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장 행복
애덤 스미스는 『국부론』(1776)에서 자본주의가 불평등을 낳고, 시간이 지날수록 그 격차가 더 커질 수 있음을 인정하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큰 재물에는 반드시 큰 불평등이 따른다. 큰 부자 한 명이 있으려면, 적어도 가난뱅이 오백 명이 필요하다.”
그럼에도 그는 ‘낙수 효과’(trickle-down effect)를 주장했습니다. 부자들의 소비가 고용을 늘리고, 결국 가난한 이들에게도 부(富)가 흘러간다는 이론입니다. 그는 자본주의가 더 많은 부를 만든다고 믿었습니다. “가난한 자들이 부자들의 ‘게으르고 사치스러운 생활’을 지탱하기 위해 노동해야겠지만, 최소한 생존만 가능했던 ‘발가벗은 야만인’보다는 더 부유하고 행복할 수 있다”는 입장이었습니다.
장프랑수아 밀레 <이삭 줍는 여인들>(1867)
이 그림은 단순히 세 여인이 허리를 굽혀 낟알을 줍는 모습을 그린 작품이 아닙니다. 여인들 뒤로는 이미 밀을 수레 가득 실은 일꾼들이 있고, 오른쪽에는 말을 탄 주인이 있습니다. 여인들은 주인의 허락을 받아 수확 후 떨어진 낟알을 줍고 있습니다. 가난한 농민 중에서도 가장 가난한 여인들의 모습을 담은 장면입니다.
이 작품의 모티브는 구약성서 <룻기>에 나오는 이야기로, 대부호 보야스에게 간청해 그의 밭에서 떨어진 낟알을 주워 시어머니를 봉양했다는 룻의 이야기에서 비롯되었습니다.
하지만 물질적인 부를 좇는 행복은 절대적인 빈곤보다 더 민감한 상대적인 빈곤 문제를 낳습니다. ‘오늘날 가장 가난한 사람조차 수백 년 전 왕보다 잘 사는데, 기껏 몇몇 사람이 엄청 잘 산다고 해서 뭐 그리 대수인가?’라고 생각한다면, 그렇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절대적인 빈곤보다 상대적인 차이에 더 큰 빈곤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철학자이자 역사학자인 윌 듀런트는 “가난은 부(富)에 의해 만들어지며, 부가 눈앞에 적나라하게 드러나기 전까지 우리는 가난이 가난인 줄 모른다”고 했습니다.
행복은 절대적인 조건보다 ‘내 삶이 주변 사람들과 비교해 어떤가?’라는 상대적인 비교에 더 민감하게 좌우됩니다. 이 비교는 지위와 재산 경쟁을 부추기고, 사람들은 자신 처지에 우월감이나 열등감을 느끼게 됩니다. 그 결과 노동에서 얻는 기쁨은 사라지고, 애써 일해도 결코 따라잡을 수 없는 소수 부유층과 자신을 비교하면서 노동은 더 고되고 하찮게 느껴집니다.
연구에 따르면 소득 격차가 큰 사회일수록 자살률이 높습니다. 불평등이 심한 지역일수록 강도와 절도 같은 범죄가 더 자주 발생합니다. 절대적인 빈곤 수준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모두가 가난해도 비슷한 처지라면 사회는 안정되지만, 전반적으로 형편은 나은데 일부가 뒤처진 공동체에서는 자살률과 범죄율이 높습니다. 잘 살아야 한다는 가치가 공유되었지만, 잘 살 기회는 공평하게 주어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공자 역시 『논어』에서 절대적인 빈곤보다 상대적인 빈곤을 더 우려했습니다. 정치하는 데 있어서 “백성이 부족한 것을 걱정하지 말고, 백성이 불평등한 것을 걱정하라. 백성이 가난한 것을 걱정하지 말고, 안정되지 못한 것을 걱정하라. 대체로 분배가 균등하면 가난한 백성은 없을 것이고, 서로 사이가 좋아지며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 그렇게 나라가 안정되면 기울지 않을 것이다”라고 강조했습니다.
플라톤도 재화의 불균등한 분배나 빈부 격차가 사회 안정을 해친다고 지적했습니다. 따라서 경제적인 이해관계를 좌우하는 정치가들이 공동의 이익보다 사익을 좇을 가능성을 우려해, 정치가들의 사적 소유와 결혼을 반대했습니다.
