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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인터파크 북DB Sep 21. 2016

 "한국민 세계화 의식 너무 수줍다"

<누구를 기억할 것인가> 터키특파원 알파고 시나씨 작가 인터뷰

          

한국에서 12년째 살고 있는 터키 특파원이라 해서 나이 지긋한 중년의 남자를 떠올렸다. 하지만 사무실로 쓰고 있는 서울 광화문 소재 조그만 오피스텔에서 만난 알파고 시나씨(Alpago Sinasi)는 스물여덟의 청년이었다. 벌써 2년 전에 두 살 연상의 한국 여성과 결혼했다고 한다. 대학생이라 해도 믿을 만큼 동안을 자랑하는 벽안의 젊은이였다.


스물여덟의 외국인이, 그것도 저 머나먼 이슬람국가의 젊은이가 한국어로 책을 썼다. 한국에 살고 있는 터키인이 쓴 책이니 자연스레 두 나라의 공통분모를 주제로 다루었을 것으로 짐작했다. 하지만 뜻밖에도 그가 쓴 <누구를 기억할 것인가>는 세계 화폐 인물들에 관한 이야기다.


그런데 미국을 거쳐 라틴아메리카, 중동, 우리와 가까운 중국, 일본 등 14개국 52명의 화폐 인물들을 다루면서 정작 한국 화폐에 대한 이야기는 쏙 빠져 있어 조금은 허탈한 마음까지 든다. 한국에 관한 내용도 없으면서 굳이 이 책을 한국에서 낸 이유가 뭐람?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화폐 인물들로 만나는 시대의 도전자들'이라는 부제에 숨어 있다. 책에서 다루는 화폐의 인물들은 모두 시대를 변혁시킨 도전자들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대부분 혁명이나 독립전쟁을 통해 탄생한 현대 국가들은 자신들의 자랑스러운 과거를 잊지 않고 국민을 통합하기 위해 건국에 이바지한 영웅들을 여러 방법을 통해 널리 기리는데, 제일 많이 사용되는 곳이 바로 화폐라고 한다. 


그런데 한국 화폐의 주인공들은 누구인가? 대한민국 건국 영웅과는 거리가 먼 조선시대 인물들이다. 알파고 시나씨는 한국의 화폐가 각국의 자유, 독립, 건국, 민주주의 투쟁 영웅들을 통해 도전의식을 살펴보고자 한 이 책의 주제와는 다소 거리가 있어 한국을 제외시킬 수밖에 없었다고 말한다. 또한 외국인이 얕은 지식으로 한국 역사에 대해 왈가왈부하는 것도 주제넘은 일이라고 생각했다고 이유를 덧붙였다. 

"한국 화폐에 현대 인물 없는 것, 남북 분단의 산물"

알파고 시나씨는 한국 화폐의 주인공들이 조선시대 인물들인 이유는 분단과 그 이후 정치적 사건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분석했다.


"대한민국 정부가 통일 아젠다를 아직 버리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헌법상으로 현재 대한민국 영토는 신의주에서 제주도까지입니다. 어떻게 보면 지금 대한민국은 어떤 조직한테 국토의 반을 빼앗긴 상황이에요. 그런 상황에서 남한만의 영웅을 내세운다는 것은 통일을 포기하는 것을 의미할 수도 있거든요. 남북한이 모두 기억할 수 있는 사람 중에 시대적으로 가장 가까운 것이 조선시대이기 때문에 그 시대 인물을 화폐의 주인공으로 쓴 것이 아닌가 합니다." 


하지만 분단 상황만으로 대한민국의 화폐에 광복, 건국, 민주주의 영웅들이 빠진 이유를 설명하긴 뭔가 부족해 보인다. 대부분의 나라에서 초대 대통령이 국부로 추앙되며 최고액권에 초상화가 실리는 것에 반해 대한민국의 초대 대통령의 모습은 어떠한가. 3.15 부정선거로 인해 하야와 망명으로 국부의 지위를 잃었고, 당시 한국의 화폐에서도 그의 초상화가 지워졌다.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 정부는 긴급통화조치를 통해 새 은행권을 발행하며 남대문, 독립문, 해금강 총석정, 첨성대 등으로 화폐를 도안했다. 조선시대 인물들이 실린 지금의 화폐는 1970년대 들어서 제작됐다. 


한국에 관한 내용이 들어 있지는 않지만, 이 책이 강한 여운을 남기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우리나라의 진정한 영웅은 누구이며, 우리는 누구를 기억할 것인가? 그렇다면 우리 화폐의 주인공이 될 사람은 누구일까? 이 같은 물음들이 머리를 떠나지 않는 것이다. 


