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장 경험과 느낌
켄 리우의 소설 『종이 동물원』(2016)은 국가란 무엇이며, 그 국가에 휘둘리는 군중(群衆)이 대체 누구인지 깊은 성찰을 담고 있습니다.
“‘일본’이나 ‘중국’ 같은 건 존재하지 않아. 그건 지어낸 말일뿐이야. 일본인 한 개인이 위대할 순 있겠지. 중국인 한 개인이 뭔가 바랄 수도 있을 테고. 하지만 ‘일본’이나 ‘중국’이 뭔가를 바라고, 믿고, 받아들인다고 어떻게 말할 수 있겠나? 나라 이름 같은 건 다 신화야. 그런데 그 신화에는 희생을 강요하는 강력한 마법이 깃들어 있지. 사람을 양(羊)처럼 살육하라고 강요하는 거야.
‘의’(義)라는 한자는 위에 ‘양’(羊)과 아래에 ‘나’(我)를 더해 만들어졌네. 제물로 바칠 양을 들고 있는 사람 모습이지. 이 한자 속 사람은 진실과 정의[義]가 자신에게 있다고, 따라서 세상을 구할 마법이 자신에게 있다고 믿고 있어. 우습지, 안 그런가?
‘무리’를 뜻하는 ‘군’(群)이라는 한자는 왼쪽에 ‘귀한 사람’(君), 오른쪽에는 ‘양’(羊)이 있네. 군중이란 바로 그런 걸세. 자신들이 고귀한 대의를 수행한다고 믿고 늑대 무리로 변신한 양 떼인 거야.“
그렇다면 군중 의식은 어떻게 형성될까요? 가령 일본 전국(戰國) 시대 토요토미 히데요시(1537~98)는 전국을 통일한 뒤 정권을 안정시키고 민중을 지배하고자 도수령(刀狩令)을 내려 민중의 무기를 몰수했습니다. 그는 “불상 건립에 철이 필요하니 칼을 내놓아야 한다”고 포고하며, 민중 신앙심을 교묘히 이용했습니다. 그 결과 무장봉기는 일어나지 않았고, 도수령은 권력 안정에 큰 효과를 발휘했습니다.
일본의 칼 모으기 포고령은 우리나라 금 모으기 운동과 닮았습니다. IMF 위기 때 시민들은 환란을 정부나 재벌 탓으로 돌리거나 분노하지 않았습니다. 오로지 “내 탓이오”라고 외치며 금 모으기 운동에 앞장섰습니다. 하지만 세계를 놀라게 한 건 금 모으기 운동 자체가 아니었습니다. 우리에게 주입된 민족주의였을 것입니다. 세계는 ‘민족’이라는 자동 반응에 묶인 꼭두각시 행렬을 이해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 일이든 ‘민족’을 내세워 정당화하려 합니다. 같은 시기 IMF 구제금융을 받은 태국과 인도네시아는 IMF의 개혁 요구를 그대로 따르지 않았습니다. 이집트와 페루, 수단, 에콰도르, 볼리비아, 라이베리아 같은 다른 IMF 정책의 희생 국가에서도 “더는 못 참겠다”는 시민 함성이 거리를 메웠습니다. 그들은 IMF 조건을 수용한 자국 정부에 강하게 항의했습니다.
상호 주관인 시대사상은 오랜 시간 서서히 형성되기도 하지만, 권력의 선전과 선동으로 단기간에 ‘세뇌’되기도 합니다. 철학자 게오르크 루카치는 선전과 선동이 인간을 ‘도취’시켜 비인간화한다며 비판했습니다.
“도취는 기만이자 사기다. 감정이입을 핵심으로 한 도취는 일상적인 삶을 격하시킨다. 니체의 ‘디오니스적 도취’는 감정이입의 극단으로, 개인 인격을 분열시키고 불안정하게 만든다. 이는 세계와 인간관계를 공허하게 한다. 선전과 선동은 인간을 기만하는 위장된 오만에 불과하다.”
인간에게는 ‘반복 편견’(repetition bias)이라는 특이한 오류가 있습니다. 같은 말을 자주 들으면 사실이라 믿고,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생각한다고 여기게 되는 현상입니다. 반복은 가랑비처럼 천천히 스며듭니다. 기업은 광고를, 정부는 홍보와 선전을 되풀이합니다. 그들은 반복이 이성을 마비시키고, 거짓까지 진실처럼 믿게 만든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2018년 예일대 연구진은 정보의 신뢰성과 상관없이, 반복 노출만으로 사람들이 정보를 사실로 믿는 경향이 있음을 발견했습니다. 조금만 그럴듯하게 반복되면 사람들은 쉽게 믿습니다. 정보가 반복되면 편견에 빠지기 쉽습니다. 사실로 확인됐거나, 심지어 자신 믿음과 반대되는 내용조차, 자주 접한 가짜 정보를 사실로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습니다.
