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의 탄생

- 3장 경험과 느낌

by 북다이제스터




역사학자 유발 하라리는 현대인의 전형적인 특성으로 ‘개인 경험을 소중히 여기는 습성’을 꼽았습니다.


“우리는 새로운 땅과 풍경, 음식을 경험하려 길을 나서고, 집에서 억지로 지켜야 할 금기를 깨고자 휴양지로 떠난다. 배낭여행자는 맛있는 음식과 아름다운 풍경뿐 아니라, 심지어 낯선 곳에서 겪는 위험과 어려움, 불편함까지 즐기려 지구 반 바퀴나 돌아 여행하고, 그 고난마저 소중히 간직한 채 집으로 돌아온다.”


한마디로 현대인의 신조(信條)는 ‘직접 경험하지 못하면 이해할 수 없다’는 믿음입니다. 우리는 ‘개인 경험을 소중히 여기는 성향’을 마치 인간이라면 누구나 지닌 본능처럼 여깁니다. 하지만 고대 로마인들은 이런 생각을 전혀 떠올리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삶의 다채로운 경험을 일부러 피했습니다. 모험을 즐기려는 마음은 자연스러운 욕구가 아니라 경계해야 할 태도로 여겼습니다. 미지의 세계에 대한 ‘호기심’은 사악한 유혹으로 간주되어, 두려워하고 삼가야 할 태도로 보았습니다. 마술에 홀린 사람이나 그런 유혹에 빠지며, 결국 좋지 않은 결말을 맞는다고 믿었습니다.


따라서 어떤 고대인도, 심지어 시인조차 개인감정을 표현하지 않았습니다. 그리스-로마의 시(詩)에는 ‘나’라는 말이 등장하지 않습니다. 시인은 ‘나’의 사랑이나 슬픔이 아닌, 사랑이나 슬픔이라는 보편적인 감정 자체를 노래했습니다. 시인은 독자에게 자신 개인감정에 관심을 두라고 요구한 것이 아니라, 누구에게나 해당되는 공통된 감정만을 말했습니다.


고대인은 개인감정을 표현할 엄두조차 내지 못했습니다. 인간을 단지 신체 부분들의 집합체로 보았기에, 이를 하나로 묶는 통일된 ‘개인’이라는 개념 자체가 없었습니다. 예컨대, 호메로스의 서사시에서 전사는 ‘내가 싸웠다’가 아니라 ‘팔이 싸웠다’고 말합니다. 아킬레우스를 표현할 때도 ‘그는 날쌔다’ 대신 ‘발이 빠르다’고 묘사됩니다.


중세까지 서양인은 자아 정체성이나 사생활 개념이 거의 없었습니다. 공동체를 중시하고 개인주의를 경멸했습니다. 공공 생활을 외면하고 자신만을 위해 돈을 버는 사람은 손가락질을 받았습니다. 고대 그리스인은 공동체에 헌신하는 시민을 ‘폴리테스’(polites)라 부른 반면, 사적인 일에만 몰두하는 시민을 ‘이디오테스’(idiotes)라 불렀습니다. 영어 ‘idiot’은 원래 공동체에 무관심한 사람을 낮잡아 이르는 말이었습니다.


대표적으로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은 고립된 개인이 아닌 ‘공동체에 속한 인간’을 근본 개념으로 삼았습니다. 그들은 인간에게 ‘타고난 권리’가 있다고 보지 않았고, 권리는 사회에서 맡은 역할에 따라 주어진다고 생각했습니다. 따라서 도덕적인 덕성(그리스어로 아레테, arete)은 사회 속에서 자신의 자리를 찾아 수행하는 것으로 이해되었습니다.


옛사람들이 ‘사생활’을 얼마나 경시했는지는 ‘privacy’라는 단어 어원에서 드러납니다. 이 단어는 못이나 문짝을 뽑는 도구인 쇠지레(pry)에서 유래했습니다. 라틴어 프리바투스(privatus)는 ‘박탈하다’는 뜻의 프리바레(privare)에서 파생되었습니다. 공동체에 무관심한 개인(private)은 인간다움의 본질을 박탈당한 존재로 간주되었습니다. 또한, private에서 파생된 privateer는 16세기 엘리자베스 여왕 시대 ‘영국 해적’을 의미합니다. 국가 군대에 속하지 않고 사익을 위해 활동한 자를 가리킵니다. 공동체 밖에서 혼자 행동하는 사람은 경계와 의심의 대상이었습니다.