"표면적으로 보면 이 책에 한국에 대한 이야기는 없지만, 오히려 더 큰 물음을 줄 수 있다고 생각해요. 책을 쓰면서도 계속 한국적인 상황에 대해 생각을 했거든요. 사실 이승만이나 박정희에 대해 한국 사람들의 인식은 너무나 극단적이에요. 중간의 평가가 없어요. 그 시대를 겪은 동시대 인물들이 아직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지금은 어쩔 수 없지만, 앞으로 50년 정도 지나면 객관적인 평가가 이루어질 거라고 생각해요. 과연 그때 한국인들이 진정으로 기억할 만한 인물은 누구일지 한번쯤 생각해봤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알파고 시나씨는 터키의 과학고등학교 재학 시절 나이지리아에서 유학 온 친구에게 그 나라 화폐를 받은 것을 계기로 세계 각국의 화폐를 모으게 됐다. 터키 주변에 9개 나라가 인접해 있고, 그의 고향 마을은 아제르바이젠, 이란 등 3개 나라와 접해 있어서 외국의 화폐를 자주 볼 수 있었다. 이후 한국에 와서 세계 여러 나라 사람들을 만나게 되면서 본격적인 화폐 수집이 시작됐고, 한국 주재 터키 특파원으로 일하고부터는 국제회의나 취재차 직접 외국을 나갈 기회가 많아 더욱 취미에 가속도가 붙었다. 현재는 80여 개 나라의 화폐 수백 장을 소장하고 있다. 


"살아가면서 넘어질 때마다 힘이 되어준 것이 바로 화폐 속에 나오는 건국 영웅들이었어요. 단지 머릿속으로 이상과 꿈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존재했던 인물들의 도전의식과 인내심 같은 것을 화폐를 통해 직접 손으로 만지며 느껴보는 것은 큰 차이가 있어요.


낙관적인 저와 달리 냉철한 편인 제 아내는 이 책을 읽고 그 인물들의 이야기가 별로 감동스럽지가 않다고 하더라고요.(웃음) 하지만 중요한 것은, 성공을 믿어야 성공할 수 있다는 거예요. 성공을 안 믿고 성공한 사람은 없어요. 지금 영웅이 된 이들도 우리와 똑같은 보통 사람이었거든요. 이들의 삶이 제 삶의 강력한 동기가 되고 있습니다."

"삼성 통제하면 '오성' '육성' 나온다… 법안 몇 개로 풀릴 문제 아냐"

올해 초 바둑기사 이세돌과 대결을 펼친 인공지능 프로그램과 같은 이름 덕에 요즘 더 유명세를 타고 있는 알파고 시나씨는 최초의 한국 주재 터키 특파원이다. 터키의 명문인 이스탄불기술대학교에 다니던 중 카이스트에 유학하려고 한국에 왔다가 국제관계에 매력을 느껴 정치학으로 방향을 틀었다. 충남대학교에서 정치학을, 서울대학교 대학원에서 외교학을 전공했다.


2010년에 한국을 방한한 터키 대통령의 통역을 맡은 것을 계기로 터키 굴지의 미디어그룹인 지한(Cihan)통신사에 발탁돼 6년 동안 특파원으로 활약했다. 얼마 전에는 지한통신사가 국영화되면서 사라져 터키 인터넷 매체인 하베르코레(haberkore.com)에서 활동 중이다. 


12년째 한국에서 살고 있는 그는 무슬림이 한국에서 사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라고 말한다. 서울대 대학원 시절 만나 결혼한 그의 한국인 아내는 '터키댁'이라는 닉네임으로 블로그 활동을 활발하게 하고 있는데, 그는 그 이유가 "중동 노동자에게 딸을 시집 보낼 수 없다"고 극심하게 반대했던 처가와 주변의 편견에 대해 "우리 이렇게 잘살고 있어"라는 걸 보여주기 위해서라고 들려줬다.


한국과 이슬람 국가는 경제적 교류도 별로 없고 거리상으로도 멀다. 한국은 서구나 미국에 비해선 무슬림이 살기에 정말로 좋은 환경이지만, 반대로 워낙 이슬람 사람들이 없다 보니 언론 등을 통해 만들어진 편견을 깨기도 어려운 게 사실이다.


