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면전

- 3장 경험과 느낌

by 북다이제스터



인간은 낭만주의 같은 거대한 시대사상이 없이도 ‘그냥’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냥 산다고 잘못일 리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한 번도 그냥 살아본 적이 없습니다. 사상이 우리 안에 깊이 심어져 있어, 그냥 산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닙니다. 옳고 그름을 떠나 사상은 생각보다 훨씬 강력합니다. 세계는 사상에 지배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사상은 역사를 만드는 힘입니다. 사람들은 시대를 지배하는 사상에 따라 행동하고, 이를 통해 역사가 만들어집니다. 이를 보여주는 사례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소련인들입니다. 많은 이들이 ‘국가가 전부’라는 신념으로 자신 삶을 국가에 바치고, 극한의 고통과 희생을 감내했습니다.


“어느 날 백병전이 벌어졌어.... 뭐가 기억나느냐고? ‘오도독오도독’ 소리. 그 소리가 기억나.... 전투가 시작되자 사방에서 오도독오도독하는데, 사람들 연골이 으스러지고 뼈마디가 뚝뚝 부러져나가는 소리였지. 그리고 짐승 울음 같은 처절한 비명들.... 서로를 찔러 죽이고, 숨통을 끊어놓고, 뼈를 부러뜨렸어. 총검으로 입이건 눈이건 닥치는 대로 찔렀지.... 심장을 찌르고 배를 찌르고.... 독일군에게 잡혀간 우리 여성 간호병을 찾아냈지. 세상에, 눈알은 도려내지고 가슴은 잘려 나가.... 말뚝에 박혀있었어. 온몸은 살을 에는 추위에 꽁꽁 얼어 새하얗고, 머리는 완전히 백발이 되어 있었어. 그 아이는 겨우 열아홉 살이었어.”


소련 사람들이 경험한 전쟁터는 이토록 참혹한데 그들은 왜 기꺼이 스스로 지원에서 전장으로 갔을까요?


“그저 전선으로 가고 싶다는 마음, 그게 다였어. 어떻게 히틀러가 모스크바를 차지하도록 보고만 있겠어? 절대 용서할 수 없는 일이었지! 나만 그런 게 아니었어.... 내 또래 소녀들은 너나없이 모두 전선으로 가겠다고 나섰지. 우리는 우리만 애국심에 불타는 줄 알았어.... 우리만 특별한 경우라고.... 하지만 웬걸, 모병사무소에 갔더니 글쎄 우리 같은 여자애들이 가득한 거야. 세상에, 얼마나 놀랐던지! 심장이 뛰고 피가 끓어오르더라고. 나는 선발이 안 될까 봐 가슴을 졸였어.”


딸이 전쟁터에서 살아 돌아오더라도 어머니는 반기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창피하다고 여겼습니다.


“어머니한테 하나밖에 없는 외동딸이었는데도 어머니는 딸을 안쓰러워하기는커녕 오히려 딸이 전선에서 돌아온 일을 모욕으로 생각하셨지. 적과 싸우지 않는 것을.”


전쟁은 이토록 끔찍한데 그들은 왜 기꺼이 그 지옥으로 갔을까요?


“우린 어렸을 때부터 ‘조국은 우리의 모든 것이다. 우리는 조국을 지켜야 한다’는 말을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으며 자랐어. 그래서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전선으로 가기로 한 거야. 내가 안 가면 대체 누가 가겠어? 나는 반드시 가야 했지... 나는 ‘전선으로 갈 거예요, 전선으로 보내줘요! 전선으로!’라고 날마다 ‘전선, 전선’ 노래를 부르며 고집을 꺾지 않았어. 실은, 포스터 문구의 영향이 컸어. ‘모국이 그대들을 부른다!’, ‘전선을 위해 당신은 무엇을 했는가?’ 눈만 뜨면 사방에 보이는 게 그 글귀들이었으니까. 노래는 또 어떤 줄 알아? ‘일어나라, 위대한 나라여.... 일어나서 죽기까지 싸우라....”

“우리의 가장 큰 소원은 죽는 것이었어요! 자신을 희생하는 것, 전부를 내주는 것이요! 콤소몰(소련 공산주의 청년 정치조직) 선언에도 있어요. ‘나는 내 민족이 내 목숨을 필요로 한다면 언제든지 바칠 각오가 되어 있습니다.’ 이건 단순히 말로만 하는 맹세가 아니었어요. 우리는 실제로 그렇게 배우며 자랐어요. 군대가 행군하는 걸 보면 모두 제자리에 멈춰 서서 경의를 표했죠.”


소련은 민간인을 전쟁에 동원하기 위해 충성심과 분노를 부추겼습니다. 1942년 늦여름, 소련은 ‘성폭행’을 소재로 한 선전을 펼쳤습니다. 스탈린그라드 전선 소식지는 사지가 묶인 채 겁에 질린 소녀 사진을 실으며, 적의 잔인함을 강조했습니다.


