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콩집 이야기

by 인터파크 북DB

대답은 없었다. 가타부타 말도 없이 천천히 몸을 일으키는 그녀를 바라보는 동안, 생각이 분주해졌다. 만남 자체를 거절한다는 뜻인가, 아니면 '기간'을 정해 만나자는 말이 맘에 들지 않는다는 뜻일까? 혹은 좀 더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다는 뜻일까?

‘어떻든 다음을 기약해 두는 것이 급선무다. 약속을 분명히 하든지, 아니면 뭔가 흔적이라도 남겨야 한다. 키스를 감행해 볼까?’

그녀에게 다가갔다. 머리칼을 향해 뻗던 손을, 그러나 거두고 말았다. 무심한 듯 바라보는 눈동자가 그 손을 심히 부끄럽게 만들었던 것이다.

'맞아. 난 보통 사람들과 달라야 해. 평범해선 안 된다. 지금까지도 울퉁불퉁 살아온 인생인데, 사랑 또한 특이하게 해 봐야지. 흔하고도 흔한, 그런 사랑 말고. 순수한 사랑, 그것을 해 보고 싶다!'

어느 영화의 주인공처럼, 두 손을 호주머니에 넣으며 최대한 건조한 음성을 토해냈다.

“내일 나와 주겠어? 오늘 만났던 시간에... 이곳으로 말이야."

".........."

역시 침묵. 하지만 이제부터 그녀의 침묵은 긍정이다! 적어도 나에게는. 태민은 자신을 향한 그녀의 눈빛 속에서 '전혀 새로운 삶'이 스스로에게 시작되었음을 감지했다. 동쪽하늘에 긴 꼬리를 그으며, 유성이 어디론가 낙하하고 있었다.

'동네 어른들은 별이 떨어질 때마다, 누군가 한 사람이 세상을 떠난다고 했었지. 사랑이 움터나는 곳의 맞은편에 죽음이 찾아든다는 사실, 그것은 실로 아이러니가 아닌가?'

하지만 죽음이 있기에, 살아있는 것들은 더욱 아름다울 수 있거늘. 오늘밤 나를 둘러싼 이 모든 것들이 아름답게 느껴지는 까닭은... 내 청춘이 살아나고 있기 때문이다. 삶의 마지막 순간을 태우는 저 유성처럼, 나 역시 이 여자를 위해 나의 모든 것을 불살라야 한다.

‘하늘의 달과 별, 구름은 오직 이 순간을 위해 스스로의 자리를 지키고 있다. 발에 채는 돌멩이 하나, 담 밑에 피어난 한 송이 꽃도 우리의 만남을 위해 준비된 장식품이고, 우뚝 솟아있는 전봇대와 그 옆구리에 달린 채 졸고 있는 가로등 역시 이제야 무대장치로서의 의미를 갖는구나. 스쳐가는 바람은 우리 둘의 앞날을 축복하기 위한 환호성이며, 길손의 발자국 소리에 놀라 짖어대는 저 똥개 역시 이 밤의 연출을 위해 동원된 소품이거늘. 그래. 세상은 이렇게도 아름다운 것을, 누가 인생을 슬프다고 했는가? 그 누가 삶을 고통이라 말했는가?’

자신의 존재가 오늘처럼 귀하게 여겨진 적은 없었다. 누군가에게 하나의 의미로 다가갈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경이로웠다.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봄부터 소쩍새는 그렇게 울었나 보다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천둥은 먹구름 속에서 또 그렇게 울었나 보다그립고 아쉬움에 가슴 조이던머언 먼 젊음의 뒤안길에서인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내 누님같이 생긴 꽃이여노오란 네 꽃잎이 피려고간밤엔 무서리가 저리 내리고내게는 잠도 오지 않았나 보다'

책 속의 활자로만 읽었던 시에 뼈가 생기고, 살이 붙고, 피가 돌았다. 너부러져 있던 언어가 오롯이 살아 꿈틀대고 있었다.

'맞아. 바로 오늘을 위해 난 그토록 먼 길을 돌았구나. 입시에 낙방할 때마다, 열등감과 패배감에 허덕일 때마다, 삶의 의미를 몰라 방황할 때마다 늘 궁금했던 내 존재의 의미가 바로 오늘 이 지점에 있었구나. 더하지도 덜하지도 말고, 꼭 오늘밤만 같기를. 내 인생이 지금처럼만 이어질 수 있다면. 아! 오늘밤은 그 누구라도 사랑할 수 있을 것 같다. 나의 가혹한 운명마저 용서할 수 있을 것 같다.'