"얼마 전 택시를 타고 기사님과 한국 정치에 대해서 신나게 이야기를 했어요. 그러다가 제가 터키에서 왔다고 하니 태도가 돌변하는 거예요. 무슬림이 싫다는 이유였죠. 물론 싫어할 수도 있어요. 그런데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우리는 3초 전까지는 막 웃으면서 이야기를 나누던 친구였는데, 나를 싫어할 만한 힘을 그 3초 안에 어떻게 얻었느냐는 거죠. 친근한 감정이 분노로 바뀌려면 시간이 필요한데 그게 그 3초 안에 어떻게 가능한 것일까요.


종교를 이데올로기로 만들면 종교에 대한 배신이고 주변에 피해를 줍니다.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고 좋아하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지만, 분노는 선택의 문제예요. 당시에는 어이가 없고 기분이 나빴지만 나중에 생각해보니 오히려 그 사람이 불쌍했어요. 분노를 너무 쉽게 선택한 사람이기 때문이죠. 그분은 저뿐만 아니라 가족이나 친구들에게도 빨리 분노하는, 그래서 사랑하는 사람들을 불행하게 하는 불쌍한 사람일 거예요." 

"한국 기업 국제화에 비해 한국민 세계화 의식 한참 뒤떨어져"

그는 이슬람 사회는 분명히 비판받아 마땅한 부분이 있고, 빨리 바뀌어야 한다고 인정했다. 200년 동안 제국주의 침략에 저항하다 보니 똑똑한 학자들이 다 죽고 무식한 사회가 탄생했다고 안타까워했다. 그러나 이슬람 사회 문제는 이슬람 사람들이 풀어야 하는 문제라고 분명히 못박았다. 비이슬람 사람들이 도와주지는 못할망정 오히려 문제를 더 심화시키고 있다는 것.


가령 내 자식이 문제가 있으면 부모인 내가 가르쳐야 하는데 옆집 아줌마가 와서 오히려 감 놔라 배 놔라 잘못된 훈수를 둬서 오히려 더 역효과를 내는 것과 같다고 비유했다. 문제는 내 아이와 옆집 아이는 한 동네에서 같이 놀 수밖에 없다는 것. 옆집의 훈수로 내 아이가 더 잘못되면 결국은 옆집 자식에게도 피해가 간다는 사실을 인식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인간의 90%는 태어난 곳에서 죽어요. 태어나 보니 누구는 이슬람으로 태어나고, 누구는 불교로, 누구는 기독교인이 된 것이거든요. 우리가 선택해서 다른 민족, 다른 종교로 태어난 게 아니잖아요. 인간의 보편성에 대한 인식이 더 강해졌으면 좋겠어요. 결국 모든 문제는 사람에서부터 시작돼야 한다고 생각해요."


한국의 산업과 문화, 대북 관계 등을 취재해 터키에 전하고 있는 그는 한국 사회의 가장 큰 장점으로 '응집력'을 꼽았다. 서구의 개인주의와 한국 특유의 집단주의가 절묘하게 균형을 이뤄 만들어진 큰 에너지가 어느 한 곳으로 힘을 집중해야 할 때 강력하게 발휘된다고 분석했다. 반면 한국 사회의 가장 큰 문제점을 묻는 질문에는 경제구조 문제를 정치를 통해 풀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라고 서슴없이 대답했다. 


"재벌 규제한다고 삼성을 통제하면 '오성', '육성'이 나와요. 포괄적으로 풀어야 할 문제지 국회 통과한 법안 몇 개 가지고 풀릴 문제가 아니에요. 얼마 전에 식당에 갔는데 캐나다에서 1년, 오사카에서 1년 어학연수를 다녀온 여종업원이 일하고 있더라고요. 다른 나라 같으면 그런 경력으로 그런 데서 일 안 합니다. 좀 더 다각적으로 접근해야 한다고 봅니다. 그 한 방법으로 우수한 한국 인재들을 적극적으로 해외에 진출시켜야 한다고 생각해요.


한국 대학에서 강의를 하며 학생들을 만나보면, 한국에서 교수 되는 게 결코 쉽지 않다는 걸 인식하면서도 외국에 나가서 하겠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거의 없어요. 한국 기업의 국제화 속도에 비해 국민의 세계화 의식은 아직 한참 뒤떨어져 있는 듯해요. 한국 기업은 이미 저 앞에 있는데 국민의 의식은 너무 수줍다고 할까요. 한국의 실업률이나, 금수저-흙수저 같은 여러 경제 문제들은 이렇게 하지 않으면 해결되지 않을 시점에 와 있습니다. 한국인들이 좀 더 시야를 넓혔으면 좋겠어요." 

사진 : 신동석

취재 : 이미회(북DB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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