“여러분의 사랑하는 딸이 파시스트들에게 이렇게 묶여 있다면, 다음에는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인가? 그렇다. 그들은 이 어린아이를 무참히 겁탈하고 전차 밑에 던져 버릴 것이다. 전진하라, 전사들이여, 적을 쏴라! 범죄자들이 여러분의 딸을 겁탈하지 못하도록 막는 게 바로 여러분의 임무다.”


이 선전은 1945년 소련군이 독일로 반격할 때 보복심을 자극해 집단 성폭행을 저지르게 한 주요 원인이 되었습니다. 소련 병사들이 독일 점령지에서 저지른 성폭행은 200만 건이 넘었습니다. 1945년에부터 1946년 사이 15만 명에서 20만 명에 이르는 ‘소련인 아기’가 태어났습니다. 보고되지 않은 수많은 낙태까지 고려하면 피해 규모는 훨씬 컸습니다. 많은 여성이 낙태 도중 목숨을 잃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국가를 자신의 전부로 믿었던 이들은 소련인만이 아니었습니다. 1945년 8월 6일 오전 8시 15분, 일본 히로시마 상공에 섬광이 번쩍였습니다. 원자폭탄 한 발로 히로시마 인구 24만 명 중 10만 명이 죽고, 10만 명이 다쳤습니다. 어느 생존자가 한 여성의 손을 잡자, 그녀의 살점이 장갑 크기만큼 떨어져 나갔습니다. 폭탄이 터졌을 때 하늘을 보고 있던 대공(對空) 군인의 얼굴은 완전히 타 눈구멍만 움푹 파였고, 녹아내린 눈에서는 진물이 흘렀습니다. 어느 여성은 폭탄이 투하되던 날 죽은 딸의 시신에 악취가 나기 시작한 뒤에도 나흘이나 안고 다녔습니다.


병원에 있던 다친 부상자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울지도, 신음하지도, 불평하지도 않은 채 조용히 죽어갔습니다. 어느 독일 생존자는 “아이들조차 울지 않았다”고 증언하며 말했습니다. “그들은 국가에 아무런 원한이 없음을 보여주기 위해, 이를 악물고 참으며 조용히 죽어 간 거야. 모두 조국을 위해!”


원폭 투하 후 무거운 잔해에 깔려 움직이지 못하던 어느 부자(父子)가 있었습니다. 아들은 아버지에게 말했습니다. “아버지, 이제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치는 것뿐입니다. 천황 폐하를 위해 만세를 외치겠습니다. 덴노 헤이까 반자이(천황 폐하 만세)!” 아들은 끝내 숨졌고, 구조된 아버지는 이렇게 회상했습니다. “우리가 일본인으로 태어난 게 얼마나 큰 행운인가! 황제를 위해 죽겠다고 결심한 순간, 나는 처음으로 그토록 아름다운 정신을 맛보았어!”


담장에 깔린 여학생들 또한 일본 국가(國歌) ‘기미가요’를 부르며 죽어갔습니다. 놀랍게도 많은 히로시마인은 원자폭탄 사용의 윤리적인 문제에 큰 관심을 두지 않았습니다. 그들에게 원폭에 대해 묻자, 이렇게 답했습니다. “그건 전쟁이었고, 우린 그런 사태도 예상해야만 했어요. 어쩔 수 없는 일이지요.”


일본은 국민에게 국가에 대한 절대적인 의무감을 주입하는 데 심혈을 기울였습니다. 당시 국정교과서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습니다.


“일본은 작은 나라다. 우리를 무참하게 집어삼키려는 나라가 많으니 전 세계를 적으로 보아야 한다. 진정한 일본 국민이라면 의무감을 가져야 한다. 의무감은 자신 목숨을 먼지처럼 가볍게 여기고, 국가를 위해 기꺼이 자신을 희생하는 정신이다.”


일본은 나치 독일이 항복한 뒤에도 전쟁을 계속했습니다. 승산이 있어서가 아니라, 항복 조건에 천황제 수호와 유지를 보장받는 데 시간이 걸렸기 때문입니다. 그 사이 전선과 도시는 수많은 폭격에 시달렸고, 결국 두 차례 원자폭탄 투하로 병사와 민간인 수백만 명이 희생됐습니다. 그럼에도 전쟁 종결은 천황의 ‘성스러운 결단’ 덕분이라는 신화가 만들어졌습니다. “국민을 구할 수만 있다면, 자신은 어떻게 되어도 좋다”는 천황의 말이 전해졌지만, 이는 명백히 허구입니다. 정말 ‘자신은 어떻게 되어도 좋다’는 말이 사실이었다면, 더 일찍 항복했어야 했습니다.