거울 앞에서 머리카락에 묻어있는 밤이슬을 털어낸 다음, 나무계단을 타고 지하 방으로 내려갔다. 저항하는 젊음에게 던져진 듯, 트랜지스터라디오가 한쪽 구석에 박혀 있었다. 검정 고무줄에 칭칭 감긴, 건전지 묶음을 배에 단 채.

태민에게 라디오는 기껏 공부를 방해하는 소음덩이에 불과했다. 그것을 소유해 본 적도, 관심을 가져 본 적도 없었다. 뉴스를 들을 필요도 없었고, 가요나 팝송을 좋아하는 것도 아니었다. 사춘기 아이들의 가슴을 흔들어 놓는, 간사하고도 음탕한(?) 목소리의 디제이들을 차라리 경멸하는 편이었다. 그러나 오늘밤은 다가오는 느낌이 달랐다. 한껏 볼륨을 키웠다. 이내 절규하는 목소리.

'모두들 잠들은 고요한 이 밤에어이해 나 홀로 잠 못 이루나넘기는 책 속에 수많은 글들이어이해 한 자도 보이지 않나그건 너, 그건 너, 바로 너 때문이야'


대답은 없었다. 가타부타 말도 없이 천천히 몸을 일으키는 그녀를 바라보는 동안, 생각이 분주해졌다. 만남 자체를 거절한다는 뜻인가, 아니면 '기간'을 정해 만나자는 말이 맘에 들지 않는다는 뜻일까? 혹은 좀 더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다는 뜻일까?

‘어떻든 다음을 기약해 두는 것이 급선무다. 약속을 분명히 하든지, 아니면 뭔가 흔적이라도 남겨야 한다. 키스를 감행해 볼까?’

그녀에게 다가갔다. 머리칼을 향해 뻗던 손을, 그러나 거두고 말았다. 무심한 듯 바라보는 눈동자가 그 손을 심히 부끄럽게 만들었던 것이다.

'맞아. 난 보통 사람들과 달라야 해. 평범해선 안 된다. 지금까지도 울퉁불퉁 살아온 인생인데, 사랑 또한 특이하게 해 봐야지. 흔하고도 흔한, 그런 사랑 말고. 순수한 사랑, 그것을 해 보고 싶다!'

어느 영화의 주인공처럼, 두 손을 호주머니에 넣으며 최대한 건조한 음성을 토해냈다.

“내일 나와 주겠어? 오늘 만났던 시간에... 이곳으로 말이야."

".........."

역시 침묵. 하지만 이제부터 그녀의 침묵은 긍정이다! 적어도 나에게는. 태민은 자신을 향한 그녀의 눈빛 속에서 '전혀 새로운 삶'이 스스로에게 시작되었음을 감지했다. 동쪽하늘에 긴 꼬리를 그으며, 유성이 어디론가 낙하하고 있었다.

'동네 어른들은 별이 떨어질 때마다, 누군가 한 사람이 세상을 떠난다고 했었지. 사랑이 움터나는 곳의 맞은편에 죽음이 찾아든다는 사실, 그것은 실로 아이러니가 아닌가?'

하지만 죽음이 있기에, 살아있는 것들은 더욱 아름다울 수 있거늘. 오늘밤 나를 둘러싼 이 모든 것들이 아름답게 느껴지는 까닭은... 내 청춘이 살아나고 있기 때문이다. 삶의 마지막 순간을 태우는 저 유성처럼, 나 역시 이 여자를 위해 나의 모든 것을 불살라야 한다.

‘하늘의 달과 별, 구름은 오직 이 순간을 위해 스스로의 자리를 지키고 있다. 발에 채는 돌멩이 하나, 담 밑에 피어난 한 송이 꽃도 우리의 만남을 위해 준비된 장식품이고, 우뚝 솟아있는 전봇대와 그 옆구리에 달린 채 졸고 있는 가로등 역시 이제야 무대장치로서의 의미를 갖는구나. 스쳐가는 바람은 우리 둘의 앞날을 축복하기 위한 환호성이며, 길손의 발자국 소리에 놀라 짖어대는 저 똥개 역시 이 밤의 연출을 위해 동원된 소품이거늘. 그래. 세상은 이렇게도 아름다운 것을, 누가 인생을 슬프다고 했는가? 그 누가 삶을 고통이라 말했는가?’