과거 평범한 사람들은 부자가 어떻게 사는지 잘 알지 못했습니다. 물론 예전에도 돈이 있고 부자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부자는 드물고 부를 감추고 살았습니다. 간혹 자신 권력을 과시할 때만 부를 드러냈습니다. 부자는 주로 공공 행사나 건축, 시민을 위한 축제에 돈을 기부해 자신이 평범한 시민과는 다른 존재임을 확인시키고, 이를 통해 신분을 유지했습니다. 이는 시민들의 질시를 막는 수단이기도 했습니다. 반면 오늘날의 부자들은 사적 향락과 개인적인 만족을 위해 부를 공공연히 드러냅니다. 과거에는 감추던 향락을 이제 돈으로 살 수 있고 공개적으로 즐길 수 있게 되자, 많은 이들이 더 큰 상대적인 박탈감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과거에는 부자의 삶이 베일에 가려져 있었습니다. 하지만 오늘날에는 누구나 그들의 일상을 손쉽게 들여다볼 수 있습니다. 언론은 호화로운 생활을 지나치게 상세히 보도하고, 소셜 미디어는 그들의 집과 취향을 실시간으로 전합니다. 이처럼 과도한 노출은 ‘소셜 미디어로 생긴 불만’을 낳았습니다. 평범한 사람이 평생 가질 수 없는 걸 너무 생생하게 마주할 때 생기는 괴로움입니다.
우리는 소셜 미디어라는 ‘연결된 뇌’가 마음을 통제하는 디지털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끊임없이 더 많이 원하는 이유는 필요해서가 아닙니다. 뒤처질지 모른다는 불안 때문입니다. 친구와 이웃이 더 많이 가질수록, 우리는 보조를 맞춰야 한다고 느낍니다. 불평등한 사회일수록 사람들은 더 호화로운 브랜드 소비에 집착합니다. 더 나은 사람처럼 느끼기 위해서입니다. 하지만 소비는 삶을 근본적으로 바꾸지 못합니다. ‘좋은 삶’의 기준이 부자들에 의해 끊임없이 닿을 수 없는 곳으로 더욱 멀어지기 때문입니다. 결국 우리는 불필요한 과소비라는 쉼 없는 쳇바퀴 위에서 제자리를 맴돌게 됩니다.
굳이 부자가 아니더라도, 타인의 ‘편집된 순간’과 자신의 ‘전체 삶’을 비교하는 순간 불행은 피할 수 없습니다. 소셜 미디어든 다른 매체든, 이러한 ‘미디어로 인한 불만’은 자신이 가진 걸 하찮게 느끼게 만듭니다. 객관적으로는 인류가 역사상 유례없는 풍요를 누리고 있음에도 말입니다.
사회운동가 홍세화(1947~2024)는 “성공한 자의 부를 동경하는 건 90퍼센트 사람들이 덥석 문 당근에 불과하다”고 지적했습니다. 그는 “그 가능성은 로또 당첨 수준인데도,” 모두가 노력하면 성공할 수 있다는 착각이 사람들을 “미래의 기대에만 매달리게 하고, 오늘의 자신을 배반하게 만든다”고 꼬집었습니다. 특히 중요한 건 그 이면을 꿰뚫어 보는 것입니다. 돈을 많이 벌어 잘 살아야겠다는 “생각은 내가 주체적으로 형성한 게 아니라, 지배계급이 주입한 요구에 지나지 않음을 간파해야 한다”고 그는 강조했습니다.
어느 시대든 지배계급의 사상이 사회를 지배합니다. 물질적인 권력을 지닌 계급이 정신 영역까지 장악합니다. 그런 집단이 교육과 종교, 언론을 지배하기 때문입니다. 지배계급은 자신들의 이익을 사회 전체에 꼭 필요한 것처럼 포장해 관념적으로 제시합니다. 이런 ‘지배 사상’은 지배계급이 자신들의 이익을 사회 모든 구성원의 이익인 양 강제할수록 보편적이고 영원한 진리처럼 여겨집니다. 예컨대 귀족이 지배하던 시대에는 명예나 충성이 중시되었다면, 부르주아가 지배하는 오늘날에는 부나 자유, 근면, 성장, 행복 같은 가치가 지배합니다. 하층민은 지배계급의 가치관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모방해 심리적으로 그들과 동일시하게 됩니다.
