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장 독단
과학 외의 다른 분야라면 진리가 시대나 문화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는 사실을 쉽게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과학은 회의주의나 상대주의를 거부하고 객관적인 탐구를 지향합니다. 엄밀한 탐구 방법과 증거를 기반으로 합니다. 과학자는 가설을 세우고 실험으로 검증합니다. 실험 결과가 반복되고 오류가 없으면, 가설은 이론으로 살아남습니다. 이 규칙은 엄격히 적용됩니다. 과학에는 진리를 찾는 데 특별한 변명거리는 필요치 않습니다.
그렇다면 과학이 말하는 ‘진리’란 무엇일까요? 같은 진리라도 시대에 따라 달리 보였습니다. 과학사에는 한때 정설이었지만 나중에 오류로 판명된 사례가 적지 않습니다. 지구 평면설이나 천동설, 에테르(빛이 나아가는 데 필요한 매질로 생각되던 가상 물질), 저온 핵융합, 우주상수 등이 그 예입니다. 과학은 오류를 인식하고 수정하며 나아가지만, 수정된 이론도 시간이 지나면 다시 오류로 판명되기도 합니다. 믿을 만해 보였던 이론조차 결국 틀린 것으로 밝혀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과학이 보여주는 이러한 진리의 가변성은 정치나 경제, 법, 종교, 교육 등 다른 영역에도 적용됩니다. 한 세대의 진리가 다음 세대에는 오류로 드러나기도 합니다. 개인의 삶도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는 나이가 들며 확신했던 신념 중 일부를 버립니다. 이론을 세웠다가 어느 순간 그것을 버려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불완전한 감각이나 제한된 사고 능력, 들쑥날쑥한 기억력, 복잡한 환경 속에서 우리는 끊임없이 잘못된 믿음을 만들고, 또 그것을 바로잡으며 살아갑니다.
물리화학자 마이클 폴라니(1891~1976)는 과학이 끊임없이 수정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고 지적했습니다. 그는 “관찰과 실험을 통한 새로운 발견은 대개 과대평가되어 있다”고 말했습니다. 과학이 하는 일은 전혀 새로운 사실을 찾아내기보다, 이미 알려진 사실을 새로운 틀로 재해석하거나 더 의미 있게 설명하는 데 가깝다는 것입니다. 이런 발견은 종종 게슈탈트적입니다. 이전에는 의미가 없던 것이 어느 순간 갑자기 ‘눈에 확 들어오는’ 경험과 비슷합니다. 어떤 학문이든 이론은 끊임없이 변화하는 세계를 잠시 고정해 두려는 시도일 뿐이며, 그 이론도 인식하는 사람과 대상, 그리고 그것을 표현하는 언어가 우연히 맞아떨어진 결과에 지나지 않습니다.
폴라니는 과학이 추구하는 객관적이고 초월적인 진리의 전통이 기독교에서 비롯되었다고 보았습니다. 기독교는 개별 사실을 넘어선 ‘초월적 진리’가 바깥 어딘가에 존재하며, 인간이 그걸 발견하기를 기다린다는 관념을 심어주었습니다. 그는 이러한 기독교 세계관이 과학의 근저에 자리 잡고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하지만 자연은 본래 복잡하고 예측하기 어렵습니다. 인간은 이러한 자연을 이해하고자 자연을 실험실로 옮기고 일부를 선별해 규칙적인 현상으로 재구성합니다. 하지만 실험실에서 재현된 현상은 실제 자연의 복잡성과 거리가 있습니다. 실험은 자연의 일부분만 다루며, 그것마저도 인위적으로 단순화한 결과이기 때문입니다. 실험은 결코 완전한 자연을 담아낼 수 없습니다. 이 점을 놓치면 과학이 확실하다는 착각에 빠지기 쉽습니다.
