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 올리버 색스 1주기
두렵지 않은 척하지는 않겠다. 하지만 내가 무엇보다 강하게 느끼는 감정은 고마움이다. 나는 사랑했고, 사랑받았다. 남들에게 많은 것을 받았고, 나도 조금쯤은 돌려주었다. 나는 읽고, 여행하고, 생각하고, 썼다. 세상과의 교제를 즐겼다. 특히 작가들과 독자들과의 특별한 교제를 즐겼다. - <고맙습니다> 중에서
오토바이와 원소 주기율표를 사랑했고, 동성애자였으며 환자들의 결함을 삶의 일부로 바라볼 줄 알았던 의사. 2016년 8월 30일은 의사이며 생전에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 <편두통> <깨어남> <뮤지코필리아> 등의 책을 쓴 올리버 색스가 세상을 떠난 지 1년 되던 날이었다.
그가 살았던 미국 뉴욕과는 지구 정 반대편에 있는 대한민국에서는 그가 세상을 떠난 지 1년이 지난 후에도 여전히 그를 기억하고, 기리는 사람들이 모여 행사를 열었다. '올리버 색스 타계 1주기 추모의 밤'. 추모 행사가 열린 서울 마포구 서교동 땡스북스 서점 2층에는 오후 7시 30분이 되자 하나둘씩 사람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결코 작지 않은 공간이 1년 전 세상을 떠난 그를 기억하고 그리워 하는 마음으로 가득 찼다.
이날 행사는 땡스북스 이기섭 대표가 사회를 맡았다. 안지미 알마 출판사 대표의 인사로 본격적인 행사가 시작됐다.
5 분 남짓 생전의 그를 기리는 추모 영상을 상영한 이후, 박연준, 유진목, 박시하, 황인찬, 네 명의 시인이 등장해 헌정시와 올리버 색스의 유작 <고맙습니다>에 실린 글들을 소리내어 읽는 순서가 시작됐다.
박연준 시인은 헌정시 '완전하지 않은 것들이 달리는 고속도로'를 낭독 후 <고맙습니다>에 실린 글 '수은'을, 두 번째 순서로 유진목 시인은 '2015년 8월 3일'을 낭독 후 '나의 생애'를 낭독했다. 이어 박시하 시인은 <온 더 무브>에서 영감을 받아 쓰게 된 '진료실에서'라는 헌정시와 함께 '나의 주기율표'를 낭독했다.
완전하지 않은 것들이 달리는 고속도로
* 박연준 시인 헌정시
당신 다리를 주워요
당신 수염을 주워요
벗겨진 머리와 낡은 얼굴을
입술의 움직임과 침의 싱싱함을
당신의 모든 말과 글에서
진리에 앞선 홀림,
이 과도한 사랑
빛은 흔들리고 부서질 때 아름다움을
모든 치유의 열쇠는 사랑임을
주워요, 당신의 종이 위에서
당신은 미치광이
흔들리는 심장
수줍은 근육
슬픈 주기율표
발정 난 연필
푸른 늑대
부러진 화살
상처받은 봄과 겨울
완전하지 않은 것들이 질주하는 고속도로에서
누군가 기다린다면,
절뚝이는 사람 곁에서 함께
절뚝이고 있다면
당신은 인생을 다 사용하고 책 속으로
사라진 사람
그늘에서,
당신 영혼을 주워요
고맙습니다
네 번째로 등장한 황인찬 시인은 비치 보이스의 전기영화 제목이기도 한 ’사랑과 자비‘란 헌정시와 ’안식일‘을 낭독했다.
"올리버 색스의 글이 아름다운 건 언제나 그것이 무엇인가를 기억하는 방식이기 때문이에요. 기억한다고 하는 건, 과거를 쓴다고 하는 건 그 시절로 가는 것이 아니고, 그것을 다시 만들어 내는 일이 거든요. 올리버 색스는 그걸 훌륭하고 뛰어나게 잘 하는 사람이란 생각이 들어서 저도 여름과, 여름의 기억에 관한 시를 낭독하게 되었습니다."(황인찬)
그렇게 1부 행사가 마무리 되고 2부 행사에는 이민아 번역가와 사회자 간의 좌담이 진행됐다. 이민아 번역가는 올리버 색스의 저서 중 <온 더 무브> <색맹의 섬> <깨어남> <마음의 눈>을 한국어로 옮겼다.
그녀는 이 자리에서 가장 애착이 가는 작품으로 <색맹의 섬>을 꼽았다.
"저는 가장 처음 번역했던 <색맹의 섬>이 애착이 갔고, 그 작품은 다른 작품과는 조금 다른 면이 있어요. 올리버 색스 선생님이 꿈꿨던 이상적인 사회, 아무리 아픈 사람, 어떤 조건에 있는 사람들이라도 그 사회에서, 그 공동체에서 버려지지 않고 포용이 되어서 그 마을을 이루고, 그 조건으로 한 세대, 두 세대, 세 세대를 가는 그런 사회에 대한 이야기였기 때문에 그런 면에서 굉장히 감동을 받았던 작품이에요."
그녀는 번역자로서 올리버 색스가 치료 행위에 있어 의학이라는 전문 분야를 넘어, 인간과 이야기를 통해 접근했던 점을 특유의 매력으로 꼽기도 했다.
"아마도 과학이나 수학 같은 이과 계열에 대해선 많이 아는 게 없는 저 같은 사람이 번역할 수 있었다는 게 큰 매력이 아닐까 싶어요. 아주 과학적이고 전문적인 분야, 의학, 더군다나 보이지 않던 곳에 치워져 있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그 사람들의 살아온 역사 속에서 이야기한다는 것. 색스 선생님이 스스로 말씀하시기를 그가 만난 환자들에 대해선 이야기적인 접근 말고는 알릴 방법이 없었단 말씀을 하세요.
과거, 가족, 그 사람의 역사를 이야기하지 않고 수치, 도표, 차트 이런 것으로 치료의 대상으로 보는 것에 대해 반감을 많이 가졌고, 그런 방식으로는 이 환자, 이 질환에 접근할 수 없다고요. 올리버 색스의 책을 읽고 번역하면서, 그런 사람들의 삶을 접하며 한번도 위안을 가져본 적이 없고, 그렇다고 너무 고통스러워서 쳐다볼 수도 없는 것이 아니라 그냥 이 사람이 살아가는 하나의 조건으로 바라본다는 것이 좋았어요."
이민아 번역가와의 대화가 끝나고 추모를 위한 자리는 마무리됐다. 자칫 어두운 분위기가 맴돌 수도 있었지만 현장의 분위기는 간혹 웃음이 터지기도 하고, 지인들 간의 즐거운 인사도 오가는 편안한 분위기였다. 비록 올리버 색스는 세상을 떠났지만, 책을 통해, 그를 기억하는 사람들의 마음 속에 그렇게 살아 있음을 느낄 수 있는 자리였다.
취재 : 주혜진(북DB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