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장 길들이기
우리에게 익숙한 자유의지 개념은 꼭 필요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고대와 중세에는 지금과 달리 자유의지 개념이 거의 없었습니다. 우리가 의지로 선택했다고 믿는 일도 사실은, 무의식적으로 길들여진 결과일 수 있습니다. 예컨대 가축을 기르고 곡식을 재배하는 일이 의지에 따른 선택처럼 보이지만, 오히려 모르는 사이에 우리가 가축과 곡식에 길들여진 것일 수 있습니다.
종래 유목은 일찍이 인간이 동물을 통제하며 몰고 다녔다고 생각되어 왔지만, 실제는 달랐습니다. 기원전 3000년 이전에는 유목민 자체가 드물었습니다. 이후에도 초원 지역 사람들은 오랫동안 유목에 완전히 적응하지 못했습니다. 단순해 보이는 승마 기술조차 기원전 900년경에서야 널리 퍼졌습니다. 매년 수십 차례 가축을 몰고 옮겨 다니는 일은 인간에게 합리적인 선택이 아닙니다. 오히려 유목은 인간이 가축의 이동 습성에 맞춰 살아가는 방식입니다. 가축에 기생하는 삶, 그것이 유목입니다.
옥수수 역시 인간을 길들이는 데 성공한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옥수수는 인간을 자신에게 유리하도록 뛰어난 진화 전략을 구사했습니다. 옥수수는 인간이 선호하는 특징을 발달시켜, 우리 관심을 끌었습니다. 그 결과 옥수수는 현재 쌀이나 밀보다 더 많이 재배됩니다. 곡물 가운데 옥수수만큼 넓은 땅을 차지하며, 인간을 효과적으로 길들인 생물은 없습니다.
이처럼 자유의지 개념 대신, 바람직한 ‘길들여짐’이 더 현실적이고 매력적인 대안이 될 수 있습니다. 개인은 습관을 쉽게 바꾸지 못하지만, 법률 제정이나 정책 입안, 교육, 홍보 등을 통해 우리가 집단적으로 특정 행동을 하도록 길들여져 사회를 원하는 방향으로 이끌 수 있습니다. 이러한 ‘길들여짐’은 사회 전체에 긍정적인 영향을 주며, 거시적인 차원에서 바람직한 변화를 만들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변할 희망은 있을까요? 분명히 있습니다. 역사상 가장 폭력적이었던 바이킹족은 현재 평화를 사랑하는 스칸디나비아인으로 바뀌었습니다. 장기적인 추세를 보면, 전 세계 살인 사건 수는 일부 국가를 제외하고 크게 줄고 있습니다.
물론 부정적으로 길들여진 사례도 있습니다. 중세와 근대 초기 유럽에서 탐욕은 가장 저열한 악덕이었습니다. 그때부터 시작해 월스트리트의 ‘탐욕은 선이다!’나 우리나라의 ‘여러분, 부자 되세요!’ 같은 구호로 이어지는 과정에서 바람직하지 않은 ‘길들임’이 개입되었습니다. 한 사회의 성격은 수백만 명이 매일 쌓아가는 작은 행동의 결과입니다. 일상 속 관행을 바꾸면, 세상도 달라질 수 있습니다. 어려운 과정이지만, 매일매일의 습관을 바꾸면 궁극적으로 우리 자신도 달라질 수 있습니다.
로크는 인간에게 타고난 도덕성은 없다고 했습니다. 도덕 규칙은 교육과 환경, 자기 나라의 관습 속에서 배우는 결과일 뿐입니다. 인간은 경험을 통해 도덕을 배우며, 사회적으로 길들여집니다.
“우리는 아이들에게 도덕 이론을 주입한다. 아이들은 자라면서 이를 자신 양심에 내재된 진리로 받아들인다. 하지만 그 진리가 어떻게 주입되었는지 기억하지 못한 채, 마치 신이나 자연의 뜻이라 믿는다. 양심은 결국 우리가 학습한 도덕 지식에 따라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견해에 불과하다. 인간 영혼이 태어날 때 빈 서판이라면, 인간 간 차이는 외부 영향의 결과다. 교육과 사회 환경이 인류를 완성하는 핵심이다.”