자신의 존재가 오늘처럼 귀하게 여겨진 적은 없었다. 누군가에게 하나의 의미로 다가갈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경이로웠다.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봄부터 소쩍새는 그렇게 울었나 보다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천둥은 먹구름 속에서 또 그렇게 울었나 보다그립고 아쉬움에 가슴 조이던머언 먼 젊음의 뒤안길에서인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내 누님같이 생긴 꽃이여노오란 네 꽃잎이 피려고간밤엔 무서리가 저리 내리고내게는 잠도 오지 않았나 보다'

책 속의 활자로만 읽었던 시에 뼈가 생기고, 살이 붙고, 피가 돌았다. 너부러져 있던 언어가 오롯이 살아 꿈틀대고 있었다.

'맞아. 바로 오늘을 위해 난 그토록 먼 길을 돌았구나. 입시에 낙방할 때마다, 열등감과 패배감에 허덕일 때마다, 삶의 의미를 몰라 방황할 때마다 늘 궁금했던 내 존재의 의미가 바로 오늘 이 지점에 있었구나. 더하지도 덜하지도 말고, 꼭 오늘밤만 같기를. 내 인생이 지금처럼만 이어질 수 있다면. 아! 오늘밤은 그 누구라도 사랑할 수 있을 것 같다. 나의 가혹한 운명마저 용서할 수 있을 것 같다.'

거울 앞에서 머리카락에 묻어있는 밤이슬을 털어낸 다음, 나무계단을 타고 지하 방으로 내려갔다. 저항하는 젊음에게 던져진 듯, 트랜지스터라디오가 한쪽 구석에 박혀 있었다. 검정 고무줄에 칭칭 감긴, 건전지 묶음을 배에 단 채.

태민에게 라디오는 기껏 공부를 방해하는 소음덩이에 불과했다. 그것을 소유해 본 적도, 관심을 가져 본 적도 없었다. 뉴스를 들을 필요도 없었고, 가요나 팝송을 좋아하는 것도 아니었다. 사춘기 아이들의 가슴을 흔들어 놓는, 간사하고도 음탕한(?) 목소리의 디제이들을 차라리 경멸하는 편이었다. 그러나 오늘밤은 다가오는 느낌이 달랐다. 한껏 볼륨을 키웠다. 이내 절규하는 목소리.

'모두들 잠들은 고요한 이 밤에어이해 나 홀로 잠 못 이루나넘기는 책 속에 수많은 글들이어이해 한 자도 보이지 않나그건 너, 그건 너, 바로 너 때문이야'


본래 외모에 대해서는 그다지 신경을 쓰지 않는 편이었다. 모자 차양을 높이고, 나팔바지 차림으로 여학생용 가방을 흔들고 다니는 녀석들을 볼 때마다 속으로 비웃었다. 어릿광대 같은 그들의 행태가 역겹기까지 했다. 하지만 이젠 아니다.

'이왕이면 멋스럽게, 깔끔하게 보이고 싶다는데, 그게 무슨 잘못인가? 성의 없이, 보는 사람 무시하는 듯 아무렇게나 차리고 다니는 아이들이 더 문제지. 나도 이제부터 스스로를 꾸며야 한다. 옷이나 신발에 관심을 갖자. 보기 좋을 정도로 머리칼도 기르고, 할 수만 있으면 얼굴도 좀 가꾸자.'

고지식한 공부벌레보다는 '불량 학생'이 더 인간적일 수 있다. 왜냐하면, 적어도 그들은 친구를 경쟁자로 보진 않으니까. 아무렴. 착하고 성실한 아이보다는 '문제아'가 훨씬 더 순수할 수 있어. 왜냐하면, 그들은 친구를 무시하거나 업신여기진 않으니까. 찌그러진 모자보다는 깃을 세운 모자가, 쪼글쪼글한 바지보다는 잘 다려 입은 나팔바지가 훨씬 더 멋들어지게 보이고.

