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장 통제
역사책은 사건의 원인을 논리적으로 설명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세상이 우연이 아닌 필연적인 인과관계로 움직인다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의 진주만 폭격은 미국의 석유 수출 금지 조치 때문이라고 설명됩니다. 이 조치는 일본의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점령에 대한 미국의 대응으로 풀이됩니다. 일본의 인도차이나 점령은 다시 프랑스가 나치 독일에 패배했기 때문이거나, 일본이 중국 정복에 실패한 결과로 연결됩니다. 이 모든 배경은 1930년대 군국주의에서 비롯됐으며, 군국주의는 대공황이나 제1차 세계대전 후 패전국에 가해진 과도한 요구 탓으로 설명됩니다.
하지만 실제 역사에서 사건의 원인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습니다. 국제정치는 수많은 변수가 얽혀 있으며, 여러 변화가 동시에 일어나 사건은 흔히 ‘과대 결정’(overdetermined)됩니다. 즉, 원인이 지나치게 많습니다. 철학자 루이 알튀세르는 역사가 중층(重層)적으로 결정된다고 보았습니다. 한 사건에는 경제적, 사회적, 문화적, 정치적인 요인이 다양하게 얽혀 있어, 특정 핵심 원인을 단정하기 어렵습니다.
“역사적인 사건의 원인을 단정할 권능은 누구에도 없다. 따라서 역사에 작용하는 요인이 무엇인지는 스스로 판단할 수밖에 없다. 그런 판단이 바로 우리의 이데올로기를 만든다. 역사에 관한 이론은 개인들이 스스로 고안해 내는 것이다. 그럴 수밖에 없다. 경험적이고 합리적으로 논증할 여지가 없기 때문이다.”
정치철학자 마루야마 마사오(1914~96)는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도쿄 전범재판이 진행되던 시기에 쓴 유명한 글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전쟁 내내 연합군은 일본이 세계 최강국들과 대규모 전쟁을 의도적으로 시작한 걸 보면, 일본이 합리적인 예측과 조직, 계획을 갖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진실을 알게 될수록 연합군이 경악한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마루야에 따르면 그 진실은 다음과 같습니다.
“일본에서 최고 권력을 가진 자들은 실은 부하들에 조종당하는 로봇에 불과했다. 부하들은 다시 해외에 주둔한 장교들과, 군부와 얽혀 있는 극우 로닌(주인 없는 사무라이)이나 무뢰배들에 의해 휘둘리고 있었다. 명목상의 지도자들은 법 바깥에서 움직이는 익명의 세력이 미리 짜놓은 시나리오를 숨 헐떡이며 따라가기에 항상 급급했을 뿐이다.”
종전 후 미국을 비롯한 연합국은 태평양전쟁의 근본 원인을 규명하고, 일본 내부에서 누구에게 책임을 물러야 하는지 밝히고자 했습니다. 그들은 히틀러나 나치처럼, 일본에도 전쟁을 주도한 특정 개인이아 집단이 있을 것이라 예상했습니다. 하지만 일본이 승산 없는 전쟁을 일으킨 배경에는 권력이 특정 세력에게 집중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통제 불가능한 우연과 상황의 흐름이 권력을 밀어낸 측면이 더 컸습니다.
제1차 세계대전의 발발 역시 우연의 산물이었습니다. 당시 유럽인 누구도 세계에서 가장 문명화된 유럽에서 그렇게 야만적인 전쟁이 일어나리라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그 이전 19세기 내내 유럽은 전쟁이 드물고, 있다 해도 짧은 국지전에 그쳤습니다. 유럽의 어느 정부도 전면전을 원하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유럽은 전쟁으로 치달았습니다. 그 우연한 요인 중 하나는 유럽이 두 개의 적대 동맹으로 나뉘어 융통성을 발휘하기 어려웠기 때문입니다. 동맹 간 싸움에서 발을 빼면 관계가 틀어지고, 유사시 도움을 받지 못할 위험이 있었습니다. 독일이 세르비아에 맞서 오스트리아를 지원한 이유도 세르비아나 발칸 반도 자체가 중요해서가 아니었습니다. 독일이 삼국협상(프랑스와 러시아, 영국)에 대항해 의지할 유일한 동맹국이 오스트리아였기 때문입니다. 프랑스 역시 독일과의 충돌에 대비해 러시아의 신뢰를 얻고자 러시아 편에 설 수밖에 없었습니다.
