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장 통제
우리는 상황을 통제하지 못할 때 느끼는 불안을 견디기 못해, 우연보다 필연을 선호합니다. 어떤 일이 우연히 일어난다면 우리는 그것을 통제할 수 없습니다. 반대로 사건을 통제하고 있다고 느끼면 그것을 우연이라 여기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상황을 통제할 수 있다는 느낌 때문에 우연을 잘 인식하지 못하거나 외면합니다.
이런 심리는 삶의 중요한 선택에서도 드러납니다. 우리는 대개 우연보다 필연을 선호해 영혼의 동반자를 만나 결혼할 것이라 믿습니다. 미국 갤럽 조사에 따르면, 미혼자의 94퍼센트는 미래 배우자가 영혼의 동반자일 것이라 확신했습니다. 하지만 외모나 성격, 관심사, 교육 수준, 유머 감각, 정치관, 종교관, 도덕관, 습관, 태도, 패션 감각, 음악 취향까지 고려하면 이상적인 상대를 만날 확률은 극히 낮습니다. 그럼에도 그런 만남이 이루어진다면, 그건 말 그대로 ‘운명’ 곧 우연의 결과입니다.
기업은 우리가 우연보다 필연을 선호하는 심리를 마케팅에 적극 활용합니다. 서점에는 성공 비법을 담은 자기계발서가 넘칩니다. ‘7명의 리더가 말하는 행복의 조건’이나 ‘직장에서 성공하는 6가지 법칙’ 같은 책이 끝없이 나옵니다. 이런 책들은 우리의 삶이 문제없이 잘 굴러가려면, 반드시 따라야 할 정해진 길이 있다고 설득합니다.
하지만 비즈니스 세계에는 수많은 사업가나 직장인이 있습니다. 그중 일부는 우연히 뛰어난 성과를 냅니다. 우리는 전체 사업가나 직장인 수를 알지 못하고, 그들 모두를 볼 수도 없습니다. 눈에 들어오는 건 오직 승자뿐입니다. 같은 혹은 더 많은 노력을 하고도 실패한 이들은 조용히 사라집니다. 이렇게 보이지 않는 실패를 간과하고 성공만으로 판단하는 오류가 바로 ‘생존 편향’(survivorship bios)입니다.
개천에서 용 난 억만장자 CEO의 성공담은 누구나 노력하면 성공할 수 있다고 속삭입니다. 하지만 이런 이야기는 운과 타이밍의 중요성을 무시한 처사입니다. 비슷한 재능을 지니고 노력했으나 성공하지 못한 다수를 외면하는 셈입니다. 우리는 승자만 보고 우연을 노력의 필연적인 결과로 착각합니다. 승자는 시장 상황이 좋았던 때, 우연히 그 자리에 있었던 사람일 수도 있습니다. 그 자리에 어울렸을지는 몰라도, 어울릴 만한 사람은 얼마든지 많았습니다.
운의 장난은 이미 헤로도토스의 『역사』(BC 440?)에서 이른바 ‘페르시아 논쟁’으로 등장합니다. 반란을 진입한 고대 페르시아의 지도자 세 명은 장차 어떤 정치체제를 도입해 제국을 이끌어나갈지 논의했습니다. 군주정과 과두정, 민주정이 제안되었고, 결론은 군주정이었습니다. 문제는 누가 왕이 될 것인가였습니다. 합의에 이르지 못하자 그들은 결정을 운명과 신에게 맡기기로 동의했습니다. 동이 튼 뒤 처음으로 우는 수말의 주인이 왕이 되기로 한 것입니다. 세 명 중 다리우스(BC550~486)는 부하에게 수말이 가장 좋아하는 암말의 생식기를 손으로 문지르게 한 뒤, 해 뜰 무렵 수말의 코에 갖다 대게 했습니다. 수말은 흥분해 울었고, 다리우스는 왕이 되었습니다. 이 일화는 권력과 성공이 능력이나 정당성보다 속임수와 우연에 크게 의존해 왔음을 보여줍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성공을 이례적인 결과로 보지 않습니다. 성공한 자들이 스스로 내적인 충동을 잘 다스렸고, 누구보다 열심히 일했다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성공의 환경이나 배경보다 자기 통제(self-control)에 호소하는 설명에 더 쉽게 설득됩니다. 그 결과 사회는 ‘모든 건 자기 하기 나름’이라는 신화를 받아들입니다. 더 똑똑하지 않거나, 더 부유하지 않거나, 더 날씬하지 않다면 노력이 부족했다는 말을 듣습니다. ‘일자리를 잃었어? 더 열심히 했어야지.’ ‘몸이 아파? 건강관리를 안 한 탓이잖아.’ ‘불행해? 그럼 우울증 약을 먹어’라고 말하는 시대입니다. 이제 우리는 ‘불운마저 불운한 자의 탓’으로 돌리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우리는 자신의 운명을 통제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하지만 인간은 과연 자신의 삶을 통제할 수 있을 만큼 자유로운 존재일까요? 우리가 통제할 수 있는 건 과연 무엇일까요? 대개 자기 통제 아래에 있다고 믿는 것들 가운데 상당수는 통제 밖에 있습니다. 부유함도, 명성도, 건강도 통제할 수 없습니다. 자신의 성공은 물론 자식의 성공도 마찬가지입니다. 삶의 대부분은 계획의 산물이 아니라 우연과 조건 위에 놓여 있습니다. 통제의 환상이 강해질수록, 실패는 더욱 잔인하게 개인의 죄가 됩니다.
