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 그짓말. 이씨 앞에서는 교회를 변호하는 쪽이었다. 하지만 들으면 들을수록 거짓말에 가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맞아. 아버지 말씀대로, 사람들을 꼬실라고 사기치고 있을지도 모른다! 태민으로서는 무엇보다 그 지긋지긋한 지옥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아예 없다면 갈 까닭도 없을 테니. 하지만 사자후를 토해내는 전도사의 태도로 미루어, 어쩌면 사실일지도 모른다는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마음이 불편해졌다. 에이! 오늘은 이래저래 재수 없는 날이로구만. 차라리 이런 말은 듣지 않는 편이 더 나았을 터인데. 그나저나 천당에 가지 않는 거야 상관없지만, 지옥에는 떨어지지 않아야 할 텐데.
그러려면 교회도 열심히 나오고 착하게 살아야 한다는데, 그 두 부분에서 모두 자신이 없었다. 광호나 춘옥이처럼 두 가지를 다 할 수는 없을 것 같았다. 물론 거짓말이나 도적질을 많이 한 편은 아니었다. 하지만 전혀 하지 않은 것도 아니었으니. 광호에게 학용품을 가져다주느라 가게에서 김씨 몰래 도둑질을 한 적도 있고, 동네의 한 형이 꼬드기는 바람에 가게를 뒤져 돈을 상납한 일도 있었다. 또 그 사실을 숨기다가 김씨에게 들키기도 했다.
교인들을 괴롭히는 일에 적극 가담한 적도 있었다. 송정과 염전 사람들이 교회를 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서촌의 한복판을 통과해야만 했다. 이 약점을 노린 동네 조무래기들은 큰길 양쪽에 서 있는 두 개의 나무를 골라 한쪽 기둥에 새끼줄을 묶고, 반대편에까지 줄을 늘어뜨린 다음 그 끄트머리를 태민의 손에 쥐어주었다. 태민은 그걸 붙잡은 채 나무 뒤에 몸을 숨겼다. 서쪽의 동네입구에 서 있다가 성경을 팔에 끼고 오는 처녀들과 여자들을 몰아대는 역할은, 달리기에 능한 태준이 맡았다. 마침내 그의 고함소리가 가까이 들려옴에 따라 골목에 숨어있던 아이들까지 가세하여 온갖 괴성들을 질러댔다. 여자들은 혼비백산하여 달리기 시작했고 그들이 사정거리 안에 들어왔을 때, 태민은 늘어뜨려 놓았던 새끼줄을 높이 추켜올렸다. 흥화진(평북 의주군) 앞의 내를 소가죽으로 꿰어 막았던 강감찬 장군. 거란군이 건너기를 기다렸다가 일시에 물을 터트려 흘려보내면서, 기병 1만 2천의 복병으로 하여금 적군을 공격하게 하여 대승을 거두었던 영웅. 어디 그 뿐인가? 울돌목의 빠른 조류를 이용하여 일본 수군을 대파한 성웅 이순신 장군도 있었다.
"오메야, 아부지!"
"아이고 메이..."
와르르 넘어진 그들 위로 물총 세례가 퍼부어졌다. 심지어 교회 입구까지 뒤를 쫓으며, 아이들은 물을 뿌려대거나 모래를 끼얹었다. 이 놀이에 맛을 들인 악동들은 '탄환'의 질을 더욱 업그레이드하여 물 대신 '구정물'이나 잉크를 장전하기도 했다. 그 살맛나는 놀이는 여자들이 북쪽으로 난 신작로를 타고 피해 다닐 때까지 이어졌다.
