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콩집 이야기

by 인터파크 북DB

추억, 추억들


무덥고 지루한 여름방학. 낯선 아이들의 발걸음에 달걀을 낳던 어미 닭이 홰를 치자, 누워있던 돼지가 벌떡 일어나 꿀꿀거리기 시작했다. 태민은 기중과 함께 텅 비어있는 태진이네 집 마당을 가로질러 가는 중. 울타리 밑 그늘에 자리를 잡은 다음, '대통령 고누'를 두기 시작했다. 대통령을 위시로 하여 장관급에 해당하는 말들을 각자의 진영에 포진시킨 다음, 바둑판 모양으로 크게 그려진 줄 위로 한 칸씩 전진하여 상대편 말을 쳐부수고 마침내 고지를 점령함으로써 승부를 결정짓는 게임.

그러나 내리 세 판을 지고나자 은근히 부아가 났다. 돌멩이를 추켜드는 팔목에 점점 힘이 가해졌다. 어른 주먹만 한 돌덩이를 두 손으로 움켜쥔 채, 쪼그린 자세로 땅만 보고 전진해 나갔다. 기중 역시 코를 씩씩 불며, 금 반대편의 애꿎은 마당만 찍어댔다. 포사격이라도 하듯 '쿵쿵' 하는 소리가 고즈넉한 농촌마을의 초가집 기둥을 울리고, 그 위 지붕에 널려져 있는 호박넝쿨마저 파르르 떨게 했다. 잠잠하던 암탉이 다시 울어대고, 암퇘지가 꿀꿀거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갑자기 짧고도 날카로운 비명이 고막을 찢었다.

"아악!..."

힘껏 찍어 내린 돌에, 녀석의 손등이 화를 입었다. 붉게 물든 손톱 하나가 눈 깜짝할 사이에 까맣게 변해 갔다. 녀석은 소리를 지르지도, 화를 내지도 않았다. 하지만 묵묵히 앉아 있기만 하는 녀석의 모습이 도리어 묘한 공포감을 자아냈다. 도망쳐야 한다. 이곳을 빠져나가야 한다! 줄행랑을 치기 시작했다. 하지만 악몽에서처럼, 아무리 내달려도 발이 땅에서 떼어지지 않는 느낌. 달려도, 달려도 제자리걸음하는 기분이었고, 누군가가 뒷덜미를 잡아당기는 것만 같았다. 숫제 눈을 감은 채, 집 쪽을 향해 내달았다. 신발을 벗는 둥 마는 둥, 방으로 뛰어들었다. 그리고 앞문과 부엌문의 돌쩌귀부터 걸어 잠갔다. 이불을 뒤집어썼다. 그럼에도 몸은 사시나무 떨듯 했다. 그 진동으로 말미암아 방바닥마저 흔들리는 것처럼 느껴졌다. 문 앞에 신발을 벗어 놓은 채 들어온 것이 내내 마음에 걸렸다.

'흔적을 없애야 하는데...'

나가자니 누군가에게 들킬 것 같고, 그냥 내버려두자니 불안했다. 슬며시 문을 열어보았다. 사위(四圍)가 고요했다. 개구리가 파리를 낚아채듯, 신발을 건져내어 잽싸게 방문을 걸었다. 아! 내 작은 존재의 흔적을 지울 수만 있다면. 옷도, 신발도, 이 몸뚱이마저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게 할 수만 있다면. 만화 속의 투명 인간이 되고 싶었다.

정말 두려운 것은 기중이가 아니라, 그의 형이었다. 싸움 잘하기로 소문나 있었던 데다, 동생들이 맞고 오는 날이면 상대가 누구든 요절을 내고 만다는 그가 바로 공포의 대상이었다.

"맴맴...맴맴맴..."

마당 입구 쪽에 서 있는 당산나무(탱자나무) 위에서 매미들은 철없이 울어댔다. 평소 은은한 자장가로 들렸던 그 소리가 오늘은 탱크 지나가는 소리처럼 우렁차게 들렸다. 그 소리가 잦아들 무렵, 이번에는 쥐 죽은 듯한 고요가 ‘죄인’을 못 견디게 했다. 폭풍전야의 고요라고나 할까, 사형집행 날짜를 기다리는 죄수의 새벽이라고나 할까. 그 적막이 목을 옥죄어 왔다. 맞아. 녀석이 형한테 벌써 일러바쳤을지도 모른다!