우리는 물리 세계를 이해하고자 궁극적인 진리를 추구한다고 믿습니다. 하지만 어떤 시대의 과학도 그 시대 사람들에게 세상의 진리를 알려주지 않습니다. 과학은 그 시대 사람들이 세상을 어떻게 이해했는지를 보여줄 뿐입니다. 수학적인 예측이 실험과 정확히 일치해도, 우리가 마주하는 건 자연 그 자체가 아니라 자연에 대한 인간의 해석일 뿐입니다.
과학자는 전자 같은 외부 대상을 연구한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 다루는 건 자연 그 자체가 아닙니다. 우리는 전자의 물리적인 실체를 거의 모릅니다. 전자는 질량과 전하가 있는 입자처럼 보이지만, 사실 전자장이 만들어낸 현상일 뿐입니다. 과학이 말하는 전자의 속성은 인간이 구성한 수학 체계 속에서 정의된 개념입니다. 전자는 독립된 실체가 아니라, 전자장의 형상에 지나지 않습니다.
전자나 양성자가 전하를 띤다고 할 때, 이는 중성자에 없는 특별한 에너지가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전하는 입자들이 서로 밀고 끌어당기는 방식에서 정의된 성질일 뿐입니다. 그래서 어떤 물리학자는 전하를 “일종의 태도”로 비유했습니다. 전하는 실체라기보다, 우리가 어떤 사람에게 “저 사람은 카리스마가 있어”라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는 우리가 전하의 정체를 여전히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사실 과학이 말하는 자연법칙은 자연 속에 그대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자연을 이해하려는 인간이 만든 ‘모델’에 불과합니다. 철학자 에밀 부트루(1845~1921)가 지적했듯, 자연법칙에는 우리가 발견했다고 믿는 필연성이 있다고 단정할 수 없으며, 실제 자연은 우리가 만든 법칙과 전혀 다를 수도 있습니다.
에너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매 순간 에너지를 접하지만, 그것이 무엇인지 정확히 설명하지 못합니다. 에너지는 외부 세계의 실체라기보다, 관찰된 현상에 질서와 의미를 부여하고자 만든 개념일 수 있습니다.
유전자 또한 구체적인 실체라기보다 인간이 만든 추상적인 ‘모델’에 가깝습니다. 생명 정보가 DNA 염기서열이라는 암호로 세대를 거쳐 전달된다는 설명은 하나의 모델일 뿐, 실제와 완전히 일치한다고 단정할 수 없습니다. 어쩌면 이 개념은 인류가 만들어낸 가장 멋진 ‘이야기’ 중 하나일지 모릅니다. 결국 생명의 참된 본질은 영원히 알 수 없는 채로 남을 수도 있습니다.
유전학자 리처드 르윈턴(1929~2021)은 DNA 모델 자체에 이미 이데올로기가 스며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그는 염기서열에서 원인과 결과를 일대일로 대응시키려는 사고가 지나치게 단순하며, 실제 생명 현상을 설명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다고 비판했습니다. 그 결과 DNA 연구는 암이나 심장병, 뇌졸중 같은 주요 질병 치료에서 아직 뚜렷한 성과를 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르윈턴에 따르면, DNA 모델은 과학적인 이해나 치료보다 과학자들의 경제적인 이익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는 저명한 유전공학자 가운데 생명공학 산업과 재정적으로 무관한 사람은 거의 없다고 지적했습니다. 과학은 언제나 순수한 탐구심만으로 움직이지 않습니다. 종종 돈이나 명예, 욕망, 실수로 잘못된 방향으로 나아가기도 합니다.
사실 과학은 사물의 본질을 탐구하지 않습니다. 과학의 목표는 사물 자체가 아니라, 사물들 사이의 관계를 밝히는 데 있습니다. 수학자 푸앙카레(1854~1912)가 말했듯, “우리가 알 수 있는 실재는 그 관계뿐”입니다. 따라서 과학의 핵심 질문은 ‘왜’가 아니라 ‘어떻게’입니다. 우리는 열과 빛, 전기 자체를 알지 못하지만, 그것들이 관찰 가능한 범위와 조건에서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이해할 따름입니다.
