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지박약

- 17장 길들이기

by 북다이제스터



공자는 도덕적인 행위에 지식의 중요성을 강조했습니다. 올바른 행동이 무엇인지 모르면 남에게 해를 끼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유교에서 공부를 중시한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유학자들은 옛 성인(聖人)의 바람직한 행동을 배우고 익혀 자신의 것으로 만들고자 했습니다.


공자는 배운 것을 일상에서 반복해 습관화하고 내면화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이렇게 체득된 지식은 결국 자신과 하나가 됩니다. 이런 습관으로 만들어진 행동 경향을 ‘덕’(德)이라 하고, 자기 수양으로 자연스레 도덕적인 행위를 하는 이를 ‘군자’(君子)라 불렀습니다. 유교는 행동보다 인격을 중시합니다. 공자의 윤리는 ‘행동’보다 ‘존재’의 윤리에 가깝습니다. 올바른 일을 하기에 앞서 올바른 사람이 되는 것, 이것이 유교의 핵심 원리입니다.


성악설을 주장한 순자(荀子, BC 298?~238?)는 놀랍게도 인간 성품에 낙관적인 견해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는 적절한 교육과 훈련을 받으면 누구나 성인이 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는 “인간 본성은 악하므로, 성인의 정치와 예의를 배워야 비로소 선을 행할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따라서 덕은 타고나지 않고, 교육을 통해 인위적으로 주입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소크라테스 또한 모든 악행이 악한 의지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제대로 배우지 못한 무지(無知)에서 나온다고 보았습니다. 여기서 ‘무지’란 단순히 아는 게 없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잘못되거나 불완전한 앎’을 뜻합니다. 그는 공자처럼 덕을 지식과 연관 지었습니다. 지식이 올바른 행동을 이끈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행한 잘못이 어떤 결과를 초래할지 제대로 안다면, 그런 잘못을 저지르지 않을 것이라 본 것입니다. 그의 윤리관은 “덕과 앎은 하나다. 진정으로 무엇이 옳은지 아는 사람은 옳게 행동하며, 그로써 행복할 것이다”로 요약됩니다.


소크라테스는 그리스 사회의 전통적인 도덕관념에 반발하며 자신만의 윤리 사상을 펼쳤습니다. 그는 당시 사람들이 흔히 믿던 ‘의지박약’ 개념이 왜 잘못되었는지 알리려 했습니다. 사람들은 유혹에 굴복하면 의지가 약하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소크라테스는 이를 ‘완전한 지식’의 부족으로 보았습니다. 잘못을 저지른 사람은 의지가 약한 게 아니라, 무엇이 옳은지 제대로 모르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자발적으로 악을 행하지 않으며, 비자발적으로 선을 외면하지도 않는다. 사람은 자신이 악하다고 믿는 걸 자발적으로 따르지 않는다. 선보다 악을 선호하는 건 인간 본성에 어긋난다. 두 가지 악 중 더 작은 악을 알면서도 더 큰 악을 선택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모든 그릇된 행위는 무지에서 비롯된 비자발적인 행위이다.”


하지만 소크라테스의 주장에는 반론이 제기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종종 무엇이 옳은지 알면서도 그렇게 행동하지 않습니다. 사도 바울이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 바 악을 행하는 도다”(<로마서> 7:19)라고 말한 것처럼, 우리는 원하지 않는 일을 하거나, 반대로 원하는 일을 하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지식과 행동은 항상 일치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소크라테스가 말한 ‘제대로 앎’은 단순히 정보를 아는 걸 뜻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지식이 내면화되어 사람과 하나가 된 상태를 말합니다. 옳고 그름에 대한 앎은 단순한 이론적인 지식이 아니라, ‘무의식’ 차원에서 우러나오는 실천적인 지식이기 때문입니다.


이 점에서 소크라테스가 말한 ‘무지’ 개념은 불교 사상과 일맥상통합니다. 불교에서 무지는 세상을 잘못 인식하는 습관적이고 무의식적인 경향으로, 질시나 자만, 탐욕 같은 망상이 알게 모르게 스며든 상태를 말합니다. 모든 악행이 이 ‘무지’에서 비롯된다는 점에서, 두 사상은 서로 맞닿아 있습니다.