'죄를 회개하면 용서받을 수 있다'고 하는데, 과연 그걸 믿을 수 있을까? 이씨의 경우만 봐도 그래. 화가 났다 하면, 며칠 전의 시시콜콜한 실수까지 들춰내지 않던가? 더욱이 기억력이 몇 배나 더 좋으실 하나님이야 먼 옛날의 사소한 죄까지 모조리 기억하고 계실 터인데. 전도사가 사람들을 꼬드기는 것처럼, 어쩌면 하나님도 '천국'이라는 사탕발림으로 목사나 전도사를 위시로 한 모든 사람들을 속이고 있는지도 모른다. 일단 교회에 나오게 한 다음, 받아먹을 것 다 받아먹고 나중에 나 몰라라 하거나 본인들이 기억하지도 못하는 작은 죄를 꼬투리 잡아 지옥으로 보낼지도 모른다. 그렇게 되면 결국 실컷 이용만 당하고 신으로부터 배신당하는 꼴이니, 종국에는 악마의 손에 붙잡혀 지옥으로 끌려가고야 말 것이다. 열심히 교회 나가 회개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끔찍한 형벌을 다 받는다면, 참으로 분하고 억울할 일이 아닌가? 어차피 결말이 그렇게 될 바에야 살아있는 동안에나 맘 편하게, 즐겁게 사는 것이 현명하지 않은가? 아무리 용을 써 본들 말짱 도루묵일 바에야, 구태여 애쓸 필요가 없지 않은가 말이다. 한참 동안 공상 속을 헤매고 있는데, 벽락 같은 소리가 들렸다.
"여러분! 천국이나 지옥이나 똑같이 밥을 줍니다. 그러나 천국에서는 모두 밥을 배불리 먹는데, 지옥에서는 깡그리 굶습니다. 왜 그러느냐?"
"..........?"
"그 곳에서는 수저나 젓가락이 너무 너무 길답니다. 그런데 이기적인 지옥 사람들은 자기 입으로만 밥을 떠 넣으려고 허다 보니, 한 숟가락도 못 먹고 모두 쏟아버립니다. 그러나 착한 사람들이 모인 천국에서는 앞쪽에 앉아 있는 사람에게 먼저 떠 먹여줍니다. 그러면 상대방 역시 나에게 밥을 떠 주겄지요. 이렇게 하여 모두가 배불리 식사를 하게 된다는 것이지요. 나보다 남을 먼저 섬겨주면 그곳이 바로 천국이고, 남보다 나를 먼저 챙긴다면 그곳이야말로 지옥이 되는 것입니다. 이 땅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서로를 사랑하면 이곳이 천국이 되는 것이고, 서로를 미워하면 이 땅이 바로 지옥이 되는 것입니다."
이 땅에서도 착하게 살아야 한다는 말은 알아듣겠는데, 그러면 과연 천국이 하늘에 있다는 거야 땅에 있다는 거야? 그건 그렇고.
'큰아버지는 어디로 가셨을까? 맘씨도 좋고 나에게도 잘하셨으니, 틀림없이 천국에 가셨을 것이다. 그런데 만약 천국이 하늘에 있다면 온몸이 꽁꽁 묶인 채 땅속에 들어간 분이 어떻게 그곳까지 가실 수 있을까? 날아가시나? 비행기라도 타고 가시나? 교회에서는 사람이 죽어 육체가 썩더라도 영혼만큼은 살아남는다고 하는데, 정말 그럴까? 눈에 보이지 않는 큰아버지의 영혼이 하늘로 올라갔나? 그래. 그러셨다면 참 좋은 일이야.'
그럼에도 자꾸 썩어문드러진 시신이 눈앞에 어른거렸다. 그때 어른들 말로는, 그렇게나 잘 썩었다는데, 어떻게? 교회에서 하는 말과 직접 눈으로 확인한 사실이 마음속에 충돌을 가져왔다. 이 모든 것들에 대해 어른들에게 물어보고 싶었다. 하지만 또 엉뚱한 소리 한다고 나무랄까 봐 입을 다물고 말았다. 만일 그런 질문을 학교선생님에게 한다면, 귀싸대기를 한 대 얻어맞을지도 모른다.
