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콩집 이야기

by 인터파크 북DB

부부싸움


지긋지긋한 가난을 벗고자, 육 남매의 생존과 교육을 위해 발악하듯 시작된 사업은 날로 번창하였다. 전답 역시 해마다 늘어갔다. 경제적인 기반이 어느 정도 잡히자, 이씨는 기다렸다는 듯 사회 활동에 뛰어들었다. 명분은 '못 배우고 가난한 지역주민'을 위한다는 것이었다.

당시 무라리 사람들은 수확한 벼, 보리를 내다팔기 위해 이십여 리나 떨어진 백수 단위농협을 이용해야 했고, 그러다 보니 시간과 비용이 많이 소요되었다. 이에 이씨는 친구들 몇 명과 더불어, 백수농협 무라리 지소를 백수남초등학교 정문 근처, 한성부락 초입에 개설했다. 농산물을 공판하거나 농자금을 대출받는 등의 웬만한 업무를 다 처리할 수 있었기 때문에, 주민들은 쌍수를 들어 환영했다. 이에 힘을 얻은 이씨는 이른바 농민운동에 박차를 가했고, 결국 몇 년 후 정식으로 독립한 백수농협 무라리 지소의 소장이 되었다.

다음으로, 이씨가 착수한 사업은 경지정리. 서촌과 초등학교 사이에 넓게 펼쳐진 밭들 사이, 꾸불꾸불한 길을 지나다닐 때, 아이들은 가뭄과 홍수를 수없이 경험해야 했다. 모를 심어놓은 밭의 바닥이 쩍쩍 갈라지는가 하면, 어느 때는 앞을 가로막은 강 때문에 옷을 동동 걷어 올린 채 건너기도 했다. 가뭄이 들면 농작물이 타버리고 비가 조금만 내려도 홍수가 지는 이 '물둠벙' 벌판을 평평하게 고르는 작업이 시작된 것이다. 이 일에 추진위원장을 맡은 이씨는 우선 자신의 명의로 군 소유의 국유지를 불하받았는데, 이때에도 물론 '내 땅이 먹어들어 간다'며 결사적으로 반대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터무니없는 오해와 비난, 욕설을 무릅쓰고 이씨는 뚝심으로 밀어붙였다. 결국 천신만고 끝에 경지정리가 마무리되고 전국 최초로 땅속 수백 미터로부터 지하수를 끌어올리는 이백여 개의 관정(管井)이 곳곳에 설치되자 '물둠벙'은 전천후농업이 가능한 문전옥답으로 거듭났다. 일이 그렇게 되자 오해도 풀리고 여론 또한 일시에 바뀌어 이씨의 노고를 칭송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김씨는 '왜 당신은 내 돈 들여 욕을 먹어가며 동네일만 하느냐?'고 불평을 늘어놓곤 했다.

이 밖에도 버스 노선을 확장하는 일이나 전기 및 전화선을 끌어오는 일, 동네 수도를 놓는 일 등에도 이씨의 손이 미치지 않는 곳은 없었다. 동네에서 일어나는 대소사, 예컨대 쌈박질을 하여 지서에 끌려간 사람 빼오는 일이나 젊은이들을 취직시켜 주는 일 등에도 이씨는 나름대로 열과 성을 다했다. 그의 무용담 하나.

"나 차말로 기가 맥해서. 요 앞집 느그 당숙 있지 않냐? 승미가 급허다 본 게, 술 먹고 누구를 한 대 때래 버렀넌 디, 그 일로 목포형무소에 갇혀 버렀제 이. 면회를 가서 오늘 하로만 자고 나먼, 내일 아침 빼 줄란닥 했데이, 마고 보챈다."

"..........?"

"오늘 당장 안 빼 주먼, 깜빵 배람박에 대가리 쳐 받고 죽어 버릴란다고. 종일 햇빛 받은 배람박에서 열은 푹푹 찌제, 생전 보도 않은 낯바닥들 땜에 하롯밤도 더 못 자겄다여. 그래서 어찔 것이냐? 그날 빼 주었제에."

이 대목에서는 태민 또한 감탄을 금치 못했다. 야! 우리 아버지 빽이 크긴 큰가 보다. 그 자세한 내막, 로비의 메카니즘을 자세히 알 수는 없었지만(아니 바로 그 때문에) 무라리 사람들은 점점 이씨를 존경의 눈초리로 바라보는 것 같았다. 그러나 역시 태민으로서는 그 사실이 선뜻 믿어지지 않았다. 왜냐하면, 집안에서 그는 잔인 포악한 폭군으로 군림하였기 때문이다. 절대군주 앞에서 그 누구도 감히 반대하는 목소리나 항거하는 몸짓 한 번 내지 못했다. 그 무엇보다도 태민을 몸서리쳐지게 하는 대목이 바로 부부싸움.


초등학교 5학년 무렵, 막 잠자리에 들려는 찰나. 부엌을 사이에 둔 가겟방 쪽에서 티격태격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숨을 죽인 채, 귀를 기울였다. 뭔가에 대해 꼬치꼬치 따져 묻는 이씨와 진땀 빼 듯 해명하는 김씨의 목소리가 교차했다. 혹시 만에 하나, 이곳까지 불똥이 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태민은 호롱불을 끈 다음, 잽싸게 이불 속으로 들어갔다.