사상자 2,000만 명을 낸 제1차 세계대전에서도 전 세계 각국 시민은 기꺼이 전쟁에 뛰어들었습니다. 당시 대중의 의식엔 광기에 가까운 호전적인 열기가 들끓었습니다. 각국 국민은 자국 정부의 참전을 지지했습니다. 4년이라는 길고 고통스러운 기간 내내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했음에도, 국민들의 전쟁 의지는 결코 사그라지지 않았습니다. 전쟁은 모든 국민의 사안이었기 때문입니다. 유럽 각국은 한 세기 가까이 국가 교육을 통해 영웅적인 행위를 숭배하고 민족주의를 고양하며, 충성과 복종을 미덕으로 삼는 시민을 길러왔습니다.


각국 정부는 굳이 나서서 국민을 선동하거나 강제로 내몰 필요조차 없었습니다. 국민들은 애국심에 불타 자발적으로 군대에 입대하고 전쟁에 뛰어들었습니다. 프랑스의 징집 회피율은 단 1.5퍼센트에 불과했습니다. 전쟁을 반대하던 영국에서도 개전 8주 만에 75만 명, 이후 8개월간 100만 명이 자원입대했습니다.


독일인은 명령 불복종을 꿈도 꾸지 못했습니다. 독일 정부는 민간인 전부를 ‘조국 전선’으로 동원하고자 여론을 철저히 조작했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국가는 시민 생각을 마음대로 조정할 수 있었습니다. 러시아에서는 1,500만 명이 징집 대상이었지만, 병역 기피자는 수천 명에 불과했습니다. 애초 100만 명 이상의 기피자가 예상됐던 것과는 큰 차이였습니다.


대중은 국가 깃발을 자랑스럽게 따르며, 전쟁에 반대하는 지도자를 외면했습니다. 사실 공개적으로 반전을 지지하는 목소리도 거의 들리지 않았습니다. 유럽 주요 도시의 거리마다 사람들은 정부의 선전포고에 환호하며 춤추고, 전선으로 향하는 군인들에게 꽃을 던졌습니다. 1914년 유럽 시민들은 가벼운 마음으로 도살장으로 행진해 갔습니다.


두 차례 세계대전은 이전 전쟁과 달리, 군대만의 싸움이 아니었습니다. 주로 민간인이 경험한 전쟁이었습니다. 정규군 간 전투는 전쟁의 시작과 끝에 한정되었습니다. 전쟁 내내 점령과 억압, 착취, 절멸이 이어졌습니다. 20세기 전쟁은 호전적인 국민 의지와 사기를 겨루는 싸움이었습니다. 전쟁이 그토록 끔찍하고 파국으로 치달은 이유는, 단지 규모 때문만이 아닙니다. 발전된 군사 기술과 아울러 ‘민족들의 열정’이 결합했기 때문입니다. 교전국 국민들은 막대한 피해와 고통을 불평 없이 받아들였습니다.


이처럼 전쟁 수행의 핵심이 군대가 아닌 시민 대중에 있다면, 전쟁에서 승리하는 방법은 오직 적국 시민에게 견딜 수 없는 고통을 가하는 것뿐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두 차례 세계대전은 단순한 군사 작전이 아니었습니다. 전쟁 수행을 위해 기꺼이 피해와 고통을 감내하려는 후방 시민들의 의지를 꺾는 ‘전면전’(total war)이었습니다. 그 결과, 비전투원 공격 금지 원칙은 사라지고, 사회 전체가 전쟁을 수행하는 ‘지옥’이 되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공습은 단순히 군사 목표를 파괴하는 수단이 아니었습니다. 적국 민간인에게 공포를 주고 사기를 꺾는 전략적인 도구였습니다. 독일은 1940년부터 이 전략을 본격적으로 사용했습니다. 독일 공군은 런던을 비롯한 영국 여러 도시를 집중 폭격해 민간인 수만 명을 희생시켰습니다. 목표는 군수공장이나 교통 요충지 파괴가 아니라, 영국 국민의 정신을 꺾고 항복을 유도하려는 심리전이었습니다.


물론 공습은 독일만의 전유물이 아니었습니다. 1945년 2월 영국은 군사적인 의미가 거의 없던 독일 드레스덴을 폭격해 13만 명 이상을 죽였습니다. 같은 해 3월 미국도 일본 도쿄에 대형 소이탄을 퍼부어 도시 4분의 1을 불태우고 민간인 10만 명 이상을 죽였습니다. 이러한 공습은 민간인 대중의 심리에 혼란과 공포를 일으켰고, 전쟁을 단순한 ‘전선의 싸움’이 아닌 ‘사회 전체를 겨냥한 심리전’으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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