그 잔인한 '집행관'이 입에 거품을 문 채, 이쪽을 향해 달려오고 있는 장면이라니. 재차 문고리를 확인해 보았다. 분명히 걸어져 있긴 하나 밖에서 세차게 잡아당길 경우, 뿌리 채 뽑힐지도 모른다. 부엌문 언저리에 놓여있는 밥상이 어슴푸레하게 눈에 들어왔다. 몸은 그대로인 채, 손을 뻗었다. 돌덩이처럼 굳어진 어깨가 꼼짝도 하지 않았다. 이번에는 방바닥을 살살 기어보았다. 누우면 코가 닿을 거리임에도 이역만리처럼 느껴졌다. 힘겹게 수저 하나를 집어 들고 무릎으로 기어 돌쩌귀 홈에 꽂았다. 그리고 부엌문에도. 조금은 안심이 되었다.

그러나 몸은 여전히 진동 중. 누군가가 가까운 데서 자신의 일거수일투족을 살피고 있는 것만 같고, 고함소리와 함께 일시에 달려들 것만 같았다. 녀석의 형뿐만이 아니라, 다른 식구들과 동네 사람들까지 총동원하여 잡으러 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벌써 이 방안 어디엔가 들어와 있을지도 모른다! 천장과 벽, 문들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갑자기 위에서 떨어지거나, 바닥에서 솟을지도 모른다. 벽 속에서 튀어나올 수도 있다!



밤이 찾아왔다. 낮의 피로를 풀고, 지친 몸과 영혼을 쉬게 하기 위한 밤. 그 밤이 오늘은 어둠만큼이나 검고, 칙칙한 모습으로 다가와 있었다. 낮에는 빛 가운데에 자신의 몸뚱이가 드러날까 두려웠는데, 이제는 어둠 속에서 누군가가 덮쳐올 것만 같아 겁이 났다. 그날 밤. 태민은 꿈을 꾸었다.

녀석의 형이 쫓아오고 있었다. '잡히면 끝장'이라는 생각에 죽을힘을 다하여 뛰었다. 그러나 아무리 뛰어도, 늘 제자리걸음. 잡힐 듯 말 듯, 아슬아슬한 간격을 유지하며 얼마나 달렸을까. 그의 손이 뒷덜미를 낚아채려는 순간, 비명을 지르고 말았다. 스스로의 목소리에 놀라 잠을 깼다. 등에 식은땀이 흘렀다. 셀 수 없을 만치 많은 뱀들이 똬리를 틀고 있는 장면, 똥이 잔뜩 널려있는 마당을 맨발로 지나가는 악몽보다도 더 몸서리가 쳐졌다. 뜬눈으로 밤을 보냈다. 점점 밝아지는 방이 두려워, 이불을 머리끝까지 끌어 올렸다.

개학하는 날이 다가왔건만, 머릿속은 뒤죽박죽, 발걸음은 천근만근이었다. 고샅의 모퉁이나 길목 어딘가에, 아니 어쩌면 밭의 한구석에 숨어 있다가 불쑥 나타날지도 모른다. 동네를 벗어나 훤히 뚫린 길에 들어서면, 멀리서 보고 있던 그가 달려올 것만 같았다. 고개를 숙인 채, 발걸음을 재촉했다. 교문을 들어서며 안도한 것도 잠시. 교실 뒷문을 여는 손이 부르르 떨렸다. 녀석은 오늘따라 일찌감치 와 있었다. 녀석과 짝꿍인 것이 불운이다 싶었다. 옆자리에 살그머니 앉았다. 책상 옆구리에 나와 있는 못에 신발주머니를 건 다음, 천천히 책보를 풀었다. 어깨가 흔들렸다. 연필을 깎기 위해 칼을 집어든 순간.

"너!..."

".........."

소스라치게 놀라 연필까지 놓치고 말았다.

