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콩집 이야기

by 인터파크 북DB

소를 몰고 '새샘거리'로 향했다. 짙푸른 소나무 그늘이 시원한 데다, 둠벙이 바로 옆에 있어서 아이들이 곧잘 모이던 곳. 초등학교 시절. 태민은 가끔 이곳에서 미역을 감곤 했었다. 헤엄을 칠 줄 몰라 얕은 곳에서만 첨벙대던 일, 둠벙가에 지천으로 널려있는 개구리, 아이들의 소리에 놀라 후닥닥 튀어가던 물방개, 논두렁으로 스르르 기어 나와 여자아이들을 혼비백산케 했던 꽃뱀, 수면 위로 미끄러지던 물뱀.

고추 끝자락에 줄줄 흐르는 물을 달고 둠벙 밖으로 걸어 나올 때면, 귀가 멍멍해지곤 했었다. 세상 소리가 궁금하여 모래밭에 드러누웠고, 햇볕에 달구어진 조약돌을 귀에 갖다 대었다. 간혹 너무 뜨거워 귓불을 덴 적도 있었지만, 서서히 물이 빠져나오다가, '폭' 하는 경쾌한 음향과 함께 소리가 틔어질 때의 그 쾌감이란. 바람이 상쾌한 소나무 그늘에 앉아 고누를 두기도 하고, '낫치기'도 했었다. 금을 그어놓고 낫을 던져 상대의 낫을 쓰러뜨릴 경우, 그가 베어온 쇠풀까지 몽땅 빼앗아오는 '낫치기', 그것은 정말 가슴 떨리는 도박이 아닐 수 없었다.

"야! 오늘 저녁, 쩌그 밑에 수박밭에나 한번 가 보끄나?"

벌거숭이 몸을 막 모래밭에 뉘인 아이들, 너무나 평안하고 행복한 가슴에 또다시 태준이 불을 지른다. 당연히 욕망은 꿈틀대기 시작한다.

하지만 염전 동네 지수네 밭이라는 말에 꽉 숨이 막혔다. 그라면 울던 아이도 울음을 그칠 만큼, 악명을 떨치는 인간이 아니던가. 늘 수사 대상이었던 그를 순경들이 붙잡으러 다니는 일은 다반사, 하지만 오히려 그와 부딪히지 않기를 포졸들조차 간절히 원하였다니. 딱히 무슨 무예를 익힌 것도 아니고 몸이 특별하게 단련된 것도 아닌데, 옥죄어오는 포위망을 뚫고 순식간에 종적을 감출 때의 그 신출귀몰함은 보는 사람의 혀를 내두르게 했다. 굳이 평가한다면, 비상한 후각과 날쌘 동작의 소유자라고나 할 정도인데. 여기에 그의 포악한 성격, 거칠고 우악스러운 기질이 모두를 공포로 몰아갔고, 역설적으로 이것이 그의 도주를 용이하게 했을 수도 있었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누구보다 그를 가장 두려워하는 부류는 바로 여자들. 일단 눈에 들어왔다 하면 처녀이건 유부녀이건, 어린 소녀이건 할머니이건 가리지 않았다. 어느 날, 우거진 솔밭 한가운데에서 그는 하교 길의 초등학교 5학년짜리 여자아이를 붙잡았다. 겁에 질려 벌벌 떠는 아이를, 그는 솔밭 은밀한 곳으로 끌고 갔다. 새파랗게 질린 아이를 넘어뜨린 다음, 팔뚝만 한 '거시기'를 여린 몸속에 집어넣었다. 아이는 고통 가운데 울부짖었고, 그는 숨을 헐떡거리며 욕정을 채웠다. 그리고 실신한 아이를 내버려둔 채, 떠나갔다.

해 질 녘. 마침 옆을 지나던 사람의 눈에 뜨인 아이는, 등에 업혀 집으로 돌아왔고. 처절하게 찢겨져 나간 몸뚱이 앞에서, 그 어미는 넋을 잃고 말았다. 날이 밝기가 무섭게 지서에 정식 고발장을 접수시켰지만, 어쩐 일인지 그 사건은 유야무야되고 말았다.

