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의 은총

- 16장 자유의지

by 북다이제스터



우리 예상과 달리, 인간이 의지를 자유롭게 발휘할 수 있다고 믿었던 시대는 그리 많지 않았습니다. 고대 사회에는 자유의지 개념 자체가 희미했습니다. 고대 히브리인들의 운명론은 <구약성서>에 잘 드러납니다.


“인간은 변덕스러운 운명의 희생자다. 노력과 성공 사이에 필연적인 관계는 없다. 빠르다고 달리기에 이기는 것도 아니며, 용사라고 전쟁에서 이기는 것도 아니다. 지혜가 있다고 먹을 게 생기는 것도 아니며, 총명하다고 재물을 모으는 것도 아니며, 배웠다고 늘 잘 되는 것도 아니다. 불행과 재난은 누구에게나 닥친다.(<전도서> 9:11)”


이 세계관에서 노력과 결과 사이에는 필연적인 연결이 없습니다. 인간은 선택하는 주체라기보다, 예측할 수 없는 운명에 노출된 존재입니다.


신약 역시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예수는 유다가 자신을 배신하고, 베드로가 새벽닭이 울기 전 세 번 자신을 부인할 것을 예언했습니다(<마가복음 14:17~30>). 이 예언대로라면, 유다와 베드로는 그 운명을 피할 수 없습니다. 신이 이미 미래를 정해두었다면, 그들은 달리 행동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유다는 자유롭게 선택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를 배반한 건 필연이었습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예수는 십자가에서 죽지 않았을 것이고, 부활도 없었을 것입니다. 결국 모든 건 신의 뜻에 따른 결과입니다. 6세기 초 철학자 보이티우스(480?~524)는 이 문제를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신이 미래를 모두 알고 절대 실수하지 않는다면, 그의 예견은 반드시 실행된다. 신이 모든 걸 미리 안다면, 인간의 행동은 물론 생각과 욕망까지도 알 테고, 이는 인간에게 자유의지 따위는 있을 수 없다는 뜻이다. 신의 섭리는 결코 틀릴 수 없기에, 미리 알지 못하는 인간 생각이나 행동 같은 건 있을 수 없다.”


예수 이후 신학도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인간은 신의 계획 안에서 움직일 뿐, 자신의 의지로 구원에 다다를 수 없습니다. 사도 바울(5?~62)은 율법적인 노력으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다고 하며, “당신이 구원을 받는 것은 은총을 통해서다. 구원은 은총으로부터 말미암는다”(<에베소서> 2:8)고 했습니다. 결국 인간의 운명은 노력이나 의지가 아니라, 전적으로 신의 뜻에 달려 있습니다.


더 나아가 인간은 자신 죄에도 책임이 없습니다. “이제는 그것을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로마서> 7:17) 바울은 “누구도 하나님의 뜻을 거스를 수 없는데, 어떻게 사람에게 죄를 물을 수 있는가?”라고 의문을 제기했습니다. 그에 따르면, 죄를 지은 자는 의도한 바가 아니었기에 책임에서 자유롭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 역시 신의 전능을 바탕으로 신학 체계를 세웠습니다. 인간에게 자유의지가 있다고 인정하면, 신의 전능과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은 무의미해집니다. 인간이 스스로 구원에 이를 수 있다면, 굳이 예수가 육신을 입고 내려올 이유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신은 이미 누가 구원받을지 정해두었습니다. 인간이 이 결정을 공정하지 않다고 항의해도 신은 이렇게 답할 것입니다. “첫째, 공정함을 엄격히 적용하면 인간은 모두 지옥에 떨어져야 한다. 둘째, 신의 선택은 신의 전능 속에 감춰진 신비로, 인간의 이해를 넘는 일이다.”


신학자 오리게네스(185?~253?)는 자유의지를 상세히 체계적으로 다룬 최초의 기독교 저술가입니다. 그는 성경에서 인간에게 자유의지가 있는지 조사했습니다. 하지만 그가 확인한 건 우리가 자유의지가 있다고 믿을 때만 존재하는 듯한 구절뿐이었습니다. 오히려 성경은 인간에게 자유의지가 없음을 시사하는 부분이 더 많았습니다. <빌립보서> 2장 13절에는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구절이 보여주듯, 인간의 행위는 자신의 의지가 아니라 신의 뜻에 따라 결정됩니다.


종교개혁을 이끈 루터도 인간이 선행으로 구원을 얻을 수 없다고 보았습니다. 구원은 오직 신의 은총에서 비롯되며, 선행이든 계율 준수든 신의 마음에 들기 위한 노력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루터는 “자유로운 선택만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기에 신의 은총이 필요하다”고 말하며, 인간의 자유의지를 부정했습니다. 우리는 그저 천국에 가길 바라며 기도할 뿐, 그 이상 할 수 있는 일이 없습니다. 구원은 전적으로 신의 선물이고, 개인 의지와는 무관합니다. 그래서 루터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바로 이곳에 제가 서 있습니다. 저는 달리 어찌할 도리가 없습니다. 신이 나를 그렇게 하도록 하셨기 때문입니다.”


