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리란 무엇인가?

- 18장 독단

by 북다이제스터


18장 독단




“우리는 진리에 기댐으로써가 아니라

진리를 의심함으로써

진리에 대한 사랑을 표해야 한다.”

- 고병권





‘진리는 존재하는가?’라는 질문에 ‘모르겠다’고 답하면, 그 믿음은 회의주의(상대주의)입니다. 인간의 한계로 진리의 존재 여부를 단정할 수 없다는 입장이며, 하나의 보편적인 진리를 믿는 절대주의(객관주의)와 대비됩니다. 절대주의 입장에 서면 진리에서 벗어난 건 모두 오류나 허위로 간주되기에 세계가 단순해 보입니다. 반면 회의주의 입장에서는 각자가 선택한 진리가 곧 현실이 되므로, 삶은 훨씬 혼란스럽고 불확실해집니다.


고대 그리스의 소피스트 프로타고라스(BC 490?~415?)는 “인간이 만물의 척도다”(호모 멘수라, homo mensura)라는 말로 회의주의를 상징합니다. 그는 신은 물론 일상의 모든 판단에도 절대적이고 객관적인 진리가 없다고 보았습니다. 진리는 조건과 경험에 따라 달라지며, 참이나 올바름, 아름다움은 모두 상대적이고 주관적인 것입니다.


회의주의는 우리가 맡는 냄새가 경험과 결합되기 전까지 아무 의미도 없다는 사실과 닮았습니다. 갓난아이는 대변 냄새를 역겨워하지 않습니다. 성인이 되어서도 후각 취향은 사람마다 크게 다릅니다. 실제로 미 육군은 군중 제압용 악취탄을 개발하려 했지만, ‘모든 문화권에서 보편적으로 혐오하는 냄새’를 끝내 찾지 못했습니다. 결국 세상을 판단하는 기준은 각자의 경험과 인식에 따라 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소피스트 고르기아스(BC 485?~385?)는 프로타고라스의 회의론을 이어받아, 인간은 주관적인 감각 외에는 아무것도 알 수 없다고 보았습니다. 그는 이를 세 가지 명제로 정리했습니다.


(1)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 감각을 벗어난 본질은 존재하지 않는다. (존재론적 회의주의)

(2) 존재해도 알 수 없다. - 본질은 감각으로 전달되지 않으므로 알 수 없다. (인식론적 회의주의)

(3) 알 수 있어도 전달할 수 없다. - 설령 본질을 알 수 있다 해도 의사소통은 감각과 상황에 따라 달라지므로 절대적인 지식은 전할 수 없다. (윤리적·언어적 상대주의)


서양 철학사는 이 세 명제에 대한 응답의 역사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주장에 맞서 존재론의 철학사가, ‘존재해도 알 수가 없다’는 주장에 답하며 인식론의 철학사가, ‘알 수 있어도 전달할 수가 없다’는 문제를 다루며 윤리학과 언어철학의 역사가 전개되었습니다.


고대 그리스에서 소피스트는 원래 ‘현명한 사람’을 뜻했지만, 이후 ‘공허한 논변을 늘어놓는 사람’이라는 경멸적인 의미로 변했습니다. 보수적인 그리스인들은 소피스트의 사상이 무신론과 무정부 상태로 이어질 위험한 이론이라 보았습니다. 궁극적인 진리가 없고 선과 정의가 개인의 판단에 달려 있다면, 종교와 도덕, 국가는 물론 사회 자체가 유지될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이런 위기의식 속에서, 진리가 실재하며 절대적인 기준도 존재한다고 주장하는 새로운 철학이 등장했습니다. 이를 이끈 이들이 서양 철학사에서 가장 유명한 세 인물, 소크라테스와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였습니다. 플라톤은 소피스트를 그리스 문화의 적으로 묘사했습니다.


오늘날 연구자들은 일부 소피스트가 ‘나쁜 것을 좋게 보이도록 만드는 궤변’에 집착한 점은 인정하지만, 플라톤처럼 극단적으로 평가하진 않습니다. 오히려 플라톤이 편견에 사로잡힌 권위주의자였다고 보기도 합니다. 나아가 소피스트를 철학 발전에 기여한 ‘위대한 세대’로 평가하는 학자들도 있습니다.


