무에 주렁주렁 매달린 감이 주황색으로 익어가도, 그 감이 땅바닥에 뚝뚝 떨어져 뭉개져도 엄니는 돌아오지 않았다. 지리산이 붉게 물들고 낙엽이 모두 져도 마찬가지였다. 중기댁 엄니는 지리산으로 돌아오지 못할 것이란 불길한 생각까지 들었다. 

첫눈 오기 며칠 전, 엄니는 지리산으로 돌아왔다. 지팡이 없이는 걷기 힘들어 했다. 첫눈이 내린 날, 엄니는 김치통을 들고 내가 사는 집까지 올라왔다. 

"김장이여, 드셔봐."

엄니는 이 말을 남기고 '쿨하게' 돌아섰다. 이제는 지팡이 없이는 똑바로 설 수 없는, 지리산에서만 80년을 버틴 두 다리가 유난히 흔들려 보였다.



#2. 모암댁


모암댁은 77년 세월을 살았다. 지리산 피아골 바로 옆, 화개 모암마을에서 나고 자랐다. 녹차가 유명한 곳이다. 화개보다 가난한 피아골로 시집을 왔다. 먹고살기 위해 섬진강을 따라 화개 고향마을로 녹차잎을 따러 다녔다. 

모암댁은 고향에서 녹차 씨앗을 가져와 피아골 산중턱에 심었다. 나무를 잘라내고 거친 땅을 고르며 2천 평의 녹차밭을 일궜다. 집 대문을 열면 바로 모암댁의 녹차밭이 보였다. 녹차 나무는 사계절 푸르다. 겨울에도 푸른 산을 본 것은 순전히 모암댁 덕분이다.

지난봄, 엄니의 녹차밭에서 함께 녹차잎을 땄다. 봄바람이 녹차밭을 흔들던 날 모암댁이 말했다. 

" 내가 참 죄가 많은 사람이여…. 내 큰아들이 공부를 잘해서 광주로 고등학교를 갔는데, 3학년 때 죽었다. 연탄가스가 새서 자취방에서 잠 자다가 죽었어. 내가 돈이 많았으면 좋은 방을 구해줬을 텐데…. 그러면 아들이 안 죽었지. 아직까지도 그게 참 가슴이 아파. 내가 그렇게 죄가 많아."

요즘처럼 더운 날, 엄니들은 경로당에서 많은 시간을 보낸다. 엄니들은 경로당에서 시원한 에어컨 바람 맞으며 지리산에서 보낸 지난 세월에 대해 이야기를 할까? 모암댁 엄니에 따르면, 경로당의 ‘이야기꽃’은 도시 사람들이 창조해낸 향기 없는 꽃일 가능성이 높다.  

"우리는 경로당에서 옛날 이야기 잘 안 해. 누가 예전 일 이야기하려고 하면, 못하게 해. 눈 뜨면 만날 일만 했는데도 가난하고 힘들게 살았으니까. 징글징글해서 옛날 일은 생각하고 싶지도 않아."

 

 
#3. 기록


내가 사는 마을의 어르신 두 분이 최근 일주일 간격으로 돌아가셨다. 지리산에서 깨끗한 물 마시고, 좋은 공기 속에서 살았어도 세월 앞에 장사 없다. 마을의 대세이자 주류는 70~80대 노인인데, 이들의 시대가 속절없이 저물고 있다. 

중기댁은 1930년대 일제시대에 태어나, 십대 중반에 전쟁을 겪었다. 이웃끼리 의심하며 죽고 죽여야 했던 빨치산의 기억은 아직도 깊은 트라우마다. 식민지, 전쟁, 혁명, 쿠데타, 독재, 산업화, 민주화…. 이 모든 큰 역사의 파도가 그녀의 삶에서 출렁였다. 

중기댁보다 세 살 어린 모암댁의 삶 역시 마찬가지다. 고향에서 씨앗을 가져다가 일군 저 푸른 녹차밭, 가난 때문에 잃은 아들, 돌아보고 싶지 않은 지난 시절의 노동, 그래도 집집마다 자식이 대여섯 명은 있어 시끌벅적했다는 산골마을의 기억…. 아무도 묻거나 기록하지 않지만 모암댁은 자신만의 역사를 잊지 않고 있다.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고, 현실의 펜은 힘 있는 사람의 목소리를 좋아한다. 오늘날 발행되는 여러 신문, 잡지만 펼쳐봐도 알 수 있다. 강자의 목소리는 쉽게 활자가 되어 퍼지고, 그들의 삶은 모범으로 추앙받는다. 반면 보통 사람들의 목소리는 기록되지 않고, 멀리 퍼지지도 않는다. 

중국 문화혁명의 파도에 휩쓸린 보통 사람들의 목소리를 그대로 구술로 담은, 그래서 더욱 슬프고 충격적인 책 <백 사람의 십 년>을 읽을 때 자꾸 중기댁과 모암댁이 떠올랐다. 지리산에서 한 평생을 보낸 두 엄니가 문화혁명과 얽힐 일은 전혀 없는데도 그랬다. 

문화혁명을 직접 겪은 보통 사람들의 이야기는 자주 책을 덮고 한숨을 토하게 만들었다. 역사가가 설명할 수 없는, 그래서 역사책에 담길 수 없는 생생한 슬픔과 분노, 좌절이 <백 사람의 십 년>에 고스란히 담겼다. 중국 사람들의 이야기지만, 멀게 느껴지지 않는 건 오늘날 우리 부모, 조부모 세대 역시 그들과 다르지 않은 삶을 살았기 때문일 거다. 이를테면, 끊임없이 이 세상에서 자기를 지워버려야만 생존이 가능한 인생 말이다. 


"그런 고난(문화혁명 시기의 고난)을 만나면 그저 모든 것을 내려놓고 자신을 아무것도 아닌 ‘제로’ 상태로 변화시켜야만 살아남을 수 있다는 사실을요. 만일 그 상황에서 여전히 자신을 사람이라고 생각한다면 매우 고통스러워져 살아갈 수 없을 겁니다." - <백 사람의 십 년> 303쪽


한국에서는 모든 게 순식간에 흘러가고, 사라지고, 새로 생긴다. 식민지, 분단, 전쟁, 혁명, 쿠데타, 독재, 민주화가 고작 100년도 안 되는 시간에 벌어졌다는 걸 생각하면 현기증이 날 것 같은데, 이런 세월을 자기 육신 하나로 뚫고 온 사람들의 삶은 오죽할까. 

지난 우리의 역사는 참으로 스펙터클했다. 하지만 그 시대를 관통한 보통 사람들의 슬픔과 기쁨을 생생하게 담은 구술기록은 빈약하기만 하다. 권력자, 유명한 사람들의 자화자찬이 넘치는, 그래서 자신만 신나고 독자는 하나도 재미 없는 자서전은 오늘도 대형 서점 매대에 두텁게 깔리지만 말이다. 

<백 사람의 십 년>을 읽은 뒤 노트에 이런 글귀를 적었다. 


'두 여자, 지리산에서의 80년.'


기회가 된다면 중기댁과 모암댁의 인생 이야기를 듣고 위의 제목으로 구술기록을 남기고 싶다. '지리산' 하면 떠오르는 게 여전히 빨치산뿐이라는 건, 뭔가 허한 느낌이다. 구술 기록을 지금 당장 할 수는 없다. 훗날의 일이기에, 지금 내가 바라는 건 중기댁과 모암댁의 만수무강이다.


글 : 칼럼니스트 박상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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