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장 자유의지
서양 철학사에서 데카르트는 아무런 증명 없이 인간에게 자유의지가 있음을 하나의 공리로 받아들였고, 칸트는 이를 증명하려 했으나 끝내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반면 흄과 스피노자는 인간에게 자유의지가 없음을 논증했습니다. 흄에 따르면 인간은 이성적인 존재라 하더라도 – 사실 이성보다 감성에 더 지배되지만 - 자신이 통제할 수 없는 힘에 좌우됩니다. 그는 인간이 필연인 경우는 물론, 우연 속에서도 자유의지를 발휘할 수 없다고 보았습니다.
“우리는 자유롭게 행동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책임이 따른다. 그런데 결정론(필연성)이 참이라면 인간의 행동과 욕구, 사상은 모두 인과 법칙에 따라 이미 결정되어 있으므로 자유롭게 행동할 수 없다. 반대로 결정론이 거짓이라면 사건은 인과 법칙과 무관하게 우연히 발생하는데, 이 역시 인간의 통제를 벗어난다. 결국 어떤 경우에도 인간은 자유롭게 행동할 수 없다.”
흄은 인간이 자유의지를 가질 수 없는 두 가지 경우를 제시합니다. 하나는 모든 것이 이미 결정되어 선택의 여지가 없는 경우이고, 다른 하나는 모든 일이 우발적으로 일어나 예측이나 통제가 불가능한 경우입니다. 어느 쪽에서도 우리는 자유의지를 행사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흄에게 자유의지를 지닌 ‘자아’ 역시 환상입니다. 자아는 우리의 습성이 만들어낸 허구에 불과합니다. 그는 “우리의 지각은 각각 분리되어 있으나, 연상 작용으로 마치 연속된 것처럼 착각하면서 동일한 자아라는 환상이 생긴다”고 말했습니다. 즉, 자아란 매 순간 반복된 지각에서 유사성을 동일성으로 오해한 결과입니다.
우리가 과거의 나와 현재의 나를 하나의 동일한 존재로 여기는 것은, 인상(impression)이 관념(idea)으로 바뀌는 과정에서 생긴 착각입니다. 인상은 통증이나 배고픔, 그리고 기쁨과 슬픔처럼 감각과 정서가 직접 주는 생생한 지각입니다. 반면 관념은 이러한 인상이 기억이나 상상 속에서 재현된 것입니다. 가령 고양이를 본 경험은 인상이고, 고양이가 눈앞에 없을 때도 고양이를 떠올릴 수 있는 능력은 관념입니다. 흄은 모든 관념이 이처럼 인상에서 비롯된다고 보았습니다.
인상은 본래 순간적이며 지속되지 않습니다. 반면 관념은 인상에서 비롯되지만, 인상과 분리되어 오래 지속될 수 있기에 허구로 빠질 수 있습니다. 우리는 관념의 연속성을 하나의 동일한 주체가 지속된다는 증거로 오해합니다. 하지만 실제로 지속되는 건 인상에서 파생된 관념의 연쇄일 뿐입니다.
예컨대 스무 해 전 태어난 아이가 이제 대학생이 되었을 때, 부모는 그 아이가 여전히 같은 사람이라고 확신합니다. 하지만 그 믿음을 정당화할 근거는 없습니다.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건 매순간 나타난 서로 다른 지각들뿐이며, 그 사이를 관통하는 동일한 자아라는 근거는 어디에도 없습니다.
이 점에서 흄은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를 정면으로 비판했습니다. 이 명제는 오직 ‘지금 생각하는 나’만을 보증할 뿐, 시간이 지나도 동일한 ‘나’가 계속 존재한다는 사실은 설명하지 못합니다. 데카르트가 말한 주체는 ‘생각하는 지금’에만 확실하며, 과거의 ‘나’가 현재의 ‘나’와 동일하다는 사실을 증명하지 못합니다.
