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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인터파크 북DB Nov 17. 2016

창신여인숙 2층 끝방, 카뮈의 추억

산골독서가의 세상읽기

                       

엄마는 창신여인숙 2층 끝방에 살았다. 방문을 열면 때에 절은 안양 남부시장의 작고 허름한 건물들이 보였다. 고층 빌딩이 별로 없던 시절이어서 여인숙 2층에서 보는 스카이라인은 꽤 괜찮았다.

 
엄마가 일하러 나가 홀로 여인숙 방을 지키던 시간은 천근만근 무료했다. 가난한 사람들이 머물다 떠난 대낮 여인숙의 고요함만큼 외롭고 쓸쓸한 것도 없다. 

여인숙의 고요한 공기를 더 견딜 수 없으면 밖으로 나갔다. 남부시장을 한바퀴 돌고, 오락실에서 오락을 하고, 백화점 1층을 떠돌다, 대로 건너편 중앙시장까지 돌고 돌아도 태양은 서쪽으로 떨어지지 않았다. 

엄마는 깊은 밤에 돌아왔다. 밥을 먹으면 여인숙의 방문을 열고 문턱에 걸터앉아 담배를 피웠다. 여기서 반짝 저기서 반짝이는 간판 불빛으로, 남부시장의 야경은 엄마의 담배 연기만큼 그런 대로 볼 만했다. 그 시절, 종일 안양 시내를 돌아다녀도 나를 알거나 내가 아는 사람은 없었다. 2층 끝방에서 보이는 세상 어디에도 내가 아는 사람은 살지 않았다. 

기억은 윤색되고 편집되기 마련이지만, 그 시절이 행복했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손님이 빠져나간 한낮 여인숙의 공기와 심심함을 사랑하는 어린아이가 이 세상이 있을까 싶다. 

살아가는 일은 참으로 묘하고, 알다가도 모를 일의 연속이다. 문득문득, 그 시절의 무료함과 심심함이 그리워질 때가 있다. 요즘 특히 그랬다. 여러 사람을 만나고, 여기저기 불러주는 곳 찾아다니며 바쁘게 살다보니 창신여인숙 2층 끝방의 공기와 여인숙 골목이 생각났다. 

한동안 서울에서 지내다 지리산 피아골로 돌아와 작고 조용한 내 방에 가만히 누워 있으니, 내가 아는 사람이 없고, 나를 알아보는 사람이 없는 시간과 공간을 많이 그리워 했다는 게 새삼 실감이 났다. 

특별하고 유별난 감정은 아니다. 인간이 낯선 곳으로 여행을 떠나는 이유 중에는 익명성의 바다에 별 생각 없이 둥둥 떠다니고 싶은 욕망이 있으니까. 

유년 시절에 잠깐 지냈던 창신여인숙 2층 끝방은 내게 어떤 영향을 줬을지 자주 생각한다. 누구나 자기만의 방과 공간에 대한 특별한 감정을 갖고 살아가니까. 지금의 자신을 있게 한 결정적 시간과 공간에 대한 여러 기억은 살아가는 내내 현실과 여러 신호를 주고받는다. 

그 신호에 예민한 반응을 보이고, 결정적 시간과 공간의 의미를 잘 해석하는 이들이 바로 글쓰는 작가들이다. 작가들에게 유년의 기억은 글쓰기의 발원지이기도 하다. 대다수의 작가들이 성장소설을 남기는 건, 과거의 기억은 한 번쯤 재해석하고 넘어가야만 하는 재도약의 발판이기 때문일 거다.