니체 역시 잘못된 행위가 ‘몰이해’에서 비롯된다고 보았습니다. 우리가 통제할 수 있는 건 행위가 아니라 ‘태도’입니다. 그는 이렇게 비유했습니다.


“어린아이가 동물에게 잔인하게 구는 건 몰이해 때문이다. 아이는 동물이 고통을 받는다는 사실을 모른다. 결국 어떤 행위를 악하다고 말하지만, 사실 그건 단지 ‘어리석은 행위’일 뿐이다. 행위에 깃든 지성의 수준이 너무 낮았던 탓이다. 타인의 고통을 유추할 능력, 기억과 상상력을 통해 고통을 주는 행위를 혐오할 줄 아는 능력은 오로지 배움을 통해 가능해진다. 배움이 깊어질수록 해석도 달라진다.”


선한 행동은 단순한 정보 습득만으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경험을 쌓고 자신을 새롭게 인식하며, 이전에 몰랐던 사실을 깨달아 무의식 속에 내면화해야 비로소 선을 실천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흔히 착한 행동은 선한 의지에서, 나쁜 행동은 악한 의도에서 비롯된다고 생각합니다. 이를 ‘귀인’(歸人, attribution) 이론이라 합니다. 인간의 행동 원인을 개인의 의도나 성격 같은 내적 요인에서 찾고, 외부의 환경이나 상황은 무시하는 경향입니다.


이런 사고방식 때문에 많은 사람이 노숙자나 극빈층의 곤경을 사회적·경제적인 요인보다 개인의 본질적인 결함 탓으로 돌립니다. 타인의 불운이나 잘못은 그 사람의 나쁜 본성에서 비롯된 것으로 믿고, 상황의 영향을 고려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누군가의 잘못을 두고 ‘뼛속까지 썩었어’라고 지적합니다. 악인은 본래 타락한 존재이며, 앞으로도 변하지 않을 것이라 단정하는 것입니다. 잘못된 행동을 성격이나 기질 탓으로 돌리고, 그 사람은 원래 그런 사람이라고 믿는 것입니다.


‘삼진아웃’ 제도는 이러한 사고의 전형적인 예입니다. 법을 반복해서 어긴 사람은 변하지 않는 기질적인 결함이 있으며, 앞으로도 범죄를 저지를 선천적인 성향이 있다고 간주됩니다. 그는 천성이 ‘뼛속까지 썩었기에’ 더 이상 나아질 가능성이 없다고 판단되는 것입니다. 결국 “그는 나쁜 사람이야”라는 말이 모든 설명을 대신하게 됩니다.


하지만 사람과 상황은 본질적으로 복잡합니다. ‘좋다’나 ‘나쁘다’ 같은 단순한 구분으로는 누구도, 어떤 행위도 온전히 설명할 수 없습니다. 더욱이 나쁜 기질이 반드시 범죄로 이어진다고 단정할 수도 없습니다. ‘중성자 폭탄’이라 불린 제너럴일렉트릭의 전 CEO 잭 웰치(1935~2020)가 그 예입니다.


그는 직원을 함부로 해고하고, 극도로 공격적인 경쟁심으로 유명했습니다. 하지만 이런 성향은 비즈니스 세계에선 오히려 성공의 필수 조건으로 여겨지기도 하며, 때론 긍정적으로 평가받기도 합니다. 즉 기질은 반드시 범죄로 이어지지 않습니다. 같은 기질이 상황에 따라 전혀 다른 결과를 낳으며, 단순히 ‘좋다’거나 ‘나쁘다’로 규정할 수 없습니다.


다른 사람의 나쁜 행동을 볼 때, 무조건 기질 탓으로 단정하기보다 그 이면의 다양한 요인을 살펴봐야 합니다. “음, 나라면 그런 짓을 하지 않았을 거야”라며 범죄자를 손쉽게 재단하는 태도는 오히려 문제일 수 있습니다. 탐욕이나 이기심, 게으름 같은 부정적인 행동조차 자세히 들여다보면 훨씬 복잡한 배경이 있을 수 있습니다. 이런 맥락을 무시한 채 상대를 본질적으로 결함이 있는 존재로 단정하면, 그를 긍정적인 방향으로 이끌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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