연중행사, 하룻밤의 볼거리를 즐긴 다음, 사람들은 썰물처럼 빠져나가 일상으로 돌아가곤 했다. 태민 역시 이듬해 성탄 전야까지 교회에는 발길을 끊었다. 그런데 성탄 2주 전부터 나간 적이 있었다. 일 년 내내 코빼기도 보이지 않다가 당일에야 얼굴을 내미는 행위가 너무나 몰염치한 짓으로 느껴졌던 데다, 한창 연습 중인 '천사들'을 구경할 수 있고 간혹 사탕을 얻어먹는 재미도 쏠쏠했던 까닭이다. 그리고 성탄절을 보내고 나서는 어김없이 교회를 잊었다. 그러던 어느 날. 광호 녀석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선생님이 니 이름을 부름시로 기도했었넌 디..."
"..........?"
"반사 선생님이 태민이 니 이름을 막 부름시로, 기도했었단 게."
"...차말로 야?”
"내가 뭇 헐라고, 너한테 그짓말허겄냐?”
"...무이라고 허디야?"
"니가 교회 나오게 해 주라고..."
그것은 뜻밖에도 신선한 충격이었다. 이 세상에서 나를 위해 기도해 주는 사람이 있다니? 이씨는 물론 나를 위해서라면 목숨까지도 바칠 각오가 되어 있어 보이는 김씨 역시, '하나님' 앞에서 내 이름을 부르며 기도하지는 않았다. 그런데 나하고 피 한 방울도 섞이지 않은 사람이 나를 위해 기도를 했다고? 물론 아이들 듣는 데서 자신의 이름이 불리어졌다는 사실에 조금 창피하긴 했다. 하지만 알 수 없는 기쁨이 저 깊은 마음속으로부터 올라왔다.
'하얀 얼굴에, 늘 잔잔한 미소를 머금고 있던 그 선생님이 나의 이름을...'
속으로만 은근히 좋아했던 처녀 선생님이 나의 존재를 확인하고, 더불어 그 아름다운 입술로 내 이름까지 불렀다니...아! 이 얼마나 가슴 벅찰 일인가? 과연 내가 그녀에게, 그처럼 소중한 존재였단 말인가? 아니, 나라는 존재가 그녀의 맘속에 조금치라도 자리하고 있었단 말인가? 보고 싶었다. 나를 향한 그 분의 마음을 확인하고 싶었다. 마음 같아서는 금방이라도 교회로 달려가고 싶었다. 하지만 밖으로 튀어나온 말은 전혀 딴판.
"나, 가기 싫은 디...?"
"어째서야?"
"그냥..."
아이들이 흉을 볼까봐, 광호 녀석의 시선이 속마음을 알아챌까봐 두려웠다. 눈치를 살피던 녀석이 슬그머니 사라졌다. 에라이, 바보 같은 놈.
일요일 아침, 태민은 교회바닥에 앉아 있었다. 특별한 일도 없이 녀석의 집에 드나들었고, 그 사이 녀석으로부터 두세 차례 권유를 받은 뒤였다.
"어머나! 세상에나, 세상에나. 우리 태민이가 드디어 왔구나. 하나님!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까만 머리칼이 엉덩이까지 흘러내리는 그녀는 꼭 실성한 사람처럼 들떠 있었다. 머쓱해진 태민은 고개를 푹 숙인 채, 입을 다물었다. 본래 숫기가 없기도 했지만, 교회에 가면 왠지 더 쑥스러웠다.
"자, 자. 여러분. 우리 모두 손을 잡고 기도해요."
맨바닥에 삥 둘러앉은 예닐곱 명의 아이들이 무릎을 꿇었다. 태민 역시 황급히 무릎을 꿇었고, 아이들의 하는 모양을 따라 두 손을 모아 가슴팍에까지 치켜 올렸다.
"하나님, 참으로 감사합니다... (중략) 태민이가 다시 교회에 나올 수 있도록 해 주신 주님의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이제 길을 잃고 방황하던 주님의 어린양이 돌아왔습니다. 그리하여..."
".........."
밖의 사정이 못 견디도록 궁금하여 한쪽 눈을 떴다가 감고. 다시 떴다가 감기를 되풀이하던 중.
"...착하고 영리한 우리 태민이가 빠짐없이 교회에 나올 수 있도록 인도해 주세요. 이 모든 말씀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 드렸습니다."
"......아멘!"
