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장 길들이기
나쁜 행동이나 범죄를 이해하는 중요한 관점 가운데 하나가 ‘낙인’(stigma) 이론입니다. 이 이론은 일탈을 개인의 고유한 속성이 아니라, 일탈자와 비일탈자 사이의 상호작용 속에서 발생하는 사회적인 현상으로 봅니다. 예컨대 잭 윌치의 공격적이고 냉혹한 성향은 기업가의 자질로 긍정되지만, 비슷한 성향의 다른 사람은 쉽게 ‘일탈자’로 낙인찍힐 수 있습니다. 낙인 이론은 나쁜 행동을 개인의 본질적인 결함으로 단정하지 않고, 사회적인 맥락 속에서 ‘나쁨’이 어떻게 규정되고 강화되는지를 보여줍니다.
낙인 과정은 사회의 불평등한 권력 구조를 그대로 반영합니다. 일탈을 규정하는 규칙은 대개 힘 있는 집단이 그렇지 않은 집단을 통제하기 위해 만들어집니다. 부자가 가난한 사람을, 남성이 여성을, 기성세대가 젊은 세대를, 다수 인종이 소수 인종을 대상으로 삼습니다. 예컨대 ‘빵을 훔치면 감옥에 간다’는 법은 부자에게는 거의 적용되지 않지만, 가난한 사람은 이를 어길 가능성이 큽니다. 부자가 낙인에서 자유로운 이유는, 애초에 ‘일탈자’가 되지 않아도 되는 환경에서 태어났기 때문입니다.
범죄가 개인의 기질이 아니라 사회의 힘 때문에 발생한다고 주장한 대표적인 인물은 통계학자이자 사회학자인 아돌프 케틀레(1796~1874)입니다. 그는 범죄를 단순히 개인의 책임으로 돌릴 수 없으며, 사회 구조와 환경이 범죄를 낳는다고 보았습니다. 범죄는 “개인의 의지보다 사회 관습과 현실의 산물이며, 사회가 범죄를 유도한다”는 것입니다. 그의 이론 속에서 자유의지가 차지하는 자리는 매우 제한적입니다.
물론 법과 제도는 모두에게 공평하게 적용되어야 합니다. 하지만 현실에서 법은 종종 기득권층에 유리하게 설계되고 집행됩니다. 법을 만들고 집행하는 힘이 평등하게 분배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법은 대개 모호한 언어로 쓰여 있어, 누구를 어떤 근거로 기소할지는 자의적인 판단에 크게 좌우됩니다. 그 결과 기득권층은 다양한 방식으로 법의 적용에서 피하거나 면책되기도 합니다.
이러한 불평등은 법이 처음 등장한 고대 중국부터 나타났습니다. 기원전 535년 성나라와 기원전 512년 진나라에서 법전이 공표되자, 백성들은 두려움에 떨었습니다. 법이 사대부에게 유리하게 제정되었기 때문입니다. 사대부는 스스로를 자제할 수 있다는 전제 아래 법 적용에서 제외되었습니다. 이에 백성들은 자신들 역시 자제할 수 있다며, 법의 폭정에서 벗어나려 저항했습니다. 백성들은 그렇게 무도한 짓에 천벌이 따를 것이라고 경고하며 반발했습니다.
법의 제정과 집행이 특정 계층에게 유리하게 적용되는 문제는 역사 속에서 반복되어 왔습니다. 법체계는 언제나 모두에게 공평하게 발전하지 않았습니다. 종종 소수의 특권층에게 유리하게 만들어졌습니다. 그 결과 법이 말하는 정의(正義)는 일부에게만 이롭고, 다수에게는 해가 되기도 했습니다. 19세기 어느 사상가는 법과 권력의 결탁을 이렇게 비판했습니다.
“오늘날의 국가란 부자들이 결탁해 만든 산물이다. 부자들은 공공복지라는 미명 아래 사사로운 이익을 추구하고, 부당하게 얻은 재산을 지키느라 온갖 수단을 동원한다. 빈자들의 노동에 가능한 최소한의 보수만을 지급하며, 이들을 착취하기 위한 규정을 빈틈없이 만들어낸다. 그리고 빈자들을 포함한 전체 이름으로 포고하면서 이를 법이라 부른다.”
