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

- 18장 독단

by 북다이제스터



존 로크는 “지식을 얻는 유일한 관찰”이라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인간의 감각은 완벽하지 않습니다. 철학자 데모크리토스가 “진실은 깊은 곳에 있다”고 했듯, 실재는 겉보기와 다를 수 있습니다. 감각에 의존한 지식, 곧 과학은 종종 틀릴 수 있습니다. 과학 이론은 데이터에 달려 있고, 그 데이터는 과학자가 던진 질문에, 그 질문은 그의 상상력에 달려 있습니다. 그 상상력도 결국 감각에 의해 제한됩니다.


예컨대 우리는 세상을 눈으로 보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뇌로 봅니다. 1897년 심리학자 조지 스트래튼(1865~1957)는 세상이 거꾸로 보이는 안경을 쓰고 실험했습니다. 처음엔 어지럽고 혼란스러웠지만, 여드레 만에 적응해 세상을 똑바로 보기 시작했습니다. 애초 우리는 망막에 맺힌 상을 뒤집어 보기 때문입니다. 그는 자전거도 탔지만 사고는 없었습니다. 이 실험은 우리가 눈이 아니라 뇌로 본다는 증거였습니다.


전통적으로 눈이 정보를 보내고 뇌가 이를 처리한다고 여겨졌지만, 실제 과정은 정반대입니다. 뇌가 먼저 ‘예측 모델’를 만듭니다. 뇌는 상상하고 예측한 뒤 그 모델을 눈에 보내고, 눈은 실제 정보와 이를 비교합니다. 둘이 일치하면 그 정보는 아예 뇌로 전달되지 않습니다. 눈은 초당 9,200만 비트의 시각 정보를 받지만, 뇌로 전달되는 건 약 60비트에 불과합니다. 뇌는 정신이 쏟는 에너지를 아끼고자 빠르게 추측하고, 예상치 못한 정보만 처리합니다. 결국 우리의 시각은 완전한 재현이 아니라, 뇌가 세운 가설 위에 덧붙여진 얇은 실제의 흔적일 뿐입니다.


이 원리는 촉각에도 적용됩니다. 뇌는 손이 닿기 전 감각을 예측하는 모델, 즉 신경과학자들이 말하는 ‘사전 표상’(prior representation)을 만들고, 실제 감각과 비교합니다. 예컨대 오른손으로 오른쪽 볼을 만질 때와 오른손을 머리 뒤로 넘겨 왼쪽 볼을 만질 때 느낌이 다른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뇌는 평소 오른손은 오른쪽 볼, 왼손은 왼쪽 볼을 만지는 데 익숙합니다. 평소의 패턴이 깨지면, 뇌는 새로운 예측을 세워야 합니다. 이 예측 구조 때문에 우리는 스스로를 간질여도 간지럽지 않습니다. 뇌가 이미 예측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반면 다른 사람의 손길은 예측할 수 없어 간지럼을 느낍니다.


결국 우리는 감각보다 머릿속 예측에 더 의존해 세상을 인식합니다. 보고 만지는 모든 경험은 무의식적인 예측과 상상에 좌우됩니다. 말 그대로 우리는 ‘아는 만큼만’ 봅니다. 지각은 바깥세상의 입력보다 뇌 내부의 처리 과정과 더 깊이 얽혀 있습니다.


더 큰 문제는 ‘뇌가 본’ 세계가 실제와 얼마나 일치하는지 확인할 방법이 없다는 점입니다. 내가 본 사과가 실제 시과와 같은지 알려면, 뇌가 인식한 것과 실제 사과를 직접 비교해야 합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습니다. 우리는 자신의 의식 밖으로 나가 뇌가 본 것과 실제 대상을 비교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결국 모든 감각 경험은 언제나 의심의 여지를 남깁니다.


우리 뇌는 ‘정확한 이해’보다 ‘빠르고 간편한 이해’를 선호하도록 진화했습니다. 시각은 단순히 눈으로 보는 게 아니라, 망막에서 받은 정보와 뇌의 상상력이 합쳐 만들어낸 결과입니다. 이 과정은 무의식에서 일어나기에, 우리는 자신 행동과 지각을 온전히 알지 못합니다. 뇌는 현실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늘 해석하고 상상하며 이미지를 만듭니다. 그래서 우리는 언제든 현실을 잘못 읽을 수 있습니다.