그 일이 있고 얼마 되지 않은 어느 날 자정 무렵. 그는 동네의 과부 집으로 쳐들어갔다. 그의 눈은 벌겋게 달아올랐고, 목소리는 한 오라기 양심인 양 가늘게 떨었다. 뻗쳐오는 악마의 손길을 피하다 보니, 과부는 어느새 구석 쪽으로 내몰리고 말았다. 막다른 골목으로 쥐를 몰아간 고양이마냥 그는 발버둥치는 수절 과부의 입을 틀어막은 채, 기어코 욕정을 채웠다. 그 순결한 육신을 우둑우둑 씹어 살과 뼈를 남김없이, 다 제 입에 쳐 넣고 말았던 것이다. 그럼에도 이 사건은 여자 쪽에서 쉬쉬하는 통에 그냥 묻혀버릴 뻔하였다.

그러나 헤집어진 살 가운데에, 부러진 뼈 속에 하나의 생명이 잉태되었다. '잘못된 만남'의 잉여물이 뱃속에서 점점 몸집을 불려왔던 것. 그럼에도 여자는 발만 동동 구를 뿐, 달리 손을 쓰지 못했다. 감히 누구에게 발설할 처지도 못 되었거니와, 의료 시설마저 변변치 않았던 환경 속에서 냉가슴 앓듯 혼자 속을 태웠다. 몇 달 사이에 완연히 걷는 폼이 달라졌고, 마침내 눈치를 챈 주위 사람들의 권유에 의해 그녀는 읍내 병원에서 수술을 받을 수 있었다. 그것으로 사건 종결.

이후. 사방 근처의 여자들은 그의 그림자만 보아도 벌벌 떨었고, 화장한 얼굴이 그에게 보이지 않도록 각별히 조심하였다. 아예 야수(野獸)의 눈에 뜨이지 않는 것이 상책이다 싶어, 해가 떨어지면 문밖출입을 삼갔다. 그러므로 그의 밭을 습격하자는 것은 '잠자는 사자의 코털을 건드리는 일'과 다름이 없었다.


'재수 없이 걸렸다 하면, 뼈도 못 추릴 판인데...'

하고 많은 중에 하필 그 사람 밭을 서리해야 할 필요가 있을까? 부득부득 고집을 피우는 태준의 맘속에 '수박'이 아니라, '그 사람'을 먹고 싶은 욕망이 도사리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감히 누구도 꿈꾸지 못할 모험을 감행함으로써 최상의 스릴을 만끽하고, '짐승'의 심장에 칼을 꽂고 싶어 하는지도 모른다!

"그 새끼가 여자들 거시기 따먹으나, 내가 지 수박 따먹으나 피장파장이지야."

회심의 미소. 역시 그랬구나. 불안감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태민의 마음속에도 악마를 닮은 호기심이 일었다. 물론 돌아가는 판세로 보아, 달리 도망갈 구석도 없었다.

밭 앞에 이르렀을 때, 태준은 망설이는 기색도 없이, 성큼 둑 아래로 내려섰다. 태민과 석형, 기출은 아카시아 나무 그늘에 몸을 숨겼다. 얼마쯤 지났을까. 교교히 흐르는 달빛 저 멀리에서 두런거리는 소리가 나타났다. 셋은 둑 아래쪽에 몸을 바짝 숨겼고, 밭 가운데 엎드린 태준은 죽은 듯 꼼짝도 하지 않았다. 초저녁 펼쳐놓은 그물을 보러 칠산 바다에 나갔던 사람들은 스스로의 대화에 취한 채, 악동들 머리 위를 스쳐 지나갔다.

어느새 장승처럼 우뚝 서 있는 태준을 확인하고, 셋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밭 가운데로 뛰어들었다. 오강만 한 수박들이 발길에 채였다. 하나를 들어 올리려 하는데 꿈쩍도 하지 않았다. 한쪽 발로 줄기를 밟은 다음, 힘껏 잡아당겼다. 그리고 누군가에게 복수하듯, 주먹을 들어 냅다 갈겼다. 지독한 통증만 손으로 전달되어 올 뿐, 상대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이 자식이 주인을 닮았나, 독하긴 왜 이리 독해?’