"어째서 혼자 가 버렀냐? 태진이네 아부이한테 허벌나게 지천 들었씨야. 마당 파 놨다고, 독때이 주서다가 암치키나 내 뻐렀다고. 나 혼자 고놈 다 치우니라고, 무가서 혼났다!"

눈앞에 펼쳐진 파란 잔디. 세상은 너무나 아름다웠다. 황홀해진 눈이 녀석의 얼굴로, 그리고 손톱 쪽으로 향했다. 색깔은 더욱 진해져 있었다.

"갠찮해야. 인자 하나도 안 아퍼. 봐 볼래?"

동시에 손톱은 천천히 들어 올려졌다. 매미가 허물을 벗는 것처럼, 어느새 손톱은 벗겨져 나가 있었다. 태민은 기겁을 했다.

"안 아프냐?"

"하나도 안 아퍼."

"그러다가 손톱이 안 나버리면 어찔라고?"

"요 밑에 나냐. 요."

그가 가리키는 곳, 이제 막 벗겨낸 손톱 아래에서는 벌써 어린순이 빨갛게 자리를 잡아가고 있었다. 저 손톱이 완전히 자라날 때쯤... 그때쯤 나의 검붉은 죄도 덮어질까?

큰집 옆, 대학자가 살았다는 그 집 마당에서 아이들은 차례를 돌아가며 번데기를 받아먹고 있었다. 그때 누군가 '풍뎅이'를 잡아 태민에게 건넸다. 녀석의 모가지를 반쯤 비틀어 손바닥에 올려놓자 요란하게 날갯짓을 해댔다. 그 바람을 쐬기 위해 귓불에 갖다 댔다가, 마당에 내려놓았다. 빙글빙글 돌며 먼지를 쓸어냈다. 그 모습에 신바람이 나, 노래를 불렀다.

"핀둥아! 핀둥아! 돈 주께 마당 쓸어...라."

자선공연에 나선 무명배우처럼, 녀석은 온몸으로 서러운 연기를 이어갔다. 한참을 돌다가 지쳐 누워있으면, 아이들은 꽁무니를 집적거리며 주문처럼 그 노래를 불러댔다.

"핀둥아! 핀둥아! 돈 주께 마당 쓸어...라."

자신의 고통을 부둥켜안은 채, 녀석은 돌고 또 돌았다. 돌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세상, 미치지 않고 제 정신으로 살아가기에는 너무나 버거운 세상이었을까? 녀석의 처절한 몸짓에 박수를 보냈던 아이들은 마침내 살아있는 '장난감'의 몸뚱이를 발로 으깨어버린다. 더 이상 돌지 않는다고, 말을 듣지 않는다고, 더 이상 재미가 없다고 투덜대며. 태민은 납작해진 녀석의 시체를 바라보며, '만일 저것이 나의 몸이었다면 어땠을까?' 상상하며, 몸서리를 치곤했다.


서촌의 여름밤은 '모기와의 전쟁'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집집마다 돼지나 소를 기르는 데다 여기저기 우거진 풀밭이 많고, 괴어있는 시궁창 또한 한둘이 아니었다. 울력으로 풀을 베기도 하고 시궁창을 덮어보기도 하지만, 극성스런 모기떼는 사라지지 않았다. 집안 구석구석에 농약을 살포해 보아도, 그때뿐이었다.

어둠 속을 달리며 허공에 팔을 뻗으면, 모기와 ‘깔따구’가 한 움큼씩 잡혔다. 군대를 다녀온 육촌형의 말에 의하면, '모포 다섯 장에 워커 두 장을 뚫는' 31사단 모기보다 더했으면 더했지, 못하지는 않을 거라는 것. 한 번 물렸다 하면 눈 깜짝할 새 퉁퉁 붓고, 정신없이 긁다 보면 밤을 새기 일쑤였다. 물론 깊숙이 파인 그 부위에서는 핏물이 돋았다가 진물로 변하여 끝내 흔적으로 남기도 했다. 간혹 모기장을 치는 집도 있지만, 드리웠다가 다시 걷어내는 번잡함, 통풍이 잘 되지 않는 데다 수시로 들락거리는 아이들로 인해 별무신통인 경우가 많았다. 결국 온종일 뙤약볕 아래에서 땀 흘린 무라리 사람들은 '따뜻한' 모깃불 옆에서 눈물을 철철 흘리든지, 문을 꼭꼭 걸어 닫은 채 후끈한 방안에 들어가 진땀을 빼든지,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했다.

