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layDB 공연 스케치
층층이 쌓인 인간 욕망의 밑바닥을 적나라하게 드러냈던 <글로리아>의 딘, 찌질하고 위선적인 <사회의 기둥들>의 뢰를룬, 수십년 간 환상을 사랑했던 <엠.버터플라이>의 르네 갈리마르…어느 작품, 어느 인물을 돌아봐도 이승주는 언제부터인가 든든한 ‘믿보배(믿고 보는 배우)’로 무대에 자리하고 있었다. 그런 그가 이번에는 두 눈을 가리고, 손도 묶인 채로 무대에 오른다. 오는 20일 개막하는 연극 <두 개의 방>에서 그가 맡은 인물은 테러리스트들에게 납치돼 어두운 방 안 갇힌 채로 사랑하는 아내에게 말을 건네는 역사 교수 마이클이다. 매번 섬세한 연기로 깊은 인상을 남겼던 그가 이번에는 어떤 인물로 분할지, 평소 연극이라는 작업에 임하는 그의 자세는 어떤 것인지 묻고 싶었다. 그래서 지난 7일, 연습 중인 그를 잠시 만나 이야기를 나눴다.
Q 이번에 연기하게 된 <두 개의 방>의 마이클은 어떤 인물인가.
누군가의 이익을 위해 납치된 인물이다. 작가가 실제 있었던 레바논 인질 피랍 사건을 모티브로 이 연극을 썼다고 하는데, 역사적 사실보다는 그 사건이 있은 후 바깥에서 벌어지는 일들에 대한 이야기를 다룬 것 같다. 정부의 대처, 언론이 하는 일들 등. 연출님은 궁극적으로 ‘사랑’이라는 인간의 가장 원초적이고 강력한 감정이 이 작품에서 강력하게 드러났으면 좋겠다고 생각하시는 것 같다.
Q 연습을 잠깐 봤지만, 대본이 굉장히 많은 것들을 담고 있는 것 같다.
맞다. 어떤 분들은 두 남녀의 애틋한 사랑이야기로 보실 수도 있고, 또 다른 분들은 언론이나 정부의 부조리에 중점을 두고 보실 수도 있다. 어떤 시각에서 보느냐에 따라 메시지가 달라지는 연극 같다. 그래서 배우 입장에서는 어떤 부분에서 어떤 메시지를 전해야겠다는 생각을 뚜렷이 정하고 연기하지는 않는다. 다른 작품에서는 장면 별 목표를 철저하게 공부해서 연기했다면, 이번에는 이런 사람이라면 어떻게 할까, 라는 생각에 집중하며 연습했다. 물론 모든 연극의 인물들이 그렇겠지만, 이 인물에게 닥친 상황은 특히나 감히 상상할 수 없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정말 이번처럼 ‘만약에 나라면?’이라는 생각을 많이 했던 작품이 없다. 전작 <글로리아>의 딘만 해도 우리 주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인물이었고, 내가 그럴 듯하게 타당성을 갖고 잘 연기하면 되는 인물이었다. 그런데 마이클에 대해서는 내가 감히 상상할 수 없는 부분이 많았다. 그냥 고통스러운 척하면 다 들킬 수밖에 없더라. 눈도 가리고 있고 손도 결박돼 있기 때문에 표현의 한계가 굉장히 많다. 미세한 호흡의 변화, 몸의 움직임들로 표현을 해야 하기 때문에 나라면 어떻게 할까, 라는 생각을 굉장히 많이 했다.
Q 정말 본인이었다면 어떻게 했을 것 같나.
처음에 납치됐을 때는 어리둥절했겠지. 그러다가 ‘내가 여기서 뭘 얻으려고 남아서 사람들을 가르치다 이런 처지가 됐을까’라는 생각을 했을 거고, 그 다음엔 이 일이 일어난 원인을 찾으려고 할 것 같았다. 시간이 어느 정도 지나고 난 후에는 결국 테러리스트들이 하는 행동이 우리 미국인들이 했던 행동과 뭐가 다를까, 라는 생각도 했을 것이고. 이런 비극은 지금 어디서든 일어나고 있으니까. 또 어떤 순간에는 살고 싶다고 발악도 했을 것이고, 어느 날은 부인이 보고 싶어서 펑펑 울기도 했을 거고. 정말 인간이 겪었을 모든 감정을 다 겪었을 것 같다. 그런데 굉장히 흥미로운 것이, 마이클은 이렇게 갇혀 있는 좁은 공간 속에서 굉장히 큰 생각들을 많이 한다. 우주, 온 세상을 다 하나하나 생각으로 만진다. 그런 것들이 잘 전달돼야 할 것 같다.