행복은 상대적인 요인에 따라 결정됩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행복을 다른 사람과 비교해 판단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행복이 상대적이라면 경제가 성장하고 정부가 부양책을 내놓더라도, 국민이 행복해진다는 보장은 없습니다. 역사학자 유발 하라리는 인간이 어떤 상황에도 쉽게 적응하며, 행복은 객관적인 조건만으로 충족되지 않기에 경제 정책이 국민 행복 증대에 큰 영향을 주지 못할 수 있다고 지적합니다.
“인간의 행복은 객관적인 조건보다 개인의 기대에 더 크게 좌우된다. 아무리 여건이 나아져도 여전히 불만족스러울 수 있다. 예를 들어, 보편적 기본소득이 도입되어도 실패할 가능성이 크다. 보편적 기본소득 덕분에 빈곤층이 지금보다 훨씬 더 나은 의료 서비스와 교육을 누리게 되더라도, 불평등이 지속된다면 극도로 분노할 수 있다.
행복이라는 목표를 진정으로 달성하려면, 보편적 기본소득은 다른 의미 있는 일과 함께 보완되어야 한다. 일 이후(이외) 만족스러운 삶을 사는 방법, 심지어 가난하거나 직업이 없어도 삶의 만족을 높일 방법을 먼저 찾아야 한다. 보편적 기본소득과 더불어 강력한 공동체와 의미 있는 삶의 추구를 결합해야 한다.”
유발 하라리가 말한 것처럼, “심지어 가난하고 직업이 없어도 강력한 공동체 덕분에 삶의 만족도”가 높아진 사례가 바로 오늘날 일본이 아닐까 싶습니다. 현재 일본의 많은 젊은이는 비정규직 노동자로 불안정한 삶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취업률도 저조하고, 저임금에 시달리며, 워킹푸어로 일하고, 현대판 홈리스라고 볼 수 있는 피시방 등에서 사실상 난민처럼 살아갑니다. 그럼에도 이들이 느끼는 삶의 만족도는 오히려 높아지고 있습니다.
일본 20대 젊은이들의 생활 만족도와 행복지수는 78.3퍼센트까지 상승했습니다. 일본 중·고등학생의 95퍼센트도 자신이 행복하다고 응답했습니다. 반면 2019년 기준, 우리나라 청소년의 행복지수는 OECD 22개국 중 20위에 그쳤습니다. 우리나라 청소년의 사망 원인 1위는 자살입니다. 절반 이상이 가끔 자살 충동을 느끼며, 3분의 1은 간헐적으로 우울증을 겪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학교에서 흔히 들리는 ‘정복하지 않는 사람은 정복당한다’, ‘100일의 전투’, ‘잠은 무덤에 가면 충분하다’, ‘엄마가 바라보고 있다’, ‘친구는 너의 공부를 대신해 주지 않아’ 같은 말들은 우리나라 학교가 얼마나 비인간적인 경쟁의 전쟁터가 되었는지 보여줍니다. 실제로 2022년 한 해 동안 학생 5만 3,000명이 학교를 떠났고, 전국적으로 거리를 배회하는 학교 밖 청소년은 최소 17만 명, 많게는 36만 명에 달합니다. 이는 우리 사회의 현실이 만들어낸 당연한 결과일지도 모릅니다.
일본 역시 1980년대 ‘입시 전쟁’이 절정을 이룰 때 ‘좋은 학교, 좋은 회사, 좋은 인생’이라는 중산층 꿈이 사회 전체를 지배했습니다. 하지만 1990년대 이후 이 꿈은 무너지고, 정식 기업 구성원으로 자리 잡지 못한 젊은이들이 늘어났습니다. 그럼에도 일본 젊은 세대의 삶에 대한 만족도는 오히려 높아지고 있습니다.