밤이 '모기와의 전쟁'이라면, 낮은 '파리와의 싸움'이었다. 밤새워 더위와 모기에 시달린 농부들에게 낮잠은 수면보충을 위해서도 꼭 필요한 법. 그러나 이 달콤하고도 유익한 시간을 악용하는 존재가 있었으니, 그것이 바로 파리였다. 꿈나라의 초입에 당도할 무렵, '웨~에엥!' 소리와 함께 콧잔등이나 눈가에 내려앉는가 하면, 김치냄새가 채 가시지 않은 입 언저리를 빨아대노라면 천하장사라도 해 볼 재간이 없었다.

처마 끝에 대롱대롱 달려있는 소쿠리는 녀석들의 제1타깃. 삶아놓은 보리를 목표로 구멍이 숭숭 뚫린 대발 사이사이로 탐욕스런 주둥이를 꽂아 넣은 채, 까맣게 엉켜 있는 녀석들의 모습은 보기만 해도 소름이 끼쳤다. 어른들의 흉내를 내어 열심히 손을 내저어보지만, 그때뿐. 김씨의 푸념.

"시상에! 저것들은 무두러 세상에 나와 갖고, 사람까지 못살게 허끄나 이."

맞아. 조물주는 꼭 필요한 것들만 만들었어야 하는데, 왜 그랬을까? 어느 날 똥통 밖으로까지 기어 나오는 하얀 구더기 떼를 발견하고, 질겁했었다. 변소 앞에 멍하니 서서 한참을 망설이다가 눈 딱 감고 들어갔었다. 하지만 똥이 낙하하는 지점에 벌떼처럼 몰려있는 구더기들을 발견하고는 항문이 근질근질해 견딜 수 없었다. '그것들이 자라 파리가 된다'는 김씨의 말을 듣고 나서부터 파리가 앉은 밥은 더 이상 먹지 못했었다.

다만 언젠가 밥상 위에 사뿐히 내려앉는 자태가 무척이나 아름답다고 느낀 적이 있긴 했다. 기하학적 모양으로 조각난 둥글넓적한 눈도 신기했고, 잠자리의 그것보다 더 섬세하고 앙증맞은 날개의 무늬 또한 경이로웠다. 앞다리를 열심히 비벼대는 모습은 겸손의 극치로, 위험이 닥쳤을 때 눈 깜짝할 새에 날아가는 민첩함은 삶의 지혜로, 헬리콥터처럼 수직으로 이?착륙하는 능력은 조물주의 위대한 섭리로 간주되었다. 한번은 휙 낚아챘다가 손이 더러워질까봐 선선히 '방면'해 준 적이 있었다. 생환(生還)의 기적 앞에서 잠시 어리둥절해 있다가 포르르 날아가는 장면을 보고는 웃음이 나왔다. 그러나 파리도 예쁠 때가 있다는 태민의 말에 김씨는 정색을 했다.

"아무리 이뻐 봤자, 천성이 더러운 것 아니냐. 똥통에서 나 갖고 똥만 먹고 커 논 게, 밤나 똥통만 찾어 댕기지 않냐. 사람도 마찬가지여어. 타고난 천성이 깨끗해야 깨끗헌 것을 생각 허고, 깨끗허게 행동허고. 겉모양은 아무 쓰잘 데기 웂는 법이다. 너도 이 담에 크먼, 하니나! 질이 안 좋은 여자들은 쳐다보지도 말고, 만나지도 말그라 이. 단물만 쏙 빨아먹으먼 어찔 것이냐? 이쁜 것들은 꼭 얼굴값을 헌단 마다."

"어메 같은 여자먼 좋겄네 이?"

"히히! 허기사 나 같은 여자만 만나도 갠찮허제 어째야. 이쁜 디는 웂어도 이날 이때까장 누구 둘레 먹은 적 웂고, 도독질 헌 적 웂고, 서방질 헌 적도 웂고. 사람은 겉보당 속이 차 있어야 헌다, 그 말이여."


by 강성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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