이제부터 나의 잘못된 선입관, 편견을 쳐부술 필요가 있어. '꼴통들'의 빗나간 행동에 대해 관대해질 필요가 있다고. 왜냐하면, 그들보다 내가 더 틀렸을 수도 있으니까. 술을 마시는 아이의 외로움, 담배를 피우는 녀석의 고독을 너는 짐작할 수 있느냐? 부모의 만류를 뿌리치고 애인과 함께 떠나는 영화 속의 주인공을 너는 이해할 수 있느냐? 그에게 과연 너는 돌을 던질 수 있느냐? 따지고 보면, 그들은 불량아가 아니고, 불효자식도 아니다. 사랑을 위해 왕위까지 버렸다고 하는, 먼 나라 국왕 역시 정신병자가 아니다. 그야말로 사나이 중의 사나이가 아니냔 말이다. 어른들이 그어놓은 선 안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기성세대가 지어놓은 감옥에 갇혀 있어서는 안 된다. 그래 갖고는 인간의 성장도, 사회의 발전도, 인류의 진보도 없기 때문에.

방바닥에 드러누워 천장을 바라보았다.

'지금의 나는 젊음과 낭만, 사랑과 인생을 논해야 하는데, 날벼락처럼 웬 공부이고 웬 대학 입시인가? 인류의 잘못된 문화, 타락한 인간의 탐욕이 지금 우리를 지옥으로 몰고 있다. 과연 조물주가 시험 준비나 잘하라고, 공부나 열심히 하라고 우리를 만들었을까? 좋은 대학에 합격하여 일류 기업에 들어가고, 돈 많이 벌라고 과연 우리를 이 세상에 내보냈을까? 아니지. 아니야. 아! 그래서 이럴 때에는 술 한 잔 마시고, 담배 한 개비라도 피워야 하는데. 그것이 기존질서에 대한 저항일진대. 그럼에도 음주나 흡연은 절대로 안 된다? 하하. 어디 이 세상이 어른들 맘대로 돌아가는가? 수많은 젊음들이 과연 부모님 뜻대로만 살아지는가 말이다. 목 줄기를 타고 내려가는 그 감촉, 공중에서 맴도는 담배 연기가 얼마나 멋있는데... 그건 그렇고. 지금쯤 잠이 들었을까? 숲속 궁전의 침대, 그 화려한 레이스를 닮은 공주님이 말이다. 그 아름다운 분께서 혹시 나와의 오늘밤 일을 회상하고 있을지도 몰라. 그렇다면 지금 나와 같은 공기를 들이마시고 있을 테고...'

상상하는 것으로도 행복했다. 공상하는 것만으로도 황홀했다. 어쩌면 얼굴을 마주하는 것보다 이러는 편이 더 좋을지도 모르지. 왜? 공간, 시간의 제약이 없고, 주변 환경이나 조건에 신경 쓰지 않아도 되니까. 서로에게 집중할 수 있으니까. 또 무엇보다 서로로부터 거절당할 염려가 없으므로.

옆에 있는 사람처럼 존재감을 느끼기 위해, 생생한 얼굴을 그려 보기로 맘먹었다. 그러나 다가갈수록 저만치 달아나는 무지개를 닮아, 막상 그리려고 하니 머릿속이 텅 비고 말았다. 아무 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세상에! 그녀의 향기는 코끝에 와 닿고 가녀린 몸은 손에 잡힐 듯한데, 정작 얼굴은 그 윤곽조차 잡히지 않으니. 과연 오늘밤 내가 그녀를 만나기는 한 걸까? 그녀의 몸을 만져보긴 한 걸까?'

갑자기 울적해지고 말았다. 오늘은 봄 날씨처럼, 열아홉 처녀의 가슴처럼 내가 변덕스럽구나. 왜 오늘따라 이리도 감정의 기복이 심한 걸까? 아무래도 오늘밤은 일찍 자는 것이 상책일 것 같다. 그래야만 내일이 빨리 닥쳐올 것이고, 운이 좋으면 꿈속에서 그녀를 만나게 될지 모르니까. 더 이상 시간을 낭비하지 말자. 그리고 내일은 그녀의 얼굴을 찬찬히 살펴봐야겠다.


by 강성률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땅콩집 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