존 스튜어트 밀은 “인간의 행위와 인격의 다양성을 단순히 타고난 천성 차이로 치부하는 건 인간의 마음에 미치는 사회적인 영향력을 무시하려는 가장 저속한 방식”이라고 지적했습니다. 인간은 다른 동물과 달리, 긴 유년기를 거치며 학습하고, 문화의 영향을 받으며 성장합니다. 이 덕분에 인간의 행동폭은 훨씬 넓고 다양하게 펼쳐질 수 있습니다.
제도나 구조를 바꾸려면 먼저 사회 구성원의 사상과 정신이 변해야 합니다. 특히 여론이 정치를 좌우하는 현대 사회에서 제도나 구조의 변화가 쉽지 않습니다. 더욱이 제도나 구조가 바뀌더라도, 이를 실천하는 개인이 바뀌지 않으면 근본적인 개혁은 이루어지기 않습니다. 이런 점에서 정치가보다 교육가의 역할이 중요합니다. 체계 개량보다 개인의 사상과 정신 개선이 본질적인 문제입니다.
마르크스는 파리코뮌(1871년 3월 18일부터 5월 28일까지 약 70일간 파리 시민들이 세운 민주적이고 혁명적인 자치 정부)에 대해 이렇게 논평했습니다. “자신을 해방하고, 더 고양된 사회를 쟁취하려면 긴 투쟁의 시간이 필요하다. 상황과 인간을 개조하는 역사적인 과정을 거쳐야 한다.”
인간은 세계를 향해 열린 창문과 같습니다. 그것도 창문이라는 실체가 아니라, ‘열려 있음’이라는 상태로 존재합니다. 개인에게 자유의지가 있다는 통념에서 벗어나, 무엇이 우리를 이끄는지 다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인간에게 자유가 있다면, 그건 절대적이고 순수한 자유가 아니라, 기존 관념이나 구조를 새롭게 만들 자유입니다.
인간 본성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런 건 없습니다. 인간이라는 종(種) 전체가 특정 특성을 공유하는 건 사실입니다. 하지만 인간 집단 전체가 이렇다, 저렇다고 단정하는 건 지나친 단순화입니다. 인간은 빈 그릇처럼, 그 안에 담기는 내용물에 따라 다양하게 정의됩니다. 이미 완성된 존재가 아니라, 미래의 가능성을 품고 스스로 실현해야 할 존재입니다. 신념 체계는 집단의 재평가와 사회적인 압력에 따라 변합니다. 집단은 생각을 바꿀 수 있으며, 실제 바꾸기도 합니다. 새로운 생각이 널리 퍼지는 데 한 세대면 충분합니다.
전통 형이상학에서 수천 년 동안 주장해 온 인간 본질이나 본성은 애초에 없습니다. 인간은 정치적인 동물이다? 이기적이다? 이성적인 존재다? 성선설? 성악설? 모두 쓸데없는 주장입니다. 존재하지 않는 인간 본성을 가정하기에 그렇습니다. 인간 본성을 왜곡해 인식하면, 해답을 찾을 때 틀린 답을 얻을 수밖에 없습니다. 인간이 어떤 존재가 될지는 오롯이 인간 자신에게 달려있습니다. 고자(告子, BC 420~350)는 인간 본성을 여울물에 비유했습니다. “인간 본성은 맴도는 여울물 같아, 동쪽으로 트면 동쪽으로 흐르고, 서쪽으로 트면 서쪽으로 흐른다.”