스피노자 역시 인간이 의지를 자유롭게 행사한다고 보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자신의 사고와 행위를 낳은 욕망을 의식하지만, 바로 그 욕망이 어디서 비롯되는지 알지 못합니다. 그는 이를 이렇게 비유했습니다. “공중에 던져진 돌이 그 순간 의식을 갖게 된다면, 스스로 자유롭게 날아간다고 믿을 것이다.” 돌은 자신을 누가 던졌는지 모릅니다. 그럼에도 스스로 날기로 결정했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것이 자기 경험을 설명하는 가장 그럴듯한 방식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인간도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는 자신의 행동 원인을 자각하지만, 그 근원이 어디서 비롯되었는지는 알지 못합니다. 끊임없이 이어지는 환경 속에서 영향을 받지만, 그 영향을 모두 알아채진 못합니다. 스피노자가 말했듯, 인간은 단지 자신의 욕망을 의식한다는 이유만으로 자유롭다고 믿을 뿐, 정작 그 욕망이 어떻게 형성되었는지는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의지’에 따라 선택한다고 믿지만, 실제로는 순간순간 자신도 모르는 충동과 조건에 따라 행동합니다. 우리는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기에 그렇게 했을 뿐, 스스로 자발적으로 선택한 게 아닙니다. 그 의지가 왜 생겼는지, 어떤 원인에서 비롯되었는지를 알지 못하면서, 그걸 내 자유의지라고 주장할 수는 없습니다.
이 점은 현대 심리학 연구에서도 확인됩니다. 예컨대 사람은 손에 따뜻한 음료를 들고 있으면, 가족 관계를 더 따뜻하고 호의적으로 표현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반대로 차가운 음료를 들고 있으면, 그 관계를 다소 비관적으로 표현합니다. 인간관계의 ‘온기’를 판단하는 뇌의 메커니즘이 물리적인 온도를 처리하는 메커니즘과 겹쳐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애정이나 친밀감 같은 감정조차 손에 쥔 컵의 온도에 영향을 받지만, 우리는 그 원인을 자각하지 못합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영향을 받았다는 사실을 느끼지 못한 채, 본래 의도하지 않은 행동조차 마치 스스로 선택한 것처럼 설명합니다.
라이프니츠는 스피노자의 '날아가는 돌' 논지를 분명히 이해하고 다음과 같이 요약했습니다.
“인간이 자유롭기 위해서는 외부에 의해 미리 결정되지 않아야 한다. 하지만 모든 행위는 외부 요인의 영향을 받는다. 따라서 인간은 어떤 의미에서도 자유롭지 않다. 자유란 오직 행위자가 자신의 본성에 따라 행위할 때만 가능하다. 그런 의미에서 오직 신만이 자유롭다는 스피노자의 주장은 옳다.”
스피노자는 우리가 자유롭다고 믿거나 자유로워야 한다고 확신하는 태도 자체가 우리를 자유롭지 못하게 만든다고 우려했습니다. 자신의 이상한 행동이 왜 그렇게 나타나는지 알지 못한 채, 의지로 통제할 수 있다고 착각할 때 오히려 더 큰 곤경에 빠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자유롭지 않다는 자신의 본성을 모르면, 스스로를 속이게 되고 결국 위험한 결과를 초래할 수 있습니다.
예컨대 남성의 성(性) 정체성은 태어나기 전부터 이미 결정되는 듯합니다. ‘형제 출생 순서 효과’(fraternal birth order effect) 이론에 따르면, 형이 많을수록 남성이 동성애자가 될 가능성이 높아집니다. 엄마가 연달아 남자아이를 임신할 때 자궁 내 면역체계가 반응해, 이후 태어나는 남성의 성적 지향에 영향을 미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아직 구체적인 메커니즘은 밝혀지진 않았지만, 엄마 몸에서 남성 염색체[Y염색체]에 대한 면역항체가 생성되어, 태아의 뇌가 ‘남성’으로 발달하는 과정을 미세하게 조정하거나 방해할 수 있다고 추정됩니다. 성적 지향은 의식적인 선택이 아니라, 생물학적인 조건에 좌우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모든 행동과 성향이 의지의 산물이라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환경적·생물학적·심리적인 요인의 영향을 크게 받습니다. 남성의 성 정체성이 태내 환경에 따라 달라질 수 있음은, 인간의 선택이 완전히 자유롭지 않음을 보여줍니다. 결국 스피노자가 말한 ‘자기 본성의 무지’란 바로 이런 필연적인 조건을 모른 채, 자신이 자유롭다고 착각하는 것입니다. 인간은 자신을 규정하는 조건을 이해할 때 비로소 진정한 자유를 사유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