들릴락 말락 '아멘' 소리를 내보았다. 몸은 마구 떨리고, 어느새 이마에는 송알송알 땀이 맺혀 있었다.
"태민아..."
그녀는 태민의 두 손을 꼭 잡은 채, 활짝 웃어 보였다. 그러나 두 뺨에는 눈물자국이 남아 있었다. 순간, 숨이 막힐 것 같았다.
'이 담부터 교회는 절대로 안 나온다!'
감격적인 그 순간에 왜 하필 그런 생각이 들었는지 알 수 없었다.
태민은 그날 이후. 고집스럽게 교회에 나가지 않았다. 어쩌다 궁금한 생각이 들 때에는 움칫 놀라 도리질을 쳤다. 그런데 어느 여름날. 교회 건물과 거의 맞닿아 있는 당산나무에 올라갔다가 불현듯 반사 선생님이 그리워지고 말았다. 가슴이 찡해 왔다.
'나 때문에 속이 상했을까? 지금쯤 어디서 무얼 하고 계실까? 그 뒤로도 나를 위해 기도를 하셨을까?'
그동안 쭉 잊고 있었던 것 같은데, 거짓말처럼 눈물이 났다. 그러고 보니 광호 녀석 역시 교회 말을 하지 않았다. 태민 또한 물어보지 않았다. 간혹 그 반사 선생님이 생각이 났지만, 이상하게 그녀의 행방을 찾는다거나 교회에 나갈 생각은 하지 못했다. 하루는 김씨가 시큰둥하게 말했다.
"느그 교회 선생이라든가, 문 큰애기가 점빵에 왔었넌 디. 너, 봤었냐?"
"진짜로? 은제?"
"어저껜가 그저껜가?"
"아따! 어메는. 어째서 인자사 그 말을 헌가?"
"똥 누러 갈 틈도 웂이 하도 바쁘게 산 게 그러제, 어째야?"
"무시락 했넌 디?"
"너만 찾다가 동네 모실에 나갔닥 헌 게, 그냥 가드라. 문 시집을 가는가 어찌는가, 인자 자조 못 보겄다고 그러는 것 같던 디. 그 큰애기가 동춘 사냐? 맻 번 본 것 같기도 허고..."
"낯바닥이 밸라 더 히커제. 이?"
"어디 이쁜 구석은 웂넌 디, 참허게는 생갰드라."
그것 뿐. 오직 그뿐이었다. 그 후로 그녀에 대한 소식을 들은 적이 없었다.
어느 날. 과외공부를 마치고, 김봉식 선생님과 함께 송정 동네에 들렀다. 마침 그곳에서 하숙을 하고 있던 심영진 선생님을 방문하기 위해서였다. 5학년 때 담임교사로서 비록 성미는 급하고 괴팍하였지만, 태민에게 장래의 큰 포부를 갖게 한 ‘은사’였다. 밤이 이슥하도록 이야기를 나누다가 자리에서 일어서려는데, '호랑이'가 물었다.
"태민이 너, 열심히 허고 있지야? 내 기대에 어긋나먼 안 된다 이. 알았지야?"
"..........예."
사실 그의 유별난 관심은 태민을 무척이나 불편하게 만들곤 했었다. 억지로 원고를 외우게 하여 학예회 무대에 웅변하도록 한 일이나 점심시간에 구령에 맞추어 재건체조를 한 다음, 전교생이 지켜보는 가운데 흑백사진을 함께 찍은 일, 수업시간마다 불러내어 유행가를 시킨 일 등등. 모든 것이 태민에게는 귀찮고, 쑥스럽고, 창피하고, 속상한 일이었다.
"어째서 대답이 시언찮허냐? 그러먼 김 선생, 살펴 가입시다 이. 태민이, 너도 잘 가고... 아부지한테 안부 전허그라 이."
그의 배웅을 받으며 어두운 골목을 벗어났다. 그리고 동쪽에 자리한 서촌을 향해 부지런히 걸었다. 그런데 길의 중간쯤 당도했을 때, 갑자기 앞이 깜깜해지고 말았다. 당황한 태민은 환히 밝혀진 남쪽을 바라보았다. 분명 밭이었던 곳에 하얀 길이 뻗어있지 않은가? 등골이 서늘해졌다. 귀신한테 홀린 것만 같아 더럭 겁이 났다. 선생님의 손을 꼭 쥐었다.
