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과 필연의 윤리의식

- 15장 통제

by 북다이제스터



서양 철학사에서 철학자들은 우연보다 필연적이고 ‘불변하는 것’을 찾으려 했습니다. 변하는 건 진리의 대상이 될 수 없다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아는 순간 이미 달라진 건 영원히 알 수 없다고 믿었습니다. 고대 서양철학에서 ‘만물의 근본(이데아)은 무엇인가’, 스토아 철학의 ‘삶의 궁극적인 목적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모두 변화 너머의 불변하는 진리를 찾으려는 시도였습니다. 중세 철학의 ‘이성은 신앙과 어떻게 조화를 이룰 수 있는가’, ‘세상 만물의 보편자는 실재하는가, 아니면 이름뿐인가’라는 논쟁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모두 필연적이고 변하지 않는 것을 탐구하려는 노력이었습니다.


이러한 질문이 가능했던 배경에는, 서양 철학 발상지인 그리스어의 독특한 언어 구조도 한몫했습니다. 고대 그리스어는 학문이 본격적으로 발전하기 수 세기 전부터 정관사가 발달했습니다. 그리스인들은 형용사나 동사 원형, 현재분사에 중성 단수 정관사 ‘토’(to)를 붙여 추상 명사를 만들었습니다. 예컨대 우리가 ‘선’(善) 또는 ‘좋은 것’이라 옮기는 영어 the good은 그리스어로 ‘토 아가톤’(to agathon)입니다. 정관사는 개별 사물의 속성을 떼어내, 독립된 개념으로 바라보게 합니다. 어떤 꽃이 ‘붉다’는 성질은 정관사를 통해 ‘붉은 것’이라는 추상 개념이 됩니다.


정관사가 발달하지 않은 언어에서는 이런 추상화가 쉽지 않습니다. 집이나 사람, 돌 같은 개별 대상을 하나의 보편 개념으로 묶어 ‘어떤 것’으로 대상화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그리스인들은 정관사를 통해 개별 속성에서 ‘불변하는 것’을 추상화할 수 있었고, 이는 서양 철학의 초월적·보편적인 개념 형성의 토대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니체는 끊임없이 변화하는 세상을 부정하고, 변하지 않는 걸 찾으려는 태도 자체를 니힐리즘(허무주의)이라 불렀습니다. 그는 서양 형이상학의 철학사를 변하지 않는 실체를 찾으려는 시도로 보고, 이를 니힐리즘의 역사로 규정했습니다.


반면 동양철학, 특히 불교는 불변하는 세계를 참된 세계로 보지 않았습니다. 불변하는 세계는 현실을 반영할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동양에서는 불변하는 본질이 인간의 언어와 관습이 만들어 낸 산물이라는 통찰이 2,000년 전부터 상식이었습니다. 동양 철학자들은 ‘불변하는 것’이 인간 삶을 얼마나 억압하는지 깊이 성찰했습니다. 중국 사상은 인간이 스스로 부여한 본질을 절대적인 것으로 착각하는 태도를 경계했습니다. 그래서 관념을 사실로 혼동하지 않았습니다.


불교는 변하지 않는 본체가 따로 없다고 봅니다. 오히려 눈앞에서 항상 일어나는 무상한 변화 자체가 세계의 실상입니다. 불교는 불변하는 본질을 자성(自性)이라 부르며, 자성이 없다는 무자성(無自性), 곧 ‘공’(空)을 강조합니다. 공이란 다른 것에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 존재하는 독립된 실체가 없다는 뜻입니다. 불교에서 공은, 필연적이고 ‘불변하는 것’에 집착하는 이들을 치유하기 위해 제시된 개념입니다. 불교는 필연에 대한 믿음을 집착이자 착각으로 봅니다. 우리는 철저히 조건 지어진 존재이며, 연기(緣起) 속에서 살아갑니다. 자신보다 큰 무언가의 일부로, 다른 사람이나 환경과 분리될 수 없는 우연한 연결 속에 존재합니다.


세상에는 우리가 통제할 수 없는 힘이 늘 작용합니다. 우리는 그 힘에 휘둘려 살아가지만, 그걸 잘 인식하지 못할 뿐입니다. 인간은 완전히 자유롭게 생각하거나 행동할 수 없습니다. 언제나 어떤 조건에 얽매여 있습니다. 우연한 사건은 우리의 통제를 벗어나며, 자유 의지는 생각보다 훨씬 제한적입니다.


우리의 존재는 본성(nature)과 양육(nurture)이 합쳐져 100퍼센트를 이룹니다. 둘 다 스스로 선택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통제할 수 없는 힘에 따라 만들어집니다. 어떤 사람이 될지, 어떤 시각과 성격, 판단력을 가질지는 본성과 양육이 복잡하게 얽힌 결과입니다.