미국이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것도 우연한 결과였습니다. 미국 은행과 기업, 특히 모건 재벌은 영국과 프랑스에 막대한 자금을 빌려주고 무기를 판매했습니다. 모건 재벌은 무기 30억 달러어치를 팔고, 10억 달러를 빌려주었습니다. 따라서 모건 재벌은 빚을 안전하게 돌려받기 위해서라도 미국의 참전을 원했습니다.
유럽과 미국을 전쟁으로 몰아넣은 원인으로 위에서 살펴본 특정 사례들이 흔히 언급되지만, 사실 그 이면에는 훨씬 더 복잡한 요인이 얽혀 있었습니다. 프랑스와 독일의 전통적인 갈등, 영국과 대륙의 미묘한 관계, 러시아의 범슬라브주의, 독일의 패권 추구, 군소 국가들의 민족주의, 세기말 사상, 사회진화론, 인종 우월주의, 자본주의 발달, 식민지 경쟁 등이 모두 주요 원인으로 작용했습니다. 제1차 세계대전은 단일한 원인으로 설명할 수 없습니다. 이 전쟁이 주는 교훈은 단지 다음 위기가 이전과 같은 패턴으로 일어날 것이란 안일한 믿음을 버리고, 평화를 과신하지 말라는 경각심을 일깨워주는 것뿐입니다.
케테 콜비츠 <씨앗들이 짓이겨져서는 안 된다>(1941)
콜비츠는 제1차 세계대전에서 둘째 아들을, 제2차 세계대전에서 손자를 잃었습니다. 아들과 손자를 모두 전쟁터에서 잃은 그 마음을 무엇에 비할 수 있을까요? 그녀는 그 깊은 슬픔과 분노를 혼자만의 것이 아니라, 같은 고통을 겪는 이들과 나누고자 했습니다. 그렇게 탄생한 작품이 바로 <씨앗들이 짓이겨져서는 안 된다>입니다.
이 작품이 세상에 공개되자 많은 이들이 눈물을 흘리고, 평화를 다짐하며 위로를 받았습니다.
역사책이 명료하고 체계적으로 보이는 이유는, 사건이 이미 벌어진 뒤 되돌아보며 서술되기 때문입니다. 이 과정에서 과거의 사건들은 서로 긴밀히 연결된 것처럼 제시됩니다. 역사가 필연처럼 보이는 까닭은, 수많은 우연 중 일부만 대표 사례로 선택되었기 때문입니다. 결국 역사를 우연으로 볼지, 필연으로 볼지는 우리의 해석에 달려 있습니다.
사건이 일어나기 전, 그걸 예측하기란 매우 어렵습니다. 소설가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1899~1986)가 『두 갈래로 갈라지는 오솔길들의 정원』(1941)에서 “시간은 무한히 많은 미래를 향해 영원히 갈라진다”고 말했듯, 실제로 한 사건에 영향을 미치는 요인은 셀 수 없을 만큼 많습니다. 게다가 하나의 사건이 일어나기 전에도 이미 수십만, 심지어 수백만 개의 사건이 얽혀 있습니다. 각 사건마다 원인이 있고, 완전히 무작위는 아니더라도, 모든 중요한 사건의 원인과 상호작용을 계산해 사건 경로를 예측한다는 건 인간의 능력을 넘어섭니다. 미래는 본질적으로 예측할 수 없고 매우 불확실합니다.
반면 사건이 지난 뒤에는 모든 것이 명확해 보입니다. 당신의 실수가 나쁜 결과를 초래했다면, 지금은 확연하게 보이는 과거의 경고 신호를 놓친 자신이 한심하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우리는 흔히 ‘하루만 더 머물렀다면 폭설을 피할 수 있었을 텐데’라든지, ‘우리 회사가 망할 조짐은 오래전부터 있었는데, 나는 그걸 전혀 신경 쓰지 않았어’라고 후회하곤 합니다. 하지만 치명적인 실수와 가벼운 실수의 차이는 실수 그 자체에 있지 않습니다. 그 실수가 우연히 무엇과 연관되어 일어났는지에 달려 있습니다.
