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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인터파크 북DB Aug 17. 2016

[루터의 도시를 가다 2] 루터의 영적 고향

종교개혁 500년 우리는 지금

※ 내년 2017년은 종교개혁 500주년을 기념하는 역사적인 해이다. 독일에서는 이미 십 년 전부터 기념행사들을 시행해 왔고, 세계 여러 나라들도 종교개혁을 기념하며, 그 의미를 되새기는 작업을 하고 있다. 세속화가 거센 오늘날, 종교개혁의 슬로건처럼 "개혁된 교회는 계속 개혁되어야 한다." 루터가 걸어간 개혁 발자취를 따라가 보며, 기독교, 교회, 신앙인이 먼저 믿음과 생활의 개혁으로 그 본질을 회복하는 기회가 되기를 기대해 본다. – 기자 말



세상의 모든 부모들이 그러하듯 루터의 아버지 한스 루터는 아들에게 기대가 컸다. 자신은 탄광촌에서 먹고살아야 했지만 아들은 크게 성공시키고 싶었다. 동양이나 서양이나 입신양명(立身揚名)에 대한 꿈은 쉽게 포기할 수 없는 가문의 영광이 아니겠는가. 


루터는 만스펠트, 마그데부르크, 아이제나흐 등 여러 도시를 거치며 교육을 받다가 드디어 그의 운명적 장소가 되는 에어푸르트(Erfurt)에 도착한다(1501년). 이 도시는 대성당과 세베리(Severi Church)를 세우며 수많은 순례자들을 불러모으는 제법 규모가 잡힌 상태였다. 에어푸르트를 두고 루터는 자신의 영적 고향이라고 고백하였다.  


루터는 처음에 아버지의 원에 따라 법학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그의 꿈 또한 다르지 않았다. 제네바의 개혁자 칼빈도 법학을 공부하다 하나님께 붙잡힌 바 되었는데, 법학은 당시 의학, 신학 등 출세를 보장받던 학문 중 하나였다. 루터나 칼빈이나 회심을 체험하면서 세상 학문처럼 보이던 법학를 통해 철저하고 진지한 학문성을 연마하게 되었고, 하나님께서는 여기에 성령을 덧입혀 훌륭한 저술을 하도록 준비시키셨다. 


바울 사도는 회심의 면에 있어서 누구보다 종교개혁가들의 모델이 된다 하겠다. 바울도 가말리엘 문하에서 엄정한 학문을 연마하지 않았던가. 주님은 바울을 회심시켜 얼마나 귀하게 그의 예전 학문까지 사용하셨는지 성경은 기록하고 있다.  


루터의 삶도 바울을 닮았다. 그는 에어푸르트에서 운명적 부르심을 입는다.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느니라"(롬 11:29). 이 말씀이 루터에게 실제로 임하신 것이다. 그는 에어푸르트 북쪽 쉬토토른하임이라는 마을 곁을 지나다 악천후를 만났다. 폭풍 속에서 벼락이 내리치며 나무를 불태우는 광경이 벌어졌다. 그는 기겁하고 놀라 땅바닥에 엎드려 죄를 고백하고 서원하였다. "거룩하신 마리아여, 나를 살려주시면 주님의 일꾼이 되겠나이다." 그날은 1505년 7월 2일로 기록되어 있다.  


루터는 지체하지 않고 에어푸르트에 있는 어거스틴 수도원에 들어갔다. 1505년 7월 17일이었다. 서원하고 행동으로 옮기는 데 2주 정도밖에 걸리지 않았다. 당연히 아버지는 반대했다. 하지만 그는 주님을 위해 다른 모든 것을 포기, 헌신하기로 결심했다. 2년 뒤 1507년 4월 4일 루터는 에어푸르트에서 사제 서품을 받는다. 이때까지도 그는 가톨릭 신자였다.  


글쓴이 : 추태화
안양대학교 신학대학 기독교문화학과 교수로 문학과 문화 비평을 통해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일생의 사명으로 삼고 우리 사회가 건강한 문학적 상상력을 통해 맑고 풍요로워지기를 꿈꾸는 기독교문화운동가이다.

※ 본 칼럼은 기독교세계관학술동역회 세계관월간지 <월드뷰> 2016년 4월호에 실린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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