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장 행복
“중세가 끝나고 17세기 근대에 이르러서야
유럽에 ‘행복’과 ‘삶의 고뇌’라는
추상적인 개념이 처음 등장했다.”
– 장 베르동
많은 사람이 행복은 기본적인 가치라고 말합니다. 오직 그 자체로 가치 있고, 다른 것을 위한 수단이 아니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행복해야 해!’라는 말을 자주 듣다 보니, 이 말이 참일 뿐 아니라,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누구나 항상 추구하는 의미 있는 가치라고 여깁니다. 하지만 감정의 최고 정점인 행복감조차 ‘진짜’ 내 감정이 아니라, 다수가 믿는 ‘상호주관적인 실재’일 수 있습니다.
고대 로마인들은 행복을 추구하지 않았습니다. 단지 재앙이 없기를 바랐습니다. 그들의 묘비에는 정형화된 문구 ‘NF F NS NC’가 새겨져 있습니다. 이는 ‘non fui, fui, non sum, non curo’의 머리글자로, “나는 원래 존재하지 않았다. 나는 잠시 존재했다. 나는 죽었기에 존재하지 않는다. 나는 이를 신경 쓰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그들은 인생을 한순간으로 보고, 죽으면 무(無)로 돌아간다고 믿었으며, 행복을 떠올리지 않았습니다. ‘행복’이라는 단어는 유럽에서 17세기 근대에 들어서야 처음 생겼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름이 붙여지지 않은 것을 인식하거나 추구하지 못합니다.
개념은 이름이 부여되는 순간 비로소 현실에 영향을 미칩니다. 예컨대 정의나 향수, 무한, 사랑, 행복 같은 추상적인 개념은 누군가 단어를 붙일 때 비로소 존재하기 시작했습니다. 사회에서 어떤 대상이 의미가 있으려면 이름이 붙여지고, 지시되고, 체계화되는 과정을 거쳐야 합니다.
우리는 언어로 세계를 인식합니다. 사실상 ‘현실’ 세계란, 집단의 언어 습관에 기반해 무의식 속에서 구성됩니다. 문제는 우리가 그렇게 구성해 낸 걸 실재인 양 받아들인다는 점입니다. 단어는 우리 생각을 만들어내는 도구인 동시에, 사고 범위를 제한하는 한계이기도 합니다. 단어와 세계는 서로 분리될 수 없으며, 세계는 개념을 통해 드러납니다. 개념이 바뀌면 실재도 달리 해석될 수 있습니다. 다르게 표현하면, 다르게 사고할 수 있습니다.
사람의 정신과 마음을 바로잡으려면, 대상을 올바른 이름으로 불러야 합니다. 공자(BC 551~479)는 개념의 혼란이 평화와 정의를 해치는 근본 원인이라 보았습니다. 공자는 권력을 잡게 되면 가장 먼저 무엇을 할 것이냐는 질문을 받자, “당연히 개념부터 바로 잡겠다”고 답했습니다.
우리 현대인들은 개념부터 바로잡겠다고 말한 공자가 다소 엉뚱하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쓰는 말들을 찬찬히 들여다보면 그의 말이 실감 납니다. 오늘날 ‘자유’나 ‘민주주의’, ‘관용’, ‘노예제’, ‘행복’ 같은 개념이 본래 의미대로 명확히 사용되는지 생각해 보면, 공자 말이 얼마나 중요한지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개념들은 온갖 선전과 선동으로 왜곡되어 있습니다.
예컨대 ‘자유’는 어떤 이에게는 시장의 자유를 의미하고, 또 어떤 이에게는 해방이나 평등의 조건일 수 있습니다. ‘민주주의’는 형식만 남고, 실질적인 참여는 배제된 채 선전용으로만 쓰이기도 합니다. 언어가 모호할수록 사람들은 더 큰 착각 속에 빠져 살게 되고, 이는 종종 정치적인 조작이나 상업적인 세뇌로 이어집니다.
언어를 명료화하면 전승되어 내려온 착각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개념을 올바르게 쓰면, 혼란스러운 세상을 더 뚜렷이 보고 더 나은 판단을 내릴 수 있습니다. ‘행복’처럼 우리가 일상에서 쓰는 말을 바로 잡는 일이야말로, 곧 세상 질서를 재구성하는 첫걸음입니다.
작가 리처드 레이어드(1939~ )는『행복의 함정』(2011)에서 행복을 인간이 추구하는 자연스러운 목표로 보며 이렇게 설명합니다.
“행복이 궁극적인 목표인 이유는 그것이 선(善)이기 때문이다. 행복이 좋다는 건 굳이 따질 필요조차 없을 만큼 명백하다. 행복이 왜 그렇게까지 중요한지 묻는다면, 달리 설명할 도리가 없다. 행복의 절대적인 중요성은 지극히 당연하고 자명하기 때문이다. 미국의 독립선언문에도 나타나 있듯, 행복은 ‘그 자체로 명백한 목표’다.”