소피스트는 대체로 고대 그리스의 노예제를 비판하고, 다른 종족을 배척하는 그리스인의 태도를 문제 삼았습니다. 전쟁을 어리석은 행위로 보았으며, 아테네 시민의 맹목적인 애국심과 외국인 혐오를 조롱했습니다. 또한 평민의 권리를 옹호할 만큼 실용적이고 진보적인 시각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소피스트들은 윤리학의 새로운 지평도 열었습니다. 인간이 만물의 척도라면 도덕 역시 절대적일 수 없고, 상황에 따라 변하는 규범일 뿐입니다. 도덕 규칙에는 고정된 본질은 없으며, 사회가 잠정적으로 합의한 인습에 가깝다고 보았습니다. 특히 트라시마코스(BC 459~400?)는 ‘정의란 강자의 이익’이라 하며, 도덕은 힘 있는 자가 자신의 요구를 관철하고자 만든 규칙에 불과하다고 주장했습니다. 이는 2천 년 뒤 니체의 ‘강자의 도덕’과 맞닿아 있습니다.


소피스트들에 따르면 진리는 본질적으로 만들어진 것입니다. 객관적인 진리가 존재한다는 믿음조차 사회가 만든 신화일 뿐입니다. 우리는 진리를 인식한다기보다, 진리라는 관념 자체가 우리 정신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니콜라이 게 <진리란 무엇인가?>(1890)



그림에서 본디오 빌라도는 손짓하며 예수에게 ‘진리란 무엇인가?’라고 묻습니다. 밝은 빛 아래 서 있는 크고 당당한 빌라도는 세속의 논리를 상징합니다. 반면 어둠 속에서 수척한 모습으로 묵묵히 서 있는 예수는 정신세계의 논리를 대변합니다. 빌라도는 조롱하는 듯 묻고, 예수의 얼굴에는 무거운 침묵이 드리워져 있습니다.


진리는 현실 속에서 쉽게 드러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진리는 눈앞의 현상을 넘어선 어딘가에 존재하는 것일까요? ‘진리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은 여전히 우리 앞에 남아있습니다.



고대 소피스트와 달리, 서양 철학은 오랫동안 참이나 올바름, 아름다움에 변치 않는 본질이 있다고 믿었습니다. 하지만 1930년대 이후 많은 철학자는 더 이상 절대적인 진리, 곧 참된 앎이 있다고 믿지 않게 되었습니다. 진리가 존재하려면 그 기반이 되는 단일하고 고정된 본질이 있어야 하지만, 그런 본질이 있다고 확신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는 말은 하이데거(1889~1976)나 사르트르(1905~80) 같은 실존주의 철학자들의 핵심 주장입니다. 그들에 따르면 사물이나 인간에게 고정된 의미를 부여하는 이상적이고 추상적인 본질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실존철학은 인간을 ‘세계-내-존재’(being-in-the world)로 이해합니다. 인간은 늘 자신의 의지를 벗어난 조건 속에 놓여 있으며, 환경과 상황이 우리의 정체성 형성에 깊이 관여합니다. 자아는 고립된 실체가 아니라, 주변 세계와 상호작용하며 형성되는 존재입니다.


철학자 에드문트 후설(1859~1938)은 ‘사물의 현상 그 자체로!’라는 현상학의 표어 아래, 사상이나 이념에 비롯된 선입견에서 벗어나 현상을 있는 그대로 기술하려 했습니다. 많은 종교와 전통 사상은 현상 너머의 본질을 상정하고, 그 실체를 탐구하려 했습니다. 하지만 본질은 결코 우리에게 직접 드러나지 않기에 학문의 대상이 될 수 없습니다. 후설은 전제나 선입견 없이 눈앞에 드러난 현상을 엄밀히 분석할 때 더 순수하고 확실한 지식에 도달할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비트겐슈타인은 우리가 ‘옳은 것’이나 ‘아름다운 것’의 구체적인 사례를 본 뒤, 거꾸로 추상적인 본질을 만들어낸다고 보았습니다. 우리는 습관적으로 사물의 유사한 특성을 관찰한 뒤 조잡한 보편 관념을 만들어냅니다. 그로부터 텅 빈 껍데기에 불과한 가장 단순한 단어를 추론합니다. 그런 과정을 통해 ‘인간’이나 ‘여자’ ‘선’ ‘악’ 같은 일반적이고 보편적인 단어가 실제 본질을 가리킨다고 믿게 됩니다.


하지만 ‘일반적인 여자’는 ‘일반적인 남자’만큼이나 존재하지 않습니다. ‘선’과 ‘악’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개념은 참된 실재라기보다, 언어가 만들어낸 표현일 뿐입니다. 아무리 많은 사례를 모아도 모든 사람에게 동일하게 적용되는 ‘보편적인 선’ 같은 본질은 없습니다. 비트겐슈타인은 이런 본질을 추상화하려는 충동 자체가 우리 언어 구조의 한계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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