르네 마그리트 <금지된 재현>(1937)



그림 속 남자는 거울 앞에 서 있습니다. 하지만 거울 속에는 그의 얼굴이 아니라 그의 등이 보입니다. 반면 책은 좌우가 뒤바뀐 채 정상적으로 비칩니다. 거울 자체에는 아무 이상이 없습니다.


마그리트는 이 기묘한 장면을 통해, 거울이 현실을 언제나 있는 그대로 반사한다고 믿는 우리의 확신을 흔듭니다. 거울이 왜곡된 이미지를 보여 주듯, 우리의 시각 역시 현실을 그대로 재현하는 장치가 아닙니다. 보는 순간 이미 해석이 개입되고, 그 해석은 언제든 어긋날 수 있습니다.



결국 우리가 아는 세계는 ‘있는 그대로의 세계’가 아니라, ‘뇌가 재구성한 세계’입니다. 칸트가 자신의 철학 업적 중 코페르니쿠스적인 혁명이라고 자화자찬한 바에 따르면, 우리 마음이 세상에 일치하도록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우리 마음에 맞을 때만 비로소 인식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인식이 대상에 따라야 한다고 가정해 왔다. 하지만 이 전제 아래서는 대상에 대한 선험적인 인식이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반대로, 대상이 우리의 인식에 따라야 한다고 가정하면 어떨까? 이렇게 하면 형이상학의 문제를 더 잘 다룰 수 있고, 대상들에 대한 선험적인 인식도 가능해진다. 이 생각은 코페르니쿠스의 혁명과 같은 의의를 갖는다.”


칸트는 철학의 과제를 ‘세계가 무엇인가’가 아니라, ‘인간이 세계를 어떻게 경험하는가’ ‘인간에게 세계는 어떻게 보이는가’를 밝히는 데서 찾았습니다. 인간이 분석할 수 있는 건 세계 자체가 아니라, 인간이 인식한 것뿐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세계를 두 가지로 나누었습니다. 우리의 감각에 드러나는 세계를 ‘현상’, 그 너머의 진짜 세계를 ‘물자체’라고 불렀습니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우리가 알 수 있는 건 오직 현상뿐입니다. 물자체, 즉 사물의 실체 자체는 결코 알 수 없습니다. 인간에게는 필터 같은 것이 갖추어져 있고, 그걸 통과한 것밖에는 보이지 않습니다. 필터를 빼고서는 세계가 어떻게 되어 있는지 알 수 없습니다. 칸트는 이 필터를 ‘초월적인 것’ 또는 ‘선험적인 것’이라고 불렀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경험하는 세계는 언제나 뇌가 해석한 세계이며, 있는 그대로의 세계가 아닙니다. 인과관계조차 사물 자체의 성질이 아니라, ‘현상’을 정돈하고 분류하는 인간의 인식 방식입니다. 이 때문에 과학 역시 현상 세계만 설명할 수 있을 뿐, ‘물자체’는 끝내 알 수 없는 영역으로 남습니다. 결국 우리가 마주하는 삼라만상은 그대로의 현실이 아니라, 인간의 인식 구조를 통과해 구성된 세계입니다.


칸트보다 1,500년 앞서 인도 승려 용수는 진리를 둘로 나누었습니다. 인간 인식을 초월한 절대적인 진리를 진제(眞諦)라 했습니다. 반면 언어나 개념으로 드러나는 현상 세계의 진리를 세속제(世俗諦)라 했습니다.


진제의 영역에서는 공(空)이 적용되기에 사물의 궁극적인 실상은 언어나 논리로 표현할 수 없습니다. 반면 세속제에서는 공이 연기(緣起)를 통해 현상으로 드러나며, 상대적인 세계가 이루어집니다. 우리가 경험하는 모든 사물은 개별 존재처럼 보이지만, 깊이 들여다보면 그 실체성은 환(幻)이자 공(空)입니다.