심리학자 스키너(1904~90)는 인간의 변화가 오직 환경의 변화를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보았습니다. 그는 또한 진정한 자유는 존재하지도, 존재한 적도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인간 본성은 역사와 환경이 만든 결과물이며, 인간은 본래 제약을 받습니다. 자유란 단지 자신에게 가해지는 통제를 느끼지 못하는 상태일 뿐입니다. 자율적인 인간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진정 자유를 얻으려면, 자율성의 한계를 인정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집단의 신념 체계는 어떻게 바꿀 수 있을까요? 먼저, 개인과 마찬가지로 집단 역시 병든 신념을 가질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다음, 인간 행동이 변할 수 있다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인간의 뇌는 경험에 따라 시냅스 가중치, 즉 신경세포의 연결 강도가 달라집니다. 약했던 신경세포의 연결이 특정 경험을 거치면 강화되고, 이후 같은 자극에도 더 강하게 반응합니다. 이를 시냅스의 ‘가소성’(plasticity)이라 하며, 경험과 학습이 뇌를 실제로 변화시킨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이를 바탕으로 사회심리학자 에리히 프롬은 우리 신념 체계를 변화시킬 네 가지 절차를 제시했습니다. (1) 우리는 고통을 겪고 있으며, 그 고통이 무엇인지 의식한다. (2) 우리는 그 고통의 원인이 무엇인지 안다. (3) 우리는 그 고통을 극복할 수 있다고 믿는다. 마지막으로 4) 그 고통을 극복하기 위해 특정 행동규범을 채택하고, 현재의 생활 습관을 바꿔야 함을 인식한다. 이 네 단계는 부처의 가르침인 사성제(四聖諦), 곧 고집멸도(苦集滅道)와 대응합니다. 또한 프로이트의 치료 과정과도 본질적으로 같습니다.
부처는 고통을 이해하고 끝내는 데 가장 깊은 관심을 두었습니다. 마음을 깊이 들여다보면 무엇이 우리를 고통으로 이끄는지, 그리고 어떻게 고통을 멈출 수 있는지 알 수 있습니다. 프로이트 역시 고통의 자각을 치유의 출발점으로 보았습니다. 그는 고통을 새롭게 해석할 때 비로소 치유가 가능하다고 했습니다. 우리 자신에 대한 깊은 이해를 바탕으로 새롭게 무엇을 할지는 전적으로 우리에게 달려 있으며, 그 선택에 따라 삶은 다양하게 펼쳐집니다. 삶의 의미를 이해하려면 우선 고통을 관찰하고, 그 본질을 이해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힌두 철학자 샹카라(788~820)는 깨달음을 잠에서 깨어나는 순간에 비유했습니다. 잠에서 깨어나면 꿈이 부정되듯, 깨달음은 경험 자체를 새롭게 보게 만듭니다. 그는 뱀과 밧줄을 비유로 들었습니다. 어둠 속에서 밧줄을 뱀으로 착각한 사람은 두려움과 고통을 느끼지만, 깨달음을 통해 그것이 밧줄이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우리가 고통을 느끼는 이유는 단지 밧줄에 불과한 어떤 현실에 ‘뱀’이라는 실체를 잘못 부여하기 때문입니다. 그 뱀은 결국 역사적인 사건이거나 사회적인 힘, 이데올로기 산물처럼 현실이 왜곡된 결과일 뿐입니다.
단테는 이렇게 질문했습니다. “우리 의지가 결국 삶과 아무 관련이 없다면, 그런 삶에 상을 주거나 벌을 내리는 건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는 자유의지를 단순히 어떤 삶을 살지, 무엇을 할지 스스로 선택하는 능력으로 이해하지 않았습니다. 자유의지란 오히려 완성된 삶을 향해, 욕망을 훈련할 수 있는 자유로운 상태였습니다.
단테에 따르면, 욕망의 훈련은 본래 국가와 교회의 의무입니다. 하지만 이들이 제 역할을 못하더라도, 우리는 스스로를 다시 교육할 자유가 있습니다. 감각과 욕망은 외부 자극에 쉽게 흔들리지만, 우리 의지는 그 감각을 어디에 집중할지 선택할 수 있습니다. 게다가 우리는 지성이 있기에 감각을 더 나은 방향으로 이끌 수 있습니다.
잔 로렌조 베르니니 <성 테레사의 황홀경>(1652)
성자 테레사는 꿈에서 천사가 황금빛 불타는 화살을 자신의 가슴에 꽂았을 때의 경험을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고통이 너무 커 비명을 질렀지만, 이상하게도 달콤한 기쁨이었고, 주님이 부드럽게 어루만지는 듯했습니다.”
우리 역시 테레사 성자처럼 고통 속에서 의미를 깨닫고, 그 경험을 통해 더 깊고 더 넓은 이해로 나아가길 희망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