Q 굳이 비교하자면, 이번 작업이 다른 작품들보다 특별히 힘든 것인가.
그렇다. 너무 어렵다. 사실 작품별로 힘든 정도를 가늠하기 어렵지만, 이번에는 (인물에) 접근하기가 너무 힘들었고 지금도 헤매고 있다. 어떻게든 공연 전까지는 해결을 해야겠지. 극중 장면 사이사이에 시간의 변화가 있는데, 그게 참 힘들더라. 납치된 지 얼마 안 됐을 때, 1년이 지났을 무렵, 3년이 지났을 때…이렇게 시간이 흘러가는데, 2시간이라는 물리적인 시간 안에 3년이라는 시간의 변화를 어떻게 드러낼 것인가가 가장 큰 숙제다. 다른 배우들과 호흡을 주고받으며 드라마를 쌓아가는 것이 아니라 조명이 켜지면 이미 감정이 100만큼 차 있는 상태에서 시작해야 하는 거다. 나뿐 아니라 모든 배우들이 힘들어하는 부분 같다. 그리고 눈을 가리고 연기하니 처음엔 뭘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겠더라. 다른 분들의 호흡을 느끼며 반응하고 연기해야 하는데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온전히 내 머릿속에서만 이뤄지니까. 눈이라는 게 연기를 하는데 이렇게 큰 도움이 되는지를 가리고 나서야 알게 됐다.
Q 미국인에게 일어난 테러 사건을 다룬 이 연극이 2016년 한국 관객에게는 어떤 작품이 될 수 있을까.
아까도 말했듯, 이 작품은 정말 다양한 시선으로 볼 수 있는 작품이다. 사랑 이야기로 볼 수도 있고, 사회적인 메시지로 받아들일 수도 있다. 대사를 곱씹을수록 텍스트가 주는 것이 참 많은, 문학적인 작품이기도 하고. 이 희곡을 쓴 작가가 "정말 좋은 희곡에는 유통기한이 없다"고 말했다고 한다. 근데 정말 놀라웠던 것이, 1988년도에 쓰인 작품인데도 전혀 올드하게 느껴지거나 이질감이 들지 않는다. 200년 후에도 그럴 것 같다. 끊임없이 벌어질 일들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고, 그만큼 본질적이고 보편적인 이야기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어떤 무리에 희생된 사람, 그 희생자를 기다리는 사람, 또 그들을 둘러싼 사람들의 이야기. 그게 이 희곡의 가장 큰 힘인 것 같다.
Q 연극을 하며 힘든 것들이 쌓이면 어떻게 푸는 편인가.
푸는 것이 아니라 고통스러워 하면서 동시에 그 고통을 적당히 즐긴다. 어느 인물을 연기하면서 심신이 피폐해지고 하는 것들이 단순히 그냥 괴로움의 형태로 남지는 않는다. 굉장히 즐겁기도 하다. 그래서 이 일을 계속 하고 싶고, 일을 쉬면 또 하고 싶어지는 괴로움과 즐거움이 공존하는 것 같다. 마치 뭉친 어깨를 주무르면 아프면서 시원한 것처럼. 예전에는 (연기가) 삶의 많은 부분까지 침투했다. 그런데 그렇게 계속 해보니까 마냥 행복하지 않더라. 그래서 요즘은 거리를 좀 두고 있다. 불행한 인물을 연기하더라도 내가 일상 속에서 나 자신을 컨트롤할 수 있는 선에서 그 인물들을 표현할 때 관객 분들에게도 선명하게 전달할 수 있는 것이지, 내가 지쳐버리면 관객 분들도 지치실 것 같다.
Q 그렇게 생각을 바꾸게 된 특별한 계기가 있었나.
특별한 계기는 없었고, 그냥 많이 지쳤던 것 같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 때가 있지 않나. 마이클도 그랬을 것 같다. '내가 왜, 무엇을 얻으려고 여기 남아 있었을까, 나는 위대한 사람이야, 이 분쟁지역에서 의미 있는 일을 하고 있다는 생각에 도취됐던 것은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을 것 같다. 나도 그랬던 것 같다. ‘내가 나에게 취한 걸까? 왜 이렇게 비틀거리고 있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잠도 잘 못 잤고, 생각도 많았고, 연습실을 오가는 버스나 지하철에서도 항상 그(연기) 생각만 하다 보니까 주위 사람들이 넌 왜 항상 어둡냐고 하더라. 그러다 보니 정작 내게 소중한 사람들을 소중히 여기지 못하고 있었고. 단적으로 집에 돌아가면 어머니의 얼굴을 보는 것이 아니라 내 생각에만 빠져 있으니까. 사실은 그것보다 어머니의 표정이 어떤지, 흰 머리가 얼만큼 자랐는지 보고 느끼는 것이 좋은 배우가 되는 데에도 더 중요한 것들인데.