과거와 미래의 근본적인 비대칭성 때문에, 과거는 명확해 보입니다. 이는 편협한 시야를 낳아, 우리는 사건과 관련된 가장 수월하거나 두드러진 원인에 안착해 버립니다. 일이 터지고 나면 수많은 우연 중 단 몇 가지 원인만 골라 이해하려 합니다. 과거가 논리적으로 보인다면, 그건 과거가 이미 지나갔기 때문입니다.
이 비대칭성은 개인의 삶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컨대, 어느 남성이 있었습니다. 대학 입시에 실패하고 재수도 여의치 않자, 그는 미국으로 배낭여행을 떠났습니다. 그곳에서 다양한 나라의 청년들과 대화하며 우리나라 입시제도에 회의를 느꼈습니다. 귀국 후 대학 진학을 미루고, 돈을 벌며 영어를 배우고자 외국인이 자주 찾는 홍대 근처 바(bar)에서 아르바이트를 시작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곳에 술 한잔하러 온 프랑스 여인을 만나게 되었고, 그 만남은 결혼으로 이어졌습니다.
돌이켜보면, 그가 프랑스 여인과 결혼한 이유는 명확해 보입니다. 바에서 일한 경험이나 미국 배낭여행, 대학을 포기한 선택까지, 모든 것이 필연적인 경로였던 것처럼 느껴집니다. 하지만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이는 모두 우연의 결과였습니다. 다만 사건이 지나고 나면, 과거를 실제보다 훨씬 더 예측 가능했던 것으로 인식하게 됩니다.
우리는 자기 삶에서 벌어진 우연을 쉽게 인정하지 못합니다. 입으로는 우연이라 말하면서도, 속으로는 ‘이 모든 게 우연일 리 없어’라고 되뇝니다. 본래 우리 뇌는 ‘우연’이라는 설명으로 대충 넘어가려 하지 않습니다. 아주 미미한 징후에서도 패턴과 의미를 찾아내려 합니다. 이러한 착각은 종종 미래를 예측할 수 있다는 과도한 자신감으로 이어집니다.
우리는 우연의 힘을 과소평가합니다. 그래서 ‘용기’라고 여겨진 행동이 종종 무모함으로 드러납니다. ‘대담함’과 ‘무모함’ 사이의 경계는 매우 얇습니다. 위험을 감수한 사람들 가운데, 성공한 사람보다 자신 착각에 빠져 희생된 이들이 훨씬 많습니다. 그들이 위험을 무릅쓴 이유는 자신이 숨은 패턴을 읽었다고 착각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어디서든 패턴을 찾고 의미를 부여하려 합니다. 잉크 얼룩에서조차 신의 모습을 발견하곤 합니다. 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패턴을 잘못 인식하면, 현실을 왜곡할 수 있습니다. 과거를 해석할 때도 마찬가지로, 우리는 우연의 개입을 외면하고 복잡한 현실을 단순한 이야기로 축소합니다. 그렇게 우연을 지우는 순간, 위험을 감수한 행동은 용기가 아니라 무지의 또 다른 이름이 됩니다.
우리 대부분은 우연의 산물입니다. 그럼에도 마치 스스로 선택한 길만 걸어온 듯 여깁니다. 우리가 알고 이해하는 것조차 노력의 결과라기보다 단지 운의 덕인 경우가 많지만, 우리는 여전히 주변을 통제하고 미래를 예측하려 애씁니다. 우리 삶을 돌아보며, 우연과 노력한 성취를 구분하려 하지만, 그 경계는 생각보다 불분명합니다.
필연을 부조리로 본 볼테르조차, 우연은 ‘불편하다’고 인정했습니다. 우연은 우리를 불안하게 만들고, 긴장을 풀거나 안정감을 느끼지 못하게 합니다. 반면 필연은 설명과 질서를 제공해 안심시킵니다. 우연은 미래뿐 아니라 과거에 내린 결정과 믿음, 즉 우리가 살아온 삶의 방식 자체에 의문을 제기합니다. 또한 뜻밖의 사고나 재앙 앞에서, 우리가 사랑하는 이들을 지킬 수 없다는 무력감도 안깁니다. 그러니 필연을 선호하는 건 당연합니다. 옳음의 집착이 그름에 대한 두려움에서 비롯되듯, 필연을 향한 우리의 끌림 역시 우연에 대한 혐오에서 나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