용수 이후 힌두 철학자 샹카라 역시 감각 경험이 사물의 참된 본질을 드러내지 못한다고 보았습니다. 감각은 ‘현상’만 보여줄 뿐이며, 이를 실체로 착각하는 것이야말로 인간의 가장 큰 환상이라고 그는 말했습니다. 결국 경험만으로 세계의 본질을 알 수 있다는 믿음 자체가 오류입니다.


우리는 보통 대상이 실제로 존재하고, 주체가 그것을 객관적으로 인식한다고 믿습니다. 하지만 유식(唯識) 불교는 이를 뒤집어 ‘유식무경’(唯識無境)을 주장합니다. 오직[唯] 우리의 인식[識]만 있을 뿐, 그 바깥에 독립된 객관적인 세계[境]가 없다[無]는 뜻입니다. 우리가 경험하는 세계, 마치 인식 바깥에 실재한다고 여겨지는 세계는 우리의 인식 구조나 개념 틀에 따라 형성된 것에 불과합니다. 말 그대로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 즉 모든 건 마음이 만들어낸 것입니다.


세상이 객관적이라는 믿음은 꿈을 현실로 착각하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경(境)은 본래 허망하며, ‘변계소집성’(遍計所執性) 즉, 주관적인 시각으로 대상을 항상 잘못 인식하는 특징이 있습니다. 유식 불교는 이 허망함을 깨달을 때 비로소 ‘객관적인 세계’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참고로, 서양에서 불교에 대한 관심은 16세기 스리랑카 점령이나 17세기 중국 선교를 계기로 본격화되었습니다. 마테오 리치(1552~1610) 같은 선교사뿐 아니라, 스피노자와 라이프니츠, 칸트, 볼테르, 괴테, 헤겔, 쇼펜하우어, 니체 같은 유럽 사상가들도 불교 사상에 주목했습니다. 철학자 파울 도이센(1845~1919)은 이를 두고 “마치 다른 행성의 주민이 전혀 다른 방식으로 세계를 표상(representation: 자신 머릿속에 먼저 체계를 정해놓고 그에 따라 현실을 경험하는 것)하는 법을 보여 준 사건”이라고 평가했습니다.”


세상을 이해하려면, 뇌 안에 이미 세계를 바라보는 지식과 경험이 자리 잡고 있어야 합니다. 이런 틀이 없다면 감각 자극은 무질서한 신호에 불과합니다. 뇌는 이를 분류하고 재배열하며, 때론 아예 무시하기도 하면서 의미를 부여합니다. 실재는 뇌가 만들어 냅니다. 우리 두뇌는 익숙한 패턴에 맞추어 세계를 이해합니다. 비트겐슈타인의 말처럼 결국 “보고자 하는 것만 보게” 됩니다.


과학 역시 순수한 사실의 집합이 아닙니다. 그것은 인간이 만든 모델이며, 관측 결과와 연결된 해석의 체계입니다. 물리학자 스티브 호킹(1942~2018)은 “과학이란 제한된 일부 모델에 불과하며, 그 모델과 우리가 실제 얻은 관측 결과를 연결하는 규칙의 집합일 뿐”이라고 했습니다. 다시 말해, “과학 이론은 우리 마음속에만 있을 뿐, 그 밖의 어떤 실재(그것이 무엇을 뜻하든 간에)도 알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말하는 우주는 결국 인간 이해 속에서 구성된 세계입니다.


이렇게 보면 과학은 주관과 객관의 단순한 이분법을 넘어서, 이른바 ‘상호주관적인 실재’를 다룹니다. 우주의 객관적인 진실은 결국 우리 모두의 주관이 모여 만들어낸 것입니다. 세상 어디에도 자연법칙 자체는 없습니다. 단지 인간이 자연법칙이라 간주한 사고방식만 있을 뿐입니다. 괴테는 빛이 일곱 색깔이라고 주장한 뉴턴의 광학 이론에 반대하며 이렇게 일갈했습니다. “그는 잘못된 길을 좇고 있으니, 내 말을 농담으로 여기지 말라! 자연의 핵심은 인간 마음속에 있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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