"선생니임..."
"......카마이 있자. 이상허다 이. 여그가 문 길이 있었다냐?"
귀신 자체보다도 선생님마저 귀신에 홀렸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더 겁이 났다. 잡았던 손을 슬그머니 놓았다. 어쩌면 그가 억지로 자신을 끌고 갈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그보다 앞길이 어두워진 것까지는 그렇다 할망정, 옆길이 밝아지는 것은 또 무슨 조화인가? 결국 귀신이 우리 둘을 그쪽으로 유인하고 있다는 증거가 아닌가 말이다. 다시 한 번 정신을 가다듬었다.
"이 곳은 내가 수십 번 오간 길인데, 갑자기 우리 동네가 다른 데로 이사라도 했단 말인가? 말도 안 되는 소리! 이건 틀림없이 귀신의 장난이야. 선생님과 나를 엉뚱한 곳으로 끌어내어 잡아먹으려는 속셈이라고...'
"태민아! 저쪽이 밝지 않냐? 쩌어기 무슨 불빛도 보이고..."
그의 목소리는 반쯤 얼이 나가 있는 듯 느껴졌고, 잡은 그의 손에는 힘이 빠져있었다.
"선생님, 여러 번 내가 이 길을 댕갰단 게요. 저쪽이 우리 동네여요."
버럭 소리를 지르고 만 스스로에 대해 놀랬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은근슬쩍 끌려가고 말 것 같아 과잉반응이 일어났는지도 모른다. 따라가고 싶은 충동을 누르며 그의 손을 힘껏 잡아당겼다.
그와 마주잡은 손에는 어느새 땀이 흥건히 배여 있었다. 꿈쩍도 하지 않던 선생님, 마침내 그가 끌려오기 시작했다. 눈을 딱 감고 걸었다. 눈을 떠 본들 아무런 소용이 없기도 했지만, 혹시 시커먼 괴물이라도 마주칠까봐 겁이 났다. 왼쪽 가슴팍의 심장이 지축을 흔들 듯 쿵쿵거렸다.
숨 막히는 시간 속을 얼마나 걸었을까. 어슴푸레 동네의 윤곽이 나타났다. 고즈넉하게 잠들어있는 서촌, 태어나 한 번도 떠난 적 없는 고향동네가 그토록 아름다워 보인 적은 일찍이 없었다. 입구에 우뚝 서 있는 전주 이씨 종친회 비석을 확인하고서야 비로소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문이 닫힌 가게 앞에 당도하여 멈칫거릴 때, 그가 말했다.
"태민아, 오늘은 나랑 같이 자자."
"..........!"
염화시중의 미소요, 이심전심(以心傳心)이었다. 그가 사는 곳은 작은집 나락창고 옆에 딸린 작은 방. 이씨는 태민과 중학교 입시에 낙방한 사촌형 태준을 한데 묶어 6학년 담임교사인 그로부터 과외공부 지도를 받도록 했다. 저녁마다 앉은뱅이 책상에 앉아 태민과 담임교사가 문제를 풀어나가는 동안, 맞은편에 앉은 태준은 꼿꼿이 세운 책의 한가운데 만화를 끼워 침을 흘리며 탐독하곤 했다. 물론 사람 좋은 김봉식 선생님은 끝내 모른 체 해 주었고. 날이 밝기가 무섭게 김씨에게로 달려갔다.
"어메! 나..."
"어디 갔다 인자 오냐? 느그 선생이란 어디 갔었냐?"
"송정에. 너무 늦었다고 선생님이랑 작은집 방에서 잤고라우. 나, 어저께 구신 만났넌 디..."
"식전(食前)부터 밸 소리를 다 헌 갑이다. 싸게 가서 밥이나 먹어라."
"차말로 만났단 게!"
"구신은 있는 법이여어. 알았은 게, 밥이나 먹으란 마다."
by 강성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