낙인이 찍힌 사람은 흔히 ‘기질의 문제’로 포장됩니다. 범죄의 원인을 개인의 성향 탓으로 돌리면, 개인을 통제해 범죄를 예방할 수 있다는 믿음이 생깁니다. 이런 단순한 해결 방식 때문에 기질 이론이 선호됩니다. 하지만 이런 접근은 낙인이 다른 원인에서 비롯되었을 가능성을 배제하게 됩니다. 즉, 사건이 ‘사회적으로 구성된 현상’이라는 사실을 놓치게 됩니다. 사건을 자유의지의 문제로만 이해하면, 구조적인 요인은 무시됩니다. 사람이 사건을 일으키기보다는, 사건이 사람에게 발생한다는 측면이 간과됩니다. 원인이 다른 곳에 있음에도 개인 탓만 하면, 우리는 배움과 성찰의 기회를 놓치게 됩니다. 철학자 흄은 이렇게 지적했습니다.
“행위 자체는 비난할 만하다. 행위는 도덕과 종교의 규칙에 어긋날 수도 있다. 하지만 행위자는 그 행위에 책임이 없다. 행위는 행위자 안의 지속적이고 항구적인 원인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며, 이후에도 지속적인 영향을 남기지 않는다. 따라서 행위자를 형벌이나 복수의 대상으로 삼을 수 없다.”
흄은 행위와 행위자를 분리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잘못된 행위를 규제하고 비판하는 일은 필요하지만, 이를 행위자의 본질적인 결함으로 환원하는 순간 사건을 낳은 구조적 조건은 보이지 않게 됩니다. 흄이 강조한 핵심은, 나쁜 행동이 곧 나쁜 사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는 점입니다.
자유의지라는 관념을 내려놓으면, 남을 쉽게 비난하는 태도에서도 벗어날 수 있습니다. 그들의 행동은 반드시 심사숙고의 결과가 아닐 수 있습니다. 행위자가 알든 모르든, 연쇄된 원인의 산물일 수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행동을 자유롭게 선택하지 않았습니다. 자유롭다는 착각에서 벗어나면 질문 자체가 달라집니다. ‘왜 그런 의도로 했을까’가 아니라, ‘왜 그렇게밖에 할 수 없었을까’라고 묻게 됩니다. 자유의지라는 개념을 배제하고 범죄자를 바라볼 때, 처벌에 대한 우리의 관점도 달라질 수 있습니다.
누군가 자신이 왜 그런 행동을 했는지조차 알지 못한다면, 그를 처벌하는 게 정당할까요? 처벌은 행위자가 자신의 의도를 모두 알 수 있다는 전제에서 가능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자신에 대해 모르는 게 많습니다. 본능도 육체도 정신 작용조차 완전히 알지 못합니다. 애초에 인간에게 결정권이 있었는지조차 분명하지 않습니다. 이런 상황이라면, 갖가지 행동에 책임을 어떻게 물어야 할까요? 어쩌면 잘못에 대한 책임을 묻는 것 자체가 틀린 질문일 수 있습니다. 올바른 질문은 ‘이 범죄자를 어떻게 처벌할 것인가?’가 아니라, ‘이 사람을 어떻게 다루어야 할까?’일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이성적일 때조차 통제할 수 없는 힘의 영향을 받습니다. 자유의지는 우리가 직관적으로 생각하는 것만큼 단순하지 않습니다. 자유의지에 대해 우리가 혼란스러워한다는 사실은, 누군가를 처벌할 때 자유의지를 의미 있는 근거로 삼기 어렵다는 점을 시사합니다.
이 사실을 받아들인다면, 형사사법제도의 초점을 처벌에서 재활로 전환해야 합니다. 핵심은 재범을 막고, 공동체를 더 안전하게 만드는 예방과 교정입니다. 자유의지에 대한 통념이 달라질 때, 범죄자를 판단하고 처벌하는 방식도 달라집니다. 행동의 많은 부분이 완전히 우리의 통제 아래 있지 않음을 인정할 때, 회복과 예방을 지향하는 접근이야말로 더 현실적이고 인도적인 제도가 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논의는 다소 낯설고 추상적으로 들릴 수 있습니다. 하지만 실제로 범죄자의 자유의지가 제한적이라고 보고, 처벌보다 태도 변화를 중시하는 ‘교화’나 ‘재활’ 중심의 교도소가 있습니다. 노르웨이 오슬로에서 남쪽으로 100킬로미터 떨어진 숲 속의 할렌(Halden) 교도소가 그 사례입니다. 마약 밀매자와 성범죄자, 살인자 등 250여 명이 수용된 이곳은 우리가 익히 아는 감옥과는 전혀 다른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할렌 교도소에는 감방이나 철장이 없고, 교도관도 권총이나 수갑으로 무장하지 않습니다. 대신 “우리는 수감자와 대화한다. 대화가 우리 무기다”라는 원칙 아래, 수감자와의 소통을 중심으로 교화와 재활에 초점을 둡니다. 수감자들은 바닥이 난방된 개인 방에서 생활하며, 방마다 평면 텔레비전과 전용 욕실이 갖춰져 있습니다. 주방에는 도자기 접시와 스테인리스 칼이 구비되어 있습니다. 도서관과 암벽등반 연습용 벽, 자신 음반을 녹음할 수 있는 음악 스튜디오까지 마련돼 있습니다.