따라서 사람이 어른이 되었을 때의 됨됨이는 통제할 수 없는 수많은 요인에 영향을 받습니다. 예컨대 임신 중 엄마의 약물 사용이나 스트레스, 출생 시 저체중 같은 요인이 큰 영향을 줍니다. 성장 과정에서의 방치나 학대, 머리 부상 역시 정신 발달에 문제를 일으킬 수 있습니다. 성인이 된 뒤에도 약물 남용이나 독성물질 노출로 뇌가 손상되면 지능이나 공격성, 의사결정 능력은 달라질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될지는 어디서, 어떤 환경에서 자랐는지에 달려 있습니다. 따라서 인생의 중요한 의사결정 역시 스스로 선택하지 않은 신념과 가치관, 성향에 의존합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의 선택은 근본적으로 자유롭지 않습니다. 우리는 지금과 다른 사람이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곤혹스럽지만, 달리 설명할 길이 없습니다.


가령 어떤 사람이 부의 재분배를 지지하는 조세제도를 공정하다고 여긴다고 가정해 보겠습니다. 이 공정하다는 생각은 어디서 비롯되었을까요? 그는 분명 충분히 숙고해 내린 판단이라 믿겠지만, 그 판단을 이끈 건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그의 타고난 성향과 학습된 경험, 즉 본성과 양육의 결합입니다. 다른 요소가 개입할 여지는 없습니다. 우리가 충분히 자각할 나이가 되면, 인격과 세계관을 결정하는 핵심 요인은 이미 정해져 있습니다.


문화역사학자 잭슨 리어스(1947~ )는 미국 문화를 ‘우연의 윤리의식’과 ‘통제와 책임의 윤리의식’이 충돌하는 장으로 보았습니다. 우연의 윤리의식은 삶이 인간의 이해와 통제를 벗어난다는 사실을 인정합니다. 세상은 개인의 노력에 언제나 보답하지 않으며, 그러므로 우연을 받아들이고 겸손해야 한다고 태도입니다.


반면 통제와 책임의 윤리의식은 인간 선택을 강조합니다. 오늘날 우리는 성공을 행운이 아니라 노력의 결과로 봅니다. 이것이 바로 통제와 책임 윤리의식의 핵심입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운명을 통제해 재산과 권력, 명예를 얻었다고 자랑합니다. 성공은 미덕의 증거이고, 부는 정당한 자신의 몫이라 여깁니다. 자신을 운명의 책임자이자 통제 불가능한 힘에 굴복하지 않는 존재로 여기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 윤리의식에는 어두운 면이 있습니다. 우연을 부정하고 필연을 믿을수록, 모든 결과를 개인 책임으로 돌리게 됩니다. 내 성공이 내 노력 덕분이라면, 타인의 실패 역시 그들 탓이 됩니다. 자수성가 신화에 매달릴수록, 운이 나빴던 이들을 이해하거나 배려하기 어려워집니다. 이런 사고는 공동체 의식을 약화시킵니다. 운명이 개인 책임이라 생각할수록 다른 사람을 챙길 필요를 느끼지 않습니다. 정상에 오른 사람과 바닥에 떨어진 사람 모두 ‘그럴 만해서’ 그렇게 되었다고 믿게 되기 때문입니다.


영화 <기생충>(2019)에서 ‘계획’이라는 단어는 열여덟 번이나 반복될 만큼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특히 마지막 장면에서 아들 기우(최우식 분)는 아버지 기택(송강호 분)을 위해 부자가 되어 대저택을 사겠다는 계획을 세웁니다. 하지만 가난한 하층계급에게 이 계획이 얼마나 비현실적인지 우리는 이미 알고 있습니다. 사실 상류계급의 삶조차 치밀한 계획의 결과라기보다, 단지 ‘우연’의 산물에 가깝습니다.


영화는 계획을 세우고 근면하고 성실하게 노력하면 누구나 성공할 수 있다는 통념을 비판합니다. 아버지 기택의 “너는 ‘계획’이 다 있구나!”라는 대사로 인생의 통제 불가능성을 반어적으로 드러내며, 우리가 믿어온 성공 서사의 허구를 날카롭게 비판합니다. 기택은 결국 이렇게 말합니다. “완전한 계획은 무계획이지. 계획을 짜도 소용없어, 계획대로 되지 않거든.”


일단 이러한 인식의 전환이 필요합니다. 그래야 ‘그렇다면 우리는 앞으로 무엇을 해야 할까?’라는 질문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의 삶은 우리가 통제할 수 없는 힘에 크게 좌우됩니다. 우연을 받아들이고, 개인이 통제할 수 있는 일이 생각보다 적다는 사실을 인정할 때, 자유의지에 대한 근본적인 의문이 떠오릅니다. 과연 자유의지란 무엇일까요?



잭슨 폴록 <가을의 리듬: No. 30, 1950>(1950)



폴록은 물감을 붓으로 칠하지 않고, 뿌리거나 쏟아붓는 방식을 택했습니다. 그의 작품은 작가의 의도보다 재료와 행위의 역동성에 따라, 즉 우연에 따라 결과가 나타납니다.


플록이 붓끝에 물감을 묻혀 캔버스에 조심스럽게 바르지 않고 분출시켰을 때, 그는 기존 미술 방식의 엄격한 조절과 통제를 포기한 것이었습니다.


이전 18화빤해 보이는 과거의 실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