철학자 게오르크 루카치(1885~1971)는 근대 소설이 공동체가 붕괴하고 자본주의가 개인주의를 부추기기 시작한 시점에 등장했다고 보았습니다. 근대 소설은 세르반테스(1547~1616)의 『돈키호테』(1605)를 출발점으로 삼는 문학 장르로, 개인의 삶과 욕망을 중심에 둡니다. 주인공은 자신만의 욕망을 좇다가 공동체와 충돌하며 갈등을 겪습니다. 이 욕망은 자연스럽게 생기지 않았습니다. 자본주의 사회가 만들어낸 산물입니다.


반면 근대 이전 문학은 주로 영웅 이야기를 다뤘습니다. 우리나라 『홍길동전』(1600?)도 그런 예입니다. 근대 이전 문학 작품의 영웅은 진정한 의미에서 ‘개인’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공동체의 염원이나 꿈, 욕망을 대변하고 실현하는 존재였으며, 그런 점에서 영웅이라 불릴 수 있었습니다. 개인 욕망을 좇는 인물이 아니었습니다.


17세기 초 서양 근대 소설에 등장한 파우스트나 돈키호테, 돈 후안(스페인 전설 속 방탕아로, 이탈리아에서는 돈 조반니(Don Giovanni)로 불림), 로빈슨 크루소 같은 인물들은 자본주의 발전과 함께 나타난 근대 서구의 개인주의를 상징합니다. 지옥에 떨어졌던 파우스트는 끝내 구원받아 천국으로 인도되었습니다. 심지어 악당 돈 후안조차 구원을 받았습니다. 작가 최정운(1953~ )은 이들의 구원을 이렇게 해석합니다.


“자본주의 발달과 산업 혁명으로 세상이 이미 그런 부도덕한 인간들로 가득 차게 되자, 이들을 계속 지옥으로 보내면 서구 사회엔 구원의 희망이 사라지고 지옥의 저주만 남았을 것이다. 결국 이 신화적인 개인들은 18세기말 새로운 근대 시민의 모델로 자리 잡았다.”


서양은 근대 이후 ‘개인’ 개념을 발전시켰지만, 일본을 비롯한 동양에서는 근세까지 이 개념이 발달하지 않았습니다. 자기(自己)의 ‘기’(己)도 원래 씨족사회를 뜻하는 공동체 개념이었습니다. 그래서 일본이 개항기에 서양 서적을 번역할 때 가장 어려워한 단어 중 하나가 바로 ‘individual’이었습니다. 심지어 러시아어에도 지금까지 ‘사생활’을 정확히 표현하는 단어가 없습니다. 이 개념은 보통 ‘개인 공간의 필요성’이나 ‘고독’, ‘은둔’ 같은 말로 대신합니다.


개인 느낌은 비교적 최근에 서서히 발달했습니다. 심지어 전쟁 중 군인이 느끼는 극한의 공포조차 나의 ‘진짜’ 감정이 아니라, 근래 형성된 상호주관적인 감정일 수 있습니다. 사실 전투에 참전한 군인들은 극심한 공포를 경험합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치열한 전투에 투입된 미군 병사 절반은 두려운 나머지 바지에 오줌을 쌌고, 25퍼센트 정도는 똥을 쌌다고 인정했습니다.


제1, 2차 세계대전과 6·25 전쟁 같은 대규모 전투에서는 전사자보다 정신 이상으로 후송된 병사가 더 많았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중 나타난 이 현상을 ‘잃어버린 사단’이라고 부른 어느 연구에 따르면, 미군은 정신 이상으로 병력 50만 4천 명을 잃었습니다. 이는 사단 50개를 편성할 규모였습니다. 게다가 전형적인 할리우드 영화와 달리, 실제 전투에서 적극적으로 교전하는 군인은 소수였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소총병의 85퍼센트는 두려움 때문에 총을 쏘지 않았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런 연구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자료가 주로 현대 전쟁 사례에 한정되어 있다는 점입니다. 전투에서 살인을 저지르며 겪는 정신적인 충격이나 감정적인 손상은 대개 우리 시대 특유의 과장된 태도로, 외상 후 스트레스 증후군 역시 우리 시대가 만들어낸 현상일 수 있습니다.