또 다른 종교개혁가 칼뱅 역시 구원은 인간이 이룬 업적이나 자격이 아니라, 전적으로 신의 은총에 달려있다고 보았습니다. 누가 구원받고 누가 단죄될지는 태어나기 전 이미 예정되어 있습니다. 인간이 어떻게 살아가든 그 결과를 바꿀 수 없습니다. 교회에 나가고 예배를 드려도 소용없습니다. 그럼에도 신자는 신의 영광을 위해 살아가야 하지만, 그건 구원을 얻기 위함이 아닙니다. 인간의 노력은 운명을 바꿀 수 없고, 신의 축복이나 저주는 이미 태어나기 전부터 결정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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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쾌대 <운명>(1938)



그림에는 다섯 인물이 등장합니다. 이 가운데 젊은 여성 셋은 서로 다른 인물이 아니라, 한 인간의 세 가지 국면을 나타냅니다. 오른쪽부터 평화와 비극, 전쟁의 상황을 상징합니다.


나머지 두 인물은 삼신할머니와 저승사자로, 각각 탄생과 죽음을 뜻합니다. 여성의 처지가 어떻게 달라지든, 인간은 결국 태어남과 죽음이라는 ‘운명’을 벗어날 수 없습니다.


이 그림이 말하는 운명이란, 개인의 선택이나 의지로는 좌우할 수 없는 조건입니다. 삶의 양식은 변해도 인간 존재 전체를 감싸는 필연의 틀입니다.



바울에서 칼뱅에 이르기까지 기독교 전통은, 구원이 인간의 의지와 무관하며 오직 신의 선택에 달려 있다고 강조해 왔습니다. 이는 신의 전능성 때문입니다. 인간의 노력으로 구원을 얻을 수 있다면, 신의 전능에 한계가 생깁니다. 인간이 스스로 구원을 이룰 수 있다고 인정하는 순간, 신의 무한한 능력은 훼손됩니다. 이 때문에 기독교 전통에서 ‘자유의지를 지닌 인간’이라는 개념은 성립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이 논리는 곧 다른 문제를 낳습니다. 신이 전능하다면, 세상에 존재하는 악 또한 신의 주재(主宰) 아래 있다고 보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정의로운 신은 왜 고통과 악을 허락하는가라는 질문을 피할 수 없습니다. 전능하면서 악을 방치한다면 신은 정의롭지 않게 되고, 정의롭다면 전능하지 않다는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이 딜레마를 두고 철학자 섹스투스 엠피리쿠스(160?~210?)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신이 모든 것을 통제한다면, 결국 신이 악의 창조자가 된다.”


신학에서 ‘신은 정의롭다’, ‘신은 전능하다’, ‘악은 존재한다’는 세 명제는 동시에 성립하기 어렵습니다. 이 모순은 17세기 중국의 유교 학자들이 기독교를 미신이자 이단으로 간주한 이유이기도 합니다. 그들은 ‘전능하고 자애로운 신이 왜 원죄를 허용했는가?’라고 물었습니다. 중국 선비들의 지적인 전통과 세계관에서는 이러한 모순을 받아들이기 어려웠고, 그 때문에 기독교를 인정할 수 없었습니다.


이 난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법은 인간에게 자유의지가 있다고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나쁜 행위의 책임은 신이 아니라 인간의 선택으로 돌아갑니다. 신이 우리에게 규범을 따를지 어길지 선택할 자유를 주었다면, 잘못된 행위의 책임은 전적으로 우리 자신의 몫입니다. 따라서 악을 저지른 자는 그 결과를 감당해야 하며, 현세든 내세든 신의 심판을 피할 수 없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중세 가톨릭교회는 다시 자유의지 개념을 받아들였습니다. 그 결과 세례나 기도, 미사 같은 교회의 예식과 도덕적인 실천이 구원의 핵심으로 강조되었습니다.


철학자 데이비드 흄은 자유의지를 종교적인 보상과 처벌을 정당화하기 위한 도구로 활용하는 태도를 비판했습니다. 그는 종교적인 필요성 때문에 논증을 거꾸로 뒤집는 건 철학적으로 타당하지 않다고 지적했습니다.


“자유의지라는 거짓된 교리가 널리 퍼진 이유 중 하나는, 천국의 보상과 지옥의 형벌을 정당화하려는 종교 때문이다. 어떤 가설이 종교나 도덕을 위협한다고 해서 그것을 반박하려는 시도야말로, 철학 논쟁에서 가장 흔하면서도 비난받아 마땅한 추론 방식이다.”


이렇듯 기독교 전통에서도 자유의지의 존재 여부는 쉽게 답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 기독교 전통 내부에서도 자유의지는 확고한 토대라기보다, 신의 전능성과 악의 존재 사이에서 끊임없이 호출되고 수정되는 문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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