미완성 작품의 거친 매력... 대문호의 유년을 엿보다

나이 마흔넷에 노벨문학상을 탄 알베르 카뮈도 자신의 유년을 담은 성장소설을 집필했다. 하지만 카뮈는 그 책을 채 끝맺지 못했다. 노벨상 수상 3년 뒤인 1960년 카뮈는 교통사고로 사망했다. 그때 그의 가방 속에는 유년의 경험을 소설 형식으로 쓴 원고가 들어 있었다. 채 다듬어지지 않은 것이어서 그 글은 세상에 공개되지 않았다. 카뮈 사후 30년 만에 사람들 앞에 공개된 그 책의 제목은 <최초의 인간>

이야기는 마흔 살이 된 자크 코르므리가 자신의 아버지 무덤을 찾아가는 것으로 출발한다. 자크가 한 살 때 전쟁터에 나가 다시는 돌아오지 못한 아버지. 무덤 비석에 새겨진 생몰연대를 보니, 아버지는 마흔 살이 된 자크보다 11살이나 적은 어린 29살에 생을 마감했다. 자기보다 어린 아버지의 죽음 앞에서 자크는 묘한 감정을 느낀다. 

이후의 이야기는 많이 알려진 카뮈(소설 속 자크)의 유년과 그대로 겹친다. 카뮈는 아버지 없이 청각장애 앓고 말을 못하는 어머니, 외할머니 등 친척들과 함께 산다. 더없이 가난하여 카뮈는 어린시절부터 돈을 벌었다. 지긋지긋한 가난 탓에 외할머니는 카뮈가 상급학교에 진학하지 않고, 동네 ‘점방’에서 돈을 벌어오길 희망한다. 그런 가족을 설득해 카뮈가 계속 공부할 수 있도록 기회를 준 인물은 학교 선생님이다. 

불우한 유년의 삶과 중요한 순간에 기회를 주는 인물이 등장하는 과정은 사실 다소 도식화된 성장소설의 문법으로 빤하게 읽히기도 한다. 물론 <최초의 인간>에는 반짝반짝 빛을 발하는 장면들이 자주 보인다. 

특히, 듣고 말하는 것에서 장애가 있는 카뮈의 엄마가 남편의 사망 소식을 접하고 어두운 방, 깊은 침묵 속에서 아픔을 견디는 장면이 그렇다. 또 미완성 원고여서 그런지 책 중간중간에는 카뮈가 자신의 기억과 경험에 대해 격한 감정을 토하고 과도한 의미부여를 하여 독자로서 부담감이 느껴지는 대목도 보이는데, 이것이 주는 매력이 참 독특하다. ’편집 이전’ 날 것 그대로의 노벨상 작가를 보는 맛이 재밌다. 

대문호의 평범하지 않은 유년을 엿본다는 점에서 흥미있는 책이지만, 무엇보다 미완성 작품이 주는 거친 장면들이 매력적이다. 물론 카뮈가 불분명하게 쓰거나, 내용이 빠진 부분도 있어 읽기가 그리 쉽지만은 않다. 

책을 덮고 창밖의 지리산 가을 풍경을 보다가, 직접 풍경 속으로 들어가고 싶어 산책에 나섰다. 찬 공기에서 마른 잎 냄새가 났다. 숨을 깊이 들이켜며 역시 사람은 종종, 내가 아는 사람이 없고 나를 아는 사람이 없는 세상 속에서 자유를 누려야 한다고 생각하는 순간, 뒤에서 달려온 차가 내 옆에 섰다. 

"아이고, 오랜만이네! 왜 이렇게 얼굴 보기 힘들어요. (서로 주절주절 이런저런 안부 주고받기) 내일 OO씨랑 진주시로 맛있는 거 먹으러 가기로 했는데, 같이 갈래요?"

이웃 사람의 친절한 제안, 잠시 고민하다가 접었다. 한동안은 지리산의 공기만큼 맛있는 게 없을 듯싶다. 깊은 밤 조용히 방에 누워 있는데, 또 이웃에서 연락이 왔다. 

"뭐해? 소주나 한잔 하러 와요!"

절대 고독의 세상, 어디에 있는 걸까. 도대체 있기나 한 걸까? 일단 소주 한잔 마시고 찾아봐야겠다. 지리산의 밤 공기가 차다.


위 글은 인터파크 북DB 기사 [창신여인숙 2층 끝방, 카뮈의 추억]의 일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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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칼럼니스트 박상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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