18세기 이전 병사들은 전투에서 사람을 죽이거나 크게 다쳐도 심리적인 충격을 거의 받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전투 경험에서 특별한 감정을 느끼지 않았습니다. 전투 경험을 하찮게 여기며, 고통의 시련을 감정적이나 감각적으로 묘사하지도 않았습니다. 또한, 전투를 통해 무언가를 배웠다거나 심경이 변했다는 기록도 드뭅니다. 대신 “동지들의 시신이 땅바닥에 똥처럼 널려 있어도 아무런 감흥도 없었다”는 식의 담담한 기록만 남아있습니다.


전쟁 회고록을 남긴 이들은 전투 경험을 개인적으로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습니다. 첫 출정이나 첫 적과의 대치, 첫 대규모 전투, 첫 포성, 첫 살인, 첫 전우의 죽음, 첫 부상에 이르기까지, 이 모든 경험이 자신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 거의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적을 처음 죽이는 일조차 무덤덤하게 기록하거나 농담처럼 회고했습니다. 부상으로 얻은 장애도 삶의 전환점이나 자아 발견의 계기로 보지 않았습니다. 포로 생활에서 겪은 고통이나 전우애 역시 비중 있게 다루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전쟁에 대한 환멸조차 거의 표현하지 않았습니다. 이 모든 경험은 그저 또 한 차례 겪은 사고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한마디로, 18세기 이전 병사들은 전쟁에서 어떤 깨달음이나 특별한 경험도 얻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직접 겪은 일보다, 전쟁에 대해 읽고 토론하는 간접 경험이 더 많은 지식을 준다고 생각했습니다. 당시에는 ‘겪어보지 않으면 모른다’는 식의 상투적인 말도 거의 쓰이지 않았습니다. 자신이 겪은 일을 독자도 쉽게 이해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예컨대, 포탄에 팔이 잘려나간 고통조차 누구나 충분히 상상할 수 있다고 기록했습니다.


그러다가 18세기 후반 ‘개인 경험을 중시하는 낭만주의’가 유럽과 아메리카를 휩쓸며 대중화되고 아시아로까지 확산되어, 오늘날 우리의 감수성을 형성했습니다. 이제는 개인이 직접 겪은 일만이 진정한 경험으로 여겨지게 되었습니다.


철학자 이사야 벌린(1909~97)은 낭만주의를 서구의 가치관과 역사 흐름을 근본적으로 바꾼 혁명이라 평가했습니다. 그는 “낭만주의 혁명이 서구의 삶과 사유를 뒤바꾼 가장 거대한 최근의 운동으로, 인간 의식이 가장 크게 전환된 사례”라 말했습니다. 그의 견해에 따르면, 19세기와 20세기에 일어난 다른 모든 전환은 그 중요성이 상대적으로 미미하며, 낭만주의 운동에 깊은 영향을 받은 결과에 불과합니다.


낭만주의란 인간의 모든 생각과 지식이 결국 육체를 통한 감각에서 비롯된다고 보고, 개인 경험을 중시하는 사상입니다. 인간 내면의 느낌과 상상력을 높이 평가하며, 개인의 고양된 감성을 표현하는 데 집중합니다. 낭만주의의 영향으로 ‘전쟁을 겪지 않은 사람은 그 경험을 이해할 수 없고, 나아가 전쟁 자체도 이해할 수 없다’는 식의 태도가 널리 퍼졌습니다. 이는 개인 경험을 최고의 진실로 여기는 사고방식입니다.


이제 사람들은 오직 ‘자기 경험’만을 알고 믿게 되었습니다. 사실 ‘자기 이야기’는 평범하고 빈약한 개인의 경험과 느낌에 불과하지만, 그것이 전부이자 가장 중요하다고 여기게 된 것입니다. 이처럼 낭만주의는 개인주의와 맞닿아 있어, 당시 부상하던 신흥 부르주아 세력과 함께 확산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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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파르 다비드 프리드리히 <안개 바다 위의 방랑자>(1818)



낭만주의는 이성보다 감정, 보편보다 개별적인 특수성을 중시하며, 직관과 감수성 같은 개성을 강조합니다. 낭만주의자의 핵심 특징 중 하나는 방랑이며, 그 방랑을 이끄는 심리적인 동기는 동경입니다.


프리드리히의 그림에 등장하는 낭만주의자들은 대개 어딘가 먼 곳을 바라보는 뒷모습으로 그려지며, 그들이 동경하는 대상은 자연입니다. 자연은 그들에게 신비로운 체험의 공간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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