이 주장은 우리가 왜 행복을 추구해야 하는지 이유를 설명하지 않습니다. 단지 전제를 반복할 따름입니다. 레이어드 자신도 말했듯 이 주장을 뒷받침할 근거는 없으며, 동어반복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행복을 원할까요? 정말 행복해질 수 있을까요?
서점에는 『스스로 행복하라』, 『나는 당신이 행복했으면 좋겠습니다』, 『하루에 한 걸음씩 행복해지기』, 『스스로 행복하라』, 『밥 챙겨 먹어요, 행복하세요』 같은 행복 관련 책들이 넘쳐납니다. 한 마디로 ‘우리 모두 행복합시다!’라는 권유인데, 우리말 어법에도 맞지 않습니다. ‘행복하다’는 형용사로, ‘~하자’ 같은 청유형이나 ‘~해라’ 같은 명령형으로 쓸 수 없기 때문입니다. 동사만이 청유형이나 명령형이 될 수 있습니다. ‘준현아, 일어나라’는 옳지만, ‘손님, 행복하세요’는 틀린 표현입니다.
행복을 권유하는 책들은 흔히 우리가 고통과 행복 중 선택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이런 주장은 행복에 이르는 다양한 선택지가 있고, 마음만 먹으면 고통 없는 삶이 가능하다는 가정에 기반합니다. 하지만 살면서 겪는 삶의 복잡성과 불가피한 도전을 고려하면, 어려움과 비극은 피할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이런 행복 담론은 고통과 행복이 오롯이 개인 선택에 달려있다고 고집합니다.
『나의 글로 세상을 1밀리미터라도 바꿀 수 있다면』(2007)의 저자 메리 파이퍼(1947~ )는 대학 시절 ‘행복’ 관련 대중 도서에 빠져 있을 무렵, 암으로 죽음을 앞둔 할머니와 나눈 대화를 소개합니다. 파이퍼가 “할머니, 행복하게 사셨어요?”라고 묻자, 할머니는 처음엔 그 질문을 무시했습니다. 손녀가 다시 묻자, 할머니는 얼굴을 찌푸리며 대답하셨습니다. “메리, 난 내 인생을 그런 식으로 생각하지 않아. 내게 주어진 시간과 재능을 제대로 잘 썼는지, 내가 있어 세상이 조금이라도 나아졌는지, 나 자신에게 그렇게 묻지.”
손녀에게 인생의 지향점이 행복인 반면, 할머니에게는 의미 있고 성숙한 삶이 더 중요했습니다. 철학자 존 스튜어트 밀(1806~73)은 “행복하냐고 스스로에게 물어보라, 그러면 곧 행복하지 않게 될 것이다”라고 말하며 ‘행복의 역설’(헤도니즘의 역설, paradox of hedonism)을 설명했습니다. 행복은 붙잡으려 애쓸수록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갑니다. 행복은 목표가 아니라, 삶을 잘 살아낼 때 주어지는 뜻밖의 횡재와 같은 부수적인 결과물입니다.
우리는 특히 ‘아주 조금만 더’ 있으면 충분하다고 생각하며 무언가를 원합니다. 행복해지려면 지금보다 훨씬 많은 것(가령 아주 많은 돈과 아주 큰 명예, 아주 많은 친구)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저 약간만 더 있으면 충분하다고 믿습니다. 하지만 조금 더 가지면 원하던 바를 다시 조정합니다. 이전보다 조금만 더 있으면 된다고 생각하지만, 우리는 행복을 위해 얼마만큼이 충분한지 알지 못합니다. 결국 ‘아주 조금만 더’는 결코 조금이 아닙니다.
힌두교 철학자 라마누자(1017~1137)에 따르면, 삶이란 곧 ‘릴라’[연극]이며, 신이 궁극적인 극작가입니다. 따라서 행복을 추구하는 건 마치 극작가 역할을 빼앗으려는 것과 같습니다. 더욱이 행복만 고집하는 건 마치 온갖 사탕이 있는 훌륭한 제과점에서 있지도 않은 특정 사탕만 찾는 것과 같다고 그는 비유했습니다.
중세 유럽의 스토아 철학 역시 우리가 자신의 의지로 행복에 이를 수 없다고 보았습니다. 스토아 철학은 우리가 어찌해볼 도리가 없는 깊은 숙명론을 담고 있습니다. 세상은 내가 쓰지 않은 대본대로 흘러갑니다. 때때로 직접 연출을 꿈꿔 보지만, 그럴 수 없습니다. 우리는 연기자일 뿐, 주어진 역할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스토아 철학에서는 ‘운명이 허락한다면’이라는 ‘유보조항’이 자주 언급됩니다. ‘유보조항’은 우리가 직접 쓰지 않은 대본대로 살아간다는 사실을 상기시킵니다. 내 삶은 그저 ‘운명이 허락하는 대로’ 펼쳐집니다.