할렌에서 불과 몇 킬로미터 떨어진 바스퇴위(Bastøy) 섬 전체도 교도소로 운영됩니다. 이곳에는 형기 말기의 중범죄자 100여 명이 수용되어 있습니다. 수감자들은 쇠창살 없는 독립 방갈로에서 지내며, 각 방(cell)은 침실과 독서 공간, 운동 공간으로 나뉘어 있습니다. 매일 마당에서 운동할 수 있습니다. 인터넷은 연결되어 있지 않지만 개인 컴퓨터를 사용할 수 있습니다. 수감자들은 비디오 게임을 하며 텔레비전과 신문도 허용됩니다. 또한 자원봉사자와 체스를 두거나, 교도소 내 집짓기 대회 같은 공동 활동에도 참여합니다.
바스퇴위에서는 수감자와 교도관이 함께 생활합니다. 수감자는 교도관과 함께 햄버거를 굽고, 수영하며 햇볕을 쬡니다. 교도관은 유니폼을 입지 않고 수감자와 함께 식사해, 서로 구분이 어려울 정도입니다. 섬에는 영화관과 일광용 베드, 스키 슬로프뿐 아니라, 교회와 식료품점, 도서관 같은 편의 시설도 갖춰져 있습니다.
노르웨이 사람들은 미친 걸까요? 살인자를 휴양지 같은 곳에 보내다니 믿기 어렵습니다. 하지만 바스퇴위 교도관들은 이를 당연하게 여깁니다. 교도소의 삶은 가능한 한 바깥 일상과 유사해야 한다는 신념을 갖고 있습니다. 그들은 수감자를 비하하거나 모욕하지 않고 친구처럼 대하며, 수감자의 사회 복귀를 돕는 걸 자신의 의무로 생각합니다. 노르웨이 교도소는 단순히 나쁜 행동을 막는 곳이 아니라, 나쁜 ‘의도’ 자체를 예방하는 데 초점을 둡니다.
이 사례는 인간 행동을 단순한 자유의지의 산물로 보지 않고, 사회적·환경적 요인 속에서 이해할 때 범죄 예방과 교화가 얼마나 현실적이고 효과적일 수 있는지 보여줍니다. 노르웨이의 혁신적인 교도행정은 성과로 입증되고 있습니다. 노르웨이의 5년 내 재범률은 20퍼센트로 세계 최저 수준이며, 특히 바스퇴위 교도소는 16퍼센트에 불과합니다.
반면 영국은 45퍼센트, 미국은 76퍼센트에 이릅니다. 미국은 1972년부터 2007년 사이 수감자 수가 인구 증가를 고려해도 500퍼센트 이상 늘었습니다. 평균 수감 기간은 63개월로, 노르웨이의 7배에 달합니다. 현재 전 세계 수감자의 5분의 1이 미국 교도소에 있으며, 마이애미 교도소에서는 24명이 한 방을 쓰고 2주에 한 번만 산책이 허용됩니다.
우리는 자유의지에 대한 과도한 주장을 삼가야 합니다. 어떤 사람이 폭력을 행사하지 않았다고 해서, 그것이 반드시 의식적인 ‘선택’의 결과라고 보기 어렵습니다. 대부분의 사람은 타인에게 고통을 주는 행동에 ‘반감’을 느낍니다. 이는 의식적인 선택이 아니라 무의식적인 감정 반응입니다.
흔히 우리는 자신이 옳고 그름을 판단할 줄 아는 정직한 사람이기에 나쁜 행동을 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인간의 대부분 행동이 의식적이고 의도적이라고 가정하곤 합니다. 심지어 무의식의 영향을 인정하더라도, 이를 의지력으로 극복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나쁜 행동을 피하는 이유는 그 행동이 그릇되거나, 법에 위반된다고 의식하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반감’을 느끼기에 그런 행동을 하지 않습니다. 많은 사람이 정직하게 사는 이유는 법적인 처벌보다, 예컨대 도둑질로 잡혔을 경우 가족이나, 친구, 동료가 알게 될 사회적인 오명이나 두려움이 더 크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범죄자가 범법 행위에 무의식으로 반감을 느끼도록 돕는 치료나 교화가 훨씬 효과적일 수 있습니다. 막연한 자유의지 강조보다, 범죄를 꺼리게 만드는 구체적인 치료나 교화가 필요합니다. 무엇보다, 죄인이 법을 준수하는 시민으로 사회에 복귀하는 걸 막는 처벌은, 아무리 옳게 보여도 피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