이번에는 작은 몸통을 골랐다. 널따란 마당을 횃불로 밝히며 '당수' 시범을 보이던 동네 형들을 상상하며, 힘을 모아 내리쳤다. 와사삭 소리와 함께, 그제야 수박은 속내를 내보인다. 한 조각 입에 무는 순간, 파릇파릇한 냄새가 코를 덮쳤다. 단맛은 덜했으나, 수량이 풍부하여 갈증을 달래주는 데에는 제격. 아마 무라리 일대에서 이 맛을 본 사람은 우리뿐이리라. 훔쳐 먹는 사과가 더 맛있다고 했지. 주렁주렁 달린 훈장처럼 두어 통을 가슴에 안은 채, 뚜벅뚜벅 걸어 나왔다.

언덕에 기대어 '서리'의 맛을 음미하는 사이, 또다시 인기척이 들려왔다. 염전 쪽에서 신작로를 따라 다가오는 군상들이 달빛 아래 선연히 드러났다. 엉거주춤하고 있는 사이. 사람들은 어느새 언덕 위, 코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엉겁결에 납작 엎드렸다. 머리 위로 지나가는 남정네들의 굵은 목소리.

"그나저나 칠산 바닥에도 무장 괴기가 줄어드니, 큰 일이시."

"누가 아니락 헌가? 인자 이 짓 꺼리도 못해 먹을란 갑네야."

아카시아 나무 사이로 다리를 세어 보았다. 하나, 둘, 셋, 넷!.......... 그때 꿈결처럼 '히히' 하며, 뛰쳐나가는 한 녀석이 있었다. 기출. 제지하고 어쩌고 할 겨를도 없이, 녀석은 벌써 저만큼 달아나 있었다. 놀란 쪽은 도리어 바작을 짊어진 남정네들. 태민은 어찌할 바를 몰라 정신이 아득했다.

'에라이! 모르겠다.'

그것은 지극히 짧은 찰나, 전광석화와 같은 순간의 선택이었다. 녀석의 꽁무니를 향해 힘껏 내달리는 스스로의 몸을 발견했고, 머릿속에는 오직 '잡히면 끝장!'이라는 두려움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러나 아무리 달려도 제자리걸음 하고 있다는 느낌. 두 다리는 허공에 매달린 채, 팔만 앞뒤로 휘젓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스쳐가는 소나무들을 일부러 세어보며, '공간적 이동'을 실감하려 애썼다. 돌부리에 걸려 넘어질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때문에, 발을 동동 치켜들며 뛰었다. 한참을 달리다 보니, 궁금하여 견딜 수 없는 사항들.

'아직도 그들이 쫓아오고 있는가? 태준과 석형은 어찌되었는가?'

그렇다고 뒤를 돌아볼 계제도 아니었다. 누군가의 손이 뒷덜미를 낚아챌 것 같아, 마냥 앞만 보고 달렸다. 바람에 무슨 소리가 들리는 것도 같았다. 하지만 들은 체 만 체 하고 또 달렸다.

"아따! 거그 조까 있어 보란 게."

또렷해진 목소리에 정신을 차리고 돌아보니, 기출. 어느새 그 웬수 같은 녀석마저 추월해 버렸던 것이다. 조금은 계면쩍은 심정으로 뒤돌아서 다가가자, 녀석은 배를 움켜쥔 채 깔깔거렸다.

"자네도 징허네 이. 문 탐박질을 고로코 잘 헌단가?"

"개 같은 놈. 너 땜에 함바트라먼 몽땅 잡힐 빤 봤지 않냐?"

태민은 부러 과장된 몸짓을 보였다. 스스로의 소심함을 숨기기 위해.

"헤헤헤! 미안허시. 고노모 웃음이 방정이란 말이시."

그때 밭쪽에서 들려오는 발자국 소리. 태준이 수박을 한입 베어 문 채, 유유히 걸어오고 있었다.

"미런 천치 같은 놈들. 문 좇 났다고 탐박질 허냐? 덩쿨 속에 카마이 엎드러 있으먼, 누가 알간 디?"

역시 영도자(領導者)의 지략과 배포는 ‘똘만이들’의 그것과는 차원이 달랐다. 그는 셋을 끌고, 다시 밭으로 들어갔다. 성폭행하듯 욕망을 흠뻑 채운 다음. 배를 두드리고 숨을 씩씩거리며 둠벙으로 달려갈 때, 하늘에서 달이 웃고 있었다.


by 강성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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