이씨는 대개 '가게의 매상이 계산에 맞지 않는다'거나 '창고에 보관했던 나락 가마니 수가 틀리다'거나 '모내기를 해야 하는데, 일꾼을 왜 그리 적게 불렀냐?'며, 김씨를 닦달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런데 오늘의 설전(舌戰) 내용은 여느 때와 좀 달랐다.

"어째서 열한 시 차를 못 탔냐고?"

"누가 타기 싫어서 안 탔소? 물건 가짓수가 많은 디다가, 언고상회에 물건이 떨어져 갖고 다른 디서 받어 오다 본 게, 그랬단 게는. 어째서 그래싸요?"

"그런다고 아홉 시 차로 기어나가 갖고, 그 차를 못 타?"

"가는 디 한 시간 걸리고, 당신 같으먼 어쭈코 한 시간 안에 물건을 다 치겄소? 그런 디다가 오늘싸 말고 해필 영광 장날이어 갖고, 사람들 할라 오살나게 많은 디... 나보고 어찌라고라우?"

"한 시간이나 비는 디, 그 도막에 문 일이 있었는지 누가 알 것이여어?"

"오메이! 태민이 아부지. 동네 사람들 들으까 무섭소 예. 문 일은 문 일이 있다우?"

이씨가 한사코 강조하듯이, 김씨는 결코 미인이 아니었다. 남자와 놀아날 만한 그런 여자는 더욱이 아니었다. 적어도 태민이 보기에는. 그런데도 이씨는 아내의 '부정'(不貞)을 감시하는 일에 온 정열을 다 쏟았다. 그 와중에 일단 꼬투리가 잡혀 시비가 붙으면 한 번도 무사히 넘어간 적이 없었고, 그럴 때마다 태민은 몇 번씩이나 전쟁터로 달려가야 했다. 자리에 누워 수없이 뒤척이다가 겨우 잠이 들어도 악몽에 시달리기 일쑤였고, 이튿날 깨어보면 몸은 잔뜩 웅크린 채였다.

그런 날은 얼굴이 퉁퉁 부어오른 김씨의 신세타령으로 하루가 시작되기 마련. 아랫목에 드러누운 채, 그녀는 장남 앞에서 넋두리를 늘어놓곤 했다.

"아이고! 이 년의 팔자가 어찌먼 요로코도 사나운고. 너는 장개 가서 느그 마누라한테 지발 애문 소리 조까 허지 말어라. 한 이불 속에 자는 사람끼리 속을 고로코 몰라주먼 누가 알아줄 것이며, 지 마누래를 못 믿으면 세상에서 누구를 믿을 것이냐? 그러고 쌈을 허드라도 말로 헐 것이로되, 지발 손찌검허지 말고. 여자도 다지금 집에서는 귀헌 딸이다. 또 지발 반찬까탈 부리지 말고. 남자가 먹는 것 갖고 까탈 부리먼, 큰일을 못 허는 법이여어. 그래서 내가 역불러 짐치(김치) 한 가지만 느그덜한테 준다. 애래서부터 버릇 잡을라고. 시상에, 내가 느그 새끼덜만 아니먼, 차말로 너 아니었으먼 진작 나가 버렀다. 진작 나가 버렀어. 어디 가서 식모살이를 헌들, 내 한입 거친(거두지) 못허겄냐?"

".........."

"그런디 내가 집 나가 버리먼, 느그덜...젤로 니 팔자가 뭇이 되겄냐? 느그 아부지사 새 애팬네 얻어 갖고 잘 먹고 잘 살란가 몰라도, 내 속으로 난 내 새끼들이 불쌍해서..."

이 대목쯤 도달하면,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게 되어 있다. 무릎을 꿇고 앉아 있던 태민의 눈에서도 닭똥 같은 눈물이 줄줄 흐른다.

"내가 너 아니먼 문 낙으로 살겄냐? 새끼들이 많이 있다고 허제마는, 다 니가 잘될 탓이다. 니가 잘 되먼 모다들 씌어 가는 것이고, 니가 못 되먼 즈그덜 신세도 밸 수 웂제 어찌겄냐? 어찌 갔거나, 부지런히 공부해서 남보다 잘 되야야 헌다. 하루에도 열두 번씩 죽어 버리까 생각이 들다가도, 니가 새 어매 밑에서 설움 받으까 봐서 그러도 못헌다."

김씨의 감동어린 사랑의 고백은 항상 결연한 각오를 이끌어 내곤 했다.

'내가 크면, 무엇보다 효도를 해야겠다. 이렇게 불쌍한 어머니를, 기어이 행복하게 해 드려야 해.'

김씨에게 효도하는 일이 지상목표인 반면, 이씨에 대해서는 끓어오르는 분노와 적개심을 억누를 길이 없었다. 까닭 없이 어머니를 때리는 아버지. 허구헌 날 반찬까탈이나 부리고, 식구들 앞에서 폭군처럼 구는 아버지. 자기 가족 하나 행복하게 해 주지 못하는 주제에, 동네일 한다고, 주민들 위한다고 큰소리치는 그가 죽이고 싶도록 미웠다.


by 강성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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