그런데 모든 것들에 일장일단이 있듯이, 그렇게 바뀌고 나니 안 좋은 것도 있더라(웃음). 예전에는 내가 생각하는 수준까지 빨리 인물을 만들어놓고 다지기에 들어갔다면, 요즘은 인물을 만들어가는데 시간이 더 오래 걸리는 것 같다.
Q <사회의 기둥들><나는 형제다>등 사회적인 메시지를 담은 공연에 많이 출연했다. 평소에도 사회, 정치 이슈에 관심이 많은 편인지.
옳고 그름이 선명히 눈앞에 그려지는 것들에 대해서는 많은 관심을 갖고 있다. 내가 살아가며 와 닿는 문제들, 닥쳐오는 일들에 대해서는. 아무래도 연극은 시의성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물론 모든 연극이 그래야 할 필요는 없다. 기분이 안 좋을 때 보고 기분이 좋아지는 연극이라면, 그것만큼 좋은 연극이 어디 있겠나. 그런 프로덕션도 있고 또 다른 다양한 색깔의 프로덕션이 있겠지만, 내가 하고 싶은 것은 그래도 사회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는 연극이다. 조금이라도 생각할 거리를 던져줄 수 있고, 또 그것을 통해서 관객과 소통할 수 있는 연극을 하고 싶다.
Q 공채탤런트(KBS 21기)출신인데 연극에 연이어 출연해왔고, 연극 무대에 대한 애정도 많이 표현해왔다. 연극하며 가장 행복한 순간은 언제인가.
연극만큼 인간을, 사람을 탐구하는 일은 없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연극이 좋다. 그리고 그건 결국 나를 탐구하는 일이다. 연극 속에 나오는 인물들, 그 작품이 갖고 있는 메시지를 하나하나 공부하고 알아가다 보면 인간에 대해서 조금 더 객관적으로 바라보게 되는 것 같다. 그 인물에 도취하는 것이 아니라, 조금 떨어져서 그 인물을 바라보고 생각하다 보면 작품이 끝날 때마다 그 인간들이 하나하나 남는 것 같다. 그런 것들이 연극을 하며 많이 충족되는 것 같다. 그렇다고 내가 더 나은 인간이 되어간다고 말할 수는 없는 것 같다. (연극을) 하면서 고집도 많이 생겼고, 어떤 부분에서는 유해지는 부분도 있고. 좋아지는 것도 나빠지는 것도 있다. 왜 여행을 가면 여러가지 감정들이 와서 부딪히지 않나. 연극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백 번 생각하고 공부하는 것보다 여행지에서 문득 느껴지는 것들이 더 와 닿을 때가 있는 것처럼, 한 작품 작품이 각각의 여행지처럼 많은 것들을 생각하게 해준다.
Q 이후의 계획은.
나는 원래 굉장히 계획적인 사람인데, 이 직업을 가지면서 계획적일 수가 없게 되는 부분이 많다(웃음). 내 대사 중에 그런 말이 있다. "미래에 어떻게 될지 누가 알겠어"라는. 정말 그런 것 같다. 사실 누구나 많이 하는 말이지만, 이 작품을 할 때처럼 그 말이 이렇게 깊이 와 닿았던 적은 없었다. 정말 미래에 어떻게 될지 누가 알겠나. 그렇다면 지금 이 순간, 카페에 앉아 인터뷰를 하는 동안 지나가는 사람들이 내게 주는 이미지들, 불어오는 바람이 주는 느낌들, 이런 것들을 매 순간 충실히 느끼면서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감사해하면서. 이 작품을 하면서 그런 생각을 많이 했다. 많은 것들이 빨리 지나간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라 내가 그것들을 빨리 지나치며 살고 있었더라. 그러다 보니 정작 봐야할 것들도 못 보고 산 것 같고. 그래서 다른 분들도 그런 생각을 하며 돌아가셨으면 좋겠다. 주변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들을 많이 느끼며 하루하루를 보내셨으면 좋겠다.
글 : 박인아 기자(매거진 플레이디비 iapark@interpark.com)
사진 : 김윤희(www.alstudi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