반복은 우리가 무언가를 진실로 믿게 만드는 미끼 역할을 합니다. 안타깝게도 정부나 기업, 지도자들은 이 미끼를 오래전부터 활용해 왔습니다. 프랑스에서 출간된 뒤 히틀러(1889~1945)나 드골(1890~1970) 같은 역사상 많은 유명 인사들에게 찬사를 받은 『군중심리』(1895)에는 대중 심리를 조작하는 방법이 담겨 있습니다.
“군중을 감동시키고 행동하게 하려면, 이성적인 논리보다 간결하고 명확한 말로 사상을 주입해야 한다. 말이 간결할수록 증거는 부족해지지만, 권위는 오히려 강해진다. 정치인과 기업가는 이미 이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간결한 말을 반복하면 여론이 만들어지고, 감염병처럼 퍼진다.”
『군중심리』에 영향을 받은 히틀러는 『나의 투쟁』(1927)에서 효과적인 프로파간다(선전이나 선동)의 원칙을 이렇게 강조했습니다. “몇 개의 간단한 생각을 끊임없이 반복하라. 틀에 박힌 문구를 쓰되, 객관성은 피하라.” 히틀러와 나치는 수년간 작가나 시인, 철학자, 정치인을 동원해 국민의 마음을 마비시키고 중독시키는 작업을 벌였습니다.
권력자들이 쓰는 문장은 구조가 압축되어 의미 전개가 제한됩니다. 언어가 단순해질수록 전달되는 의미는 한정되고 폐쇄됩니다. 광고업계에서 ‘카피’(copy)라 부르는 기술입니다. 주술사의 주문처럼 반복되어 세뇌되면, 우리는 ‘카피’가 설정한 좁은 틀에 갇히게 됩니다. 이렇게 의식화되면 사고는 점점 단순해지고, 복잡한 현실도 단순하게 보게 됩니다.
몇 가지 사례를 살펴보겠습니다. 권력자나 언론은 시시비비를 따지기 전에 ‘논란’이나 ‘물의’ ‘파장’ ‘파문’ ‘우려’ ‘고조’ ‘확산’ ‘격감’ 같은 감정적인 단어로 시민들에게 선입견을 심어 선동합니다. ‘~인가?(새로운 권력 유착인가?)’, ‘~이냐?(단순 후원금이냐?)’, ‘~하나?(새해 넘기나?)’ 같은 추궁형, 반문형 카피도 여론몰이에 자주 쓰입니다. 이는 시민들에게 ‘설마 아닌 땐 굴뚝에 연기 나겠어?’라는 의구심을 품게 합니다.
선거 때 ‘텃밭’이나 ‘안방’ ‘적진’ 같은 표현이나, 지방 사투리를 곁들이면, 이는 지역주의를 부추기려는 선동입니다. ‘유력’ ‘사실상 결론’ 같은 추측성 표현으로 분위기를 몰아가는 건 기득권을 지키기 위한 전략입니다. ‘사업을 정리하고 해외로 떠날지 고민하는 사람이 많다’거나 ‘한국이 자멸할 것 같아 걱정’ 같은 경제 위기론 카피는 보수 기득권이 개혁에 맞서고, 파업 노동자를 사회에서 고립시키려는 강력한 도구입니다.
권력자들은 또한 표현을 다양하게 변형해 선동하기도 합니다. 선전 언론이 정치권의 파편화된 갈등을 반복 보도하는 건, 국민의 정치 혐오를 유도해 변화를 막고 현 질서를 유지하려는 목적입니다. 정치인이나 유명 인사의 사소한 실수나 발언을 중요한 양 과장해 보도하는 것도 시민이 큰 흐름을 보지 못하게 하려는 전략입니다. 국가 간 분쟁을 지도자 간 성격 대결로, 혹은 사회의 구조적인 모순을 일부 개인의 일탈로 축소하는 인물 중심 보도는 시민을 정책과 이슈에서 멀어지게 하고 사회 인식을 왜곡합니다.
세계의 본래 모습은 모호합니다. ‘예와 아니요’, ‘0(zero)과 1’ 사이엔 무한한 가치와 답이 존재합니다. 하지만, 프로파간다는 이 모호함을 단순화해 확신을 심어줍니다. 철학자 자크 데리다(1930~2004)는 단순화된 확신에서 벗어나 모호한 본래 세계를 되찾는 과정을 ‘해체 작업’이라 불렀습니다.
데리다의 해체 작업은 사회적인 힘이나 절대적인 질서, 닫힌 체계에 대한 저항입니다. 동시에 우연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다양성과 열린 세계를 추구하는 지적 탐색이기도 합니다. 말이 진실을 가려 우리가 오랫동안 눈을 감고 살아왔을지 모릅니다. 삶의 개혁은 말이 지닌 힘의 질서를 바꾸는 데서 시작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