윌리엄 터너 <눈보라-항구를 떠나는 증기선>(1842)
미술평론가 존 러스킨은 터너의 작품을 두고 “지금까지 본 바다 그림 중 바다의 움직임과 엷게 낀 안개, 빛을 가장 장엄하게 표현한 그림”이라 극찬했습니다.
터너는 자연의 힘에 매료되어 그 극적인 순간을 화폭에 담았습니다. 우리는 자연의 통제할 수 없는 힘에 압도되며, 자신이 얼마나 작은 존재인지 비로소 깨닫게 됩니다.
그럼에도 기업은 우연한 성공이나 실패를 조직적으로 외면하려 합니다. 실수는 무지나 무능 탓으로 돌리고, 더 많은 조사나 연구, 학습으로 나아질 수 있다고 믿습니다. 성공한 사람도 자신의 성취를 운이 아니라, 능력과 노력의 결과로 설명합니다. 우리는 전용 제트기를 타는 사람이 항공기 이코노미석을 이용하는 사람보다 더 특별한 재능을 지닌 인물이라 여기며 존경합니다. 수많은 경영학 베스트셀러는 이런 사고방식을 강화합니다.
경영학의 권위자로 알려진 피터 드러커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모든 인간 활동이 그렇듯 기업 경영도 운과 우연, 재앙의 영향을 받는다. 하지만 운으로 세워진 기업은 없다. 잠재력을 체계적으로 발견하고 이용하는 기업만 번창하고 성장한다.” 오늘날 드러커는 현대 경영 이론의 창시자이자 비즈니스계의 영적 스승으로 인용됩니다. 하지만 이 말 속에는 묘한 모순이 숨어 있습니다. 기업은 불운으로 망할 수 있지만, 번영과 발전은 오직 노력의 결과라는 것입니다.
전형적인 경영학 케이스 스터디(case study) 자료는 영웅 한 명의 성공 신화를 전면에 내세우며, 기업마다 처한 여건이 다름에도 단순히 따라 하기만 하면, 곧 벤치마킹만 하면 성공할 수 있다는 환상을 조장합니다. 문제는 이런 영웅 서사가 ‘운’이 지배하는 현실을 왜곡한다는 점입니다. 예컨대 이런 식입니다.
“카지노 기업 해라스(Harrah's)는 데이터 분석을 통해 부활한 대표 사례다. 이 이야기는 위기에 처한 기업이 데이터 분석에 능통한 리더를 새로 영입해 최고 성과를 올린 사례로 유명하다. 1998년 해라스는 하버드 대학교 경영대학원에서 서비스 경영을 가르치던 게리 러브먼 교수를 CEO로 영입했다. 그의 데이터 분석 중심 경영 덕분에 해라스는 성공적으로 성장하고, 업계 라이벌인 시저스를 인수하는 성공을 거두었다.”
이 이야기는 위기에 처한 기업이 유능한 리더 한 명 덕분에 극적으로 반전된 사례처럼 소개됩니다. 하지만 시장 환경이나 규제, 경쟁 구도 같은 수많은 외부 요인과 우연한 타이밍이 작용했을 가능성을 무시합니다.