갈릴레이도 “낙하하는 물체가 왜 가속되는지를 찾는 것이 연구의 핵심이 아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는 자유 낙하하는 물체가 어떤 방식으로 가속되는지를 관찰하고 기술하는 데 집중했습니다. 그의 연구는 자연법칙을 알려주는 듯하지만, 근본 원인을 설명하지는 못합니다.
갈릴레이는 과학이 궁극적인 원인을 찾는 일과는 무관하다고 보았습니다. 물리적인 원인을 규명하려는 시도 자체가 불가능하며, 과학자의 임무는 현상을 수량화해 설명하는 데 있다고 강조했습니다. 전지전능한 신이 세상을 마음대로 할 수 있다면, 인간은 자연의 본질을 결코 알 수 없다는 입장이었습니다.
뉴턴 역시 근본 원인보다 수학적인 접근을 중시했습니다. 그의 천체 역학의 핵심인 중력은 당시에도, 지금도 그 실체가 명확히 밝혀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수백만 킬로미터나 떨어진 두 물체가 서로 끌어당긴다는 설명은 직관적으로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뉴턴은 중력을 물체 간의 인력(引力)으로 보았지만, 아인슈타인은 이를 공간의 휘어짐으로 해석했습니다. 오늘날에는 중력자를 가정하지만, 그 존재도 확인되지 않았습니다.
과학은 근본 원리를 밝히지 못할 뿐 아니라, 수학적인 관계를 통한 설명에도 한계를 드러냅니다. 예컨대 뉴턴 역학은 두 물체가 서로 끌어당기는 이체(二體) 문제는 정확히 기술할 수 있지만, 세 물체가 동시에 중력 영향을 주고받는 삼체(三體) 문제에서는 더 이상 해답을 제시하지 못합니다. 삼체 문제란 항성이나 행성 세 개가 서로 중력으로 영향을 주고받을 때, 그 운동이 어떤 궤도를 따르는지를 다루는 문제입니다.
삼체 문제의 공간 상태는 18차원입니다. 우선 물체 하나의 운동을 나타내려면 여섯 가지 정보가 필요합니다. 3차원 공간에서 위치 좌표 3개와 각 좌표마다 속도를 나타내는 값 3개가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세 물체를 기술하려면 6 × 3 = 18차원이 필요합니다. 이런 고차원 체계에서는 예측과 계산이 매우 어렵습니다.
행성의 궤도 운동은 원리적으로 결정되어 있지만, 초기 조건을 완전히 알 수 없어 천체의 위치와 운동을 예측하는 건 사실상 불가능합니다. 이를 ‘결정된 혼돈’이라 합니다. 태양계 초기의 모든 천체 위치와 운동을 완벽히 알고 무한한 계산 능력이 있다 해도, 현재의 위치와 움직임을 정확히 계산할 수 없습니다. 초기 위치와 운동이 우연히 조금만 달라져도 지금의 태양계는 크게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과학자들은 수백 년 동안 삼체 문제에 도전했지만, 끝내 완전한 해답을 얻지 못했습니다. 베이컨의 말처럼 자연의 정교함은 인간의 꾀를 훨씬 넘어섭니다.
사람들은 날씨처럼 우연성이 지배하는 복잡계는 예측하기 어렵다는 사실을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삼체처럼 단순해 보이는 체계조차 예측할 수 없다는 사실은 큰 충격이었습니다. 이는 결정론과 예측 가능성을 순진하게 믿던 사람들에게 실망을 안겨주었습니다. 더 나아가 우주와 지구의 영역을 넘어 생명과 인간의 영역으로 오면, 우연의 역할은 더 커지고 이해는 더욱 어려워집니다. 우연은 인간 인식의 한계를 넘어서는 문제입니다. 경제와 사회, 세포 활동, 면역계, 유전자, 뇌, 의식 등 우리 시대의 여러 난제가 일부 해결될 수는 있겠지만, 큰 진전은 쉽지 않아 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