스토아학파는 갈등에서 벗어난 영혼 상태를 진정한 행복으로 보았습니다. 선택의 문제로 고뇌하는 주인보다, 욕망을 버린 노예가 더 자유로울 수 있다고 여겼습니다. 선택이 적을수록 고민도 적기 때문입니다. 중국의 도교 역시, 대안의 경중이나 유불리를 떠나 세상 흐름에 순응하는 현자를 이상으로 삼았습니다. 이들은 선택의 자유보다 선택으로부터의 자유를 갈망했습니다.
많은 사람은 선택의 자유를 현대 사회가 이룩한 위대한 진보로 봅니다. 물론 그 말에는 어느 정도 진실이 담겨 있습니다. 가난에 시달리는 사람에겐 애초에 선택의 여지가 없어, 무슨 음식을 먹을지조차 고민할 필요가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일자리가 전혀 없는 경제 불황 속에서 직업을 ‘선택’한다는 말자체도 의미가 없습니다.
하지만 철학자 헤겔(1770~1831)은 자유가 지나치면 오히려 질병이 된다고 보았습니다. 이 질병은 자유가 행복의 조건이라는 믿음에 기대어 인간을 부정적이고 자기 파괴적인 방향으로 이끕니다. 이를 프로이트(1856~1939)의 표현으로 말하면, 자유는 “만족을 넘어서는” 방식으로 작동합니다. 이 과잉은 대개 ‘열정’의 형태로 나타나며, 열정에 사로잡힌 인간은 큰 대가를 치르더라도 그걸 포기하지 않습니다. 결국 자유는 편안함을 보장하지 않습니다. 선택의 가능성이 커질수록 불안도 함께 커집니다.
현대인의 삶에서 ‘선택’은 오히려 자유롭다는 착각을 주는 함정이 될 수 있습니다. 선택지가 많을수록 더 행복할거라 믿지만, 결정은 어려워지고 만족은 줄어듭니다. 완벽한 선택에 대한 기대는 커지지만, 실제로 더 나은 선택을 할 가능성은 오히려 낮아집니다. 가령 우리 시대 ‘선택’이라는 폭군은 소비자에게 끝없는 후회를 안깁니다. 소비자는 제품을 아무리 꼼꼼하게 비교해도 자신의 선택을 확신할 수 없습니다. 사기 전 불안하고, 산 후 실망합니다. 오히려 선택의 폭이 줄어들수록 만족은 커질 수 있습니다.
‘선택’은 다양한 메뉴가 있는 중국음식점과도 같습니다. ‘정통’ 경제학은 소비자가 메뉴판에서 자신을 가장 즐겁게 할 음식을 고른다고 가정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대부분의 메뉴는 십중팔구 익숙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익숙한 것만 고르거나 잘못된 선택을 합니다. 많은 선택지 속에서 더 나은 가능성을 놓쳤다는 사실조차 모른 채, 선택의 자유 속에서 오히려 불안과 후회를 반복합니다.
선택권이 많을수록 우리는 더 자유롭다고 느끼지만, 오히려 선택권이 없을 때 더 편안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억만장자나 유명인이 될 자유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되는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합니다. 우리는 원하는 삶을 이루지 못하면 자신을 탓하게 됩니다. 반면 로또에 떨어지면 그저 “젠장”이라 말할 뿐, 자신을 탓하지 않습니다. 순전히 운으로 받아들이기 때문입니다. 과거엔 성공도 운이라 여겼지만, 오늘날 우리는 무한한 자유와 선택권이 있다고 믿기에, 삶이 뜻대로 안 되면 스스로를 탓합니다. 이것이 바로 자유가 낳은 ‘선택의 형벌’(choice penalty)입니다.
선택의 자유는 참된 변화를 막는 힘으로 작용하기도 합니다. 담배 끊기를 예로 들면, ‘언제든 끊을 수 있다’는 가능성이 실제 행동을 미루게 합니다. 금연의 자유가 존재하기에 흡연은 가책 없이 지속되고, 변화는 늘 미래로 연기됩니다. 따라서 금연에 대한 자유는 오히려 변화가 일어나지 않도록 유지하는 장치가 됩니다. 반대로 한 번 피우기 시작하면 절대 끊을 수 없는 ‘부자유’가 주어진다고 가정하면 상황은 달라집니다. 이런 조건에서는 담배를 시작하려는 사람은 훨씬 줄어듭니다. 결국 선택의 자유는 변화를 미루게 하며, 오히려 부자유가 신중한 선택을 낳습니다.
구스타프 클림트 <베토벤 벽화 중 ‘행복의 추구’>(1902)
그림 속 고통받고 나약해 보이는 남녀 세 명은 황금 갑옷을 입고 거대한 장검을 든 기사에게 행복을 간청합니다. 하지만 기사는 몸을 돌려 외면하고, 그들을 쳐다보지도 않습니다. 마치 성경에서 하나님이 욥의 고통에 해답도, 삶의 보장도 주지 않는 냉엄한 진실을 떠올리게 합니다. 간청한다고 행복이 주어지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