비즈니스 세계에서는 종종 CEO가 회사의 성패를 좌우하는 초인으로 묘사됩니다. 우리는 ‘똑똑한 한 사람이 아흔아홉 명을 먹여 살린다’는 담론을 별다른 의심 없이 받아들입니다. 하지만 경영자 한 명이 기업 성과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거나, 과거 몇 번의 성공이 미래의 성공을 보장한다는 믿음은 잘못됐습니다. 누군가 말했듯, “성공은 형편없는 스승입니다. 똑똑한 사람들을 속여 자신은 절대 실패하지 않을 것이라 착각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거대 기업의 운영은 방대하고 복잡하며, 예측할 수 없는 시장의 힘에 압도됩니다. 총수의 능력과 기업 성과 사이의 인과관계는 명확하지 않습니다.
비즈니스 리더를 승자로 추앙하고 한 사람에게만 초점을 맞추는 순간, 다른 이들은 중요하지 않다는 메시지를 주게 됩니다. 스티브 잡스(1955~2011)는 비즈니스 영웅으로 기억되지만, 그의 실패작 넥스트는 거의 언급되지 않습니다. 애플에서 스티브 잡스가 거둔 성공은 우연히 함께 했던 엔지니어 스티브 워즈니악(1950~ )이나 디자이너 조나단 아이브(1967~ ), 픽사의 존 라세터(1957~ ) 같은 수많은 동료와 조력자의 기여가 있었습니다. 잡스의 성과는 결코 혼자만의 결과가 아닙니다. 우연한 만남과 적절한 시기, 그리고 유능한 다수의 협업이 만든 산물입니다. 우리는 어떤 결과의 원인을 명확히 파악하고 싶어 하도록 진화한 탓에 ‘운’의 영향을 쉽게 인정하지 못합니다.
성공한 기업이나 개인에게 ‘운’을 언급하면 종종 불쾌해하는 이유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자신의 성취에 운이 따랐다고 인정하는 순간, 노력과 능력이 깎여 보이기 때문입니다. 더 나아가 우연히 얻은 성과라면 지금의 지위나 재산을 온전히 누릴 자격이 있는지 의문이 생깁니다. 우연히 얻은 과분한 재산은 다시 우연히 누구에게든 넘어갈 수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러한 불안 때문에, 사람들은 운의 존재를 외면하려 합니다.
하지만 프랭크 타우시그(1859~1949) 같은 경제사가들의 연구에 따르면, 성공한 기업가 대부분은 가난을 딛고 근면 성실하게 일해 자수성가한 인물들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유복한 가정이나 이미 성공한 사업가 집안 출신인 경우가 많았습니다. 출발선에 이미 ‘운’이 놓여 있었습니다. 누군가의 말처럼, 그들은 3루에서 태어났지만, 자신이 3루타를 쳤다고 믿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우리는 역사책 속 승자 이야기나 위대한 CEO 자서전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서는 안 됩니다. 이미 벌어진 결과에 맞춰 원인을 재구성한 이야기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많은 성공은 탁월한 통찰이나 능력의 산물이 아니라, 단순한 ‘운’의 결과일 수도 있습니다. 패배자를 지우고 승자만 바라볼 때, 성공은 운과 무관한 필연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진실을 보려면 훨씬 더 많은 패배자를 포함한 전체를 봐야 합니다. 결국 남의 성공담을 아무리 읽어도 큰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양심 있는 역사학자나 전기 작가라면, 우연을 무시한 채 실제 사건이 예측 가능한 방향으로 전개된다고 주장하지 않을 것입니다.
페테르 파울 루벤스 <아테나와 아라크네>(1637?)
이 작품은 그리스 신화에서 베 짜기의 명수 아라크네가 자신의 솜씨가 여신 아테네보다 뛰어나다고 자만해 도전했다가 거미가 된 장면을 묘사합니다.
남다른 재능을 지닌 주인공이라도 단 한 번의 잘못으로 인생 전체가 비극으로 전락할 수 있습니다. 그 잘못이 아무리 사소해 보여도, 오랜 노력과 성취는 한순간에 무너질 수 있습니다.
이는 인간이 자신의 능력과 공로를 과신하고, 자신이 통제하지 못하는 조건과 우연을 망각할 때 어떤 파국이 찾아오는지를 보여주는 경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