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장 독단
중세 유럽 사상가들은 플라톤의 『티마이오스』(BC 360?)에서 큰 영향을 받았습니다. 플라톤은 인간이 이성으로 우주를 이해할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이에 따라 중세 사상가들은 신이 인간에게 이성을 주었으며, 이성이 인간을 동물과 구별하는 핵심이라 믿었습니다. 또한 신은 합리적으로 운행하는 우주를 창조했고, 인간도 그 일부로서 합리적이기에 그 원리를 이해할 수 있다고 여겼습니다.
이런 중세 사상은 16~17세기에 ‘자연법칙’ 개념으로 발전했습니다. 당시 중앙집권 국가의 등장과 ‘입법자로서의 신’이라는 기독교 사상이 결합하면서, 신이 자연에도 법을 부여했다는 믿음이 생겼습니다. 데카르트는 자연법칙 개념을 거의 처음 적용한 과학자로, 자연뿐 아니라 사회와 역사에도 법칙이 작용한다고 보았습니다. 그는 인류 역사를 인과관계로 이해하려 했습니다.
물론 과학 탐구로 일정한 법칙과 질서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자연 전체에 보편적으로 적용된다고 확신하는 건 논리의 비약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아는 법칙은 특정 조건과 한계 내에서만 성립합니다. 자연 전체를 아우르는 질서는 결코 직접 경험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이해하는 법칙은 단지 자연의 파편일 뿐, 인간은 그 복잡성과 무한성을 온전히 조망할 지점에 결코 도달할 수 없습니다.
우주는 왜 미천한 인간이 사용하는 논리를 따라야 할까요? 인간이 어떻게 우주에 존재하는 보편적인 자연법칙을 이해할 수 있을까요? 감각과 이성 모두 완벽하지 않은 인간이, 존재하는지조차 모르는 우주의 보편법칙을 발견하고 이해할 수 있을까요? ‘우주의 보편법칙을 이해하는 인간’이라는 관념은, 우연히 진화한 인간에게 지나치게 과도한 능력을 부여할 때나 가능합니다. 인간은 완벽한 적이 없었습니다. 완벽하지 않은 인간이 만든 관념이 완벽할 수 없습니다.
아인슈타인은 “우주에 대해 가장 이해할 수 없는 점은 인간에게 우주가 이해된다는 사실”이라고 말했습니다. 수리물리학자 유진 위그너(1902~95) 역시 <자연과학에서 수학의 터무니없는 효율성에 관해>(1960)라는 논문에서, “물리학 법칙을 설명하는 데 수학이 놀라울 정도로 잘 들어맞는 건 한 마디로 기적이다. 우리가 이해할 수도, 누릴 자격도 없는 경이로운 선물”이라며, 이것이 단순한 우연인지, 아니면 더 깊은 이유가 있는지 의문을 제기했습니다.
뉴턴 시대에도 마찬가지였지만, 과학자들은 종종 자기 시대의 과학을 최첨단으로 여기며, 중요한 발견은 거의 다 이루어졌다고 믿는 경향이 있습니다. 1996년 과학저술가 존 호건(1953~ )은 주요 과학 문제들이 이미 해결되었다고 주장했습니다. 생물학은 이제 다윈 이론의 각주에 불과하며, 물리학은 빅뱅 발견 이후 사소한 연구만 남았다고 보았습니다.
반면 화학자이자 물리학자인 존 매독스(1925~2009)는 물리학이 본질적으로 임시적이라고 강조했습니다. 그는 블랙홀이 단지 ‘추정’에 불과하며, 만유인력 법칙은 “신념이나 희망의 표현”이라 평가했습니다. 양자중력 연구가 답보 상태인 이유는 “무엇을 해결해야 할지조차 명확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지적했습니다. 또한 빅뱅이 우주의 시작이라는 개념은 “결국 거짓으로 판명될 것”이라 말했습니다. 그는 과학이 세계를 압도한 현상은 20세기 들어 처음 나타난 것이라고 덧붙였습니다.
우주 역사 138억 년을 1년으로 압축하면, 1월 1일 0시에 빅뱅으로 우주가 탄생했습니다. 지구는 9월에 생겼고, 생명체는 9월 25일쯤 등장했습니다. 마지막 날인 12월 31일 21시 45분에 인류는 두 발로 걷기 시작했습니다. 23시 59분 59초경, 갈릴레이가 망원경으로 밤하늘을 처음 올려다보았습니다. 이렇게 보면, 근대 과학의 역사는 우주 달력에서 1초도 채 되지 않습니다.
세상을 이런 프리즘으로 바라보는 관점을 ‘딥타임’(deep time)이라 합니다. 이 시각은 우리가 우주의 근본 원리를 이해했다고 믿는 확신의 오만함에서 벗어나게 합니다. 우리는 여전히 출발선에 선 초보자에 불과합니다. 지금이 완벽한 시대라, 우리가 포괄적으로 과학을 수행할 최초의 운 좋은 세대라고 믿을 수 있을까요? 아니면 백 년 뒤 사람들이 우리를 돌아보며 “그때 사람들은 왜 그리 무지하게 살았을까”라고 말할 가능성이 더 클까요?
폴 세잔 <사과와 오렌지가 있는 풍경>(1899?)
세잔은 자신이 보는 형상이 진실인지,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지 끊임없이 자신에게 질문했습니다. 그는 대상을 바라보고 연구하며, 마치 수행하듯 그림을 반복해서 그렸습니다.
400년간 서구 회화는 캔버스를 열린 창으로 상상하며 원근법을 구현했지만, 세잔은 달리 생각했습니다. 인간은 두 눈을 끊임없이 움직이며, 다양한 각도에서 사물을 봅니다. 하지만 기존 원근법은 고정된 렌즈 하나로 세상을 보는 카메라와 같았기 때문입니다. 세잔은 움직이지 않는 시점이 미술의 한계라고 생각했습니다.
이 작품은 여러 시점이 공존하는 정물화입니다. 그는 세로 74센티미터, 가로 93센티미터 크기의 그림을 완성하는 데 6년을 바쳤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자연은 매우 복잡한 형태로 모습을 드러내기에, 작업은 천천히 진행되고, 앞으로 갈 길은 끝이 없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