요즘 일본 젊은이들은 예전처럼 자동차를 사지 않습니다. 술도 덜 마십니다. 해외여행에 큰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해외로 나가는 유학생 수도 급감했습니다. 선거 때 투표하는 젊은이가 현저히 감소했습니다. 사회 부조리를 바로잡으려는 대규모 시위도 드뭅니다. ‘전쟁이 나면 국가를 위해 싸우겠는가?’라는 설문에 ‘그렇다’고 답한 15~29세 일본 젊은이는 7.7퍼센트에 불과합니다. 반면, 태어난 지역에 애착을 느끼는 젊은이가 늘고 있으며, 대도시로 이주하는 인구는 줄고 있습니다.
일본은 인구가 많고 부유한 민주국가 상위 14개국 중 부의 분배가 가장 평등하며, 인구 대비 억만장자 비율도 가장 낮습니다. 일본의 소득 불평등 수준은 사회주의 복지국가인 노르웨이나 스웨덴, 덴마크, 핀란드보다 훨씬 낮습니다. 일본 자본주의가 흔히 ‘온정적’ 자본주의로 불리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공동체 감각이 여전히 강하게 유지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컨대 일본 기업은 성과가 부진한 직원이라도 쉽게 해고하지 않습니다. 사람과 조직이 의무와 상호 의존이라는 유기적인 그물망으로 엮여 있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특정인이 공개적으로 실패하면, 그를 책임지는 윗사람의 평판도 함께 손상됩니다. 책임자가 실패를 막을 힘이 있었음에도 그러지 않았다고 여겨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더 나아가 책임자 자신이 어려움에 처했다는 의심까지 불러일으킬 수 있습니다. 회사가 잉여 인력을 해고하는 순간, 회사 역시 곤경에 빠졌음을 스스로 인정하는 꼴이 됩니다. 긴박한 상황이 아닌데도 그런 결정을 내린다면 무책임해 보이고, 그렇지 않다면 비인간적으로 보일 수밖에 없습니다.
『절망의 나라의 행복한 젊은이들』(2011)의 저자 후루이치 노리토시(1985~ )는 일본 젊은이들이 행복한 이유를 이렇게 분석했습니다. “오늘보다 내일이 더 나아질 리 없다고 생각할 때, 인간은 지금 행복하다. 미래에 더 큰 희망을 걸지 않을 때, 지금 행복하다.” 만화 <피너츠>의 ‘철학하는’ 강아지 스누피도 비슷한 명언을 남겼습니다. “내 인생엔 목표도, 방향도, 의미도 없어. 그런데도 난 행복해. 왜 그런지 알 수가 없네. 내가 뭘 잘하고 있는 거지?”
이런 스누피의 생각은 페르난도 페소아(1888~1935)의 시(詩) <담배 가게>(1928)에서도 확인됩니다. “내가 무엇이 될지 어떻게 알아? 내가 누군지도 모르는 내가? 내가 생각하는 대로 된다고? 너무나 많은 이들이 똑같이 되려 하는데, 분명 모두가 그렇게 될 순 없어!” 페소아는 삶의 의미나 방향보다는 ‘지금 이 순간’ 자체에 의미를 둡니다. 삶의 의미는 ‘지금을 산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많은 사람이 목표 없는 삶을 무의미하다고 간주합니다. 하지만 오히려 그렇게 생각하기에 지금 행복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정치철학자 존 그레이(1948~ )는 “미래의 목적이 왜 현재보다 더 중요해야 하는가?”라고 반문합니다. 미래는 어쩌면 현재보다 추구할 가치가 적을 수 있습니다.
“좋은 삶이란 자연스러운 삶을 능숙하게 살아내는 것이다. 좋은 삶은 특정한 목적을 가지지 않으며, 의지와 관련 없고, 이상을 실현하려 애쓰는 것도 아니다. 목적이 없으면 삶이 무의미하다고 여기는 시대에, 목적 없이 즐기며 사는 사람이야말로 진정한 호모 루덴스(즐기는 인간)다. 좋은 삶이란 환경에 따라 사는 삶이다. 좋은 삶은 모든 사람에게 같은 삶을 의미하거나, 상식에 꼭 부합해야 하는 것도 아니다.”
과학 에세이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2020)에서 저자 룰루 밀러가 일곱 살 딸 때 아빠에게 “인생의 의미가 뭐예요?”라고 묻자, 아빠는 인생엔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진지하게 설명해 줍니다.
“의미는 없어, 신도 없어. 어떤 식으로든 너를 지켜보거나 보살펴주는 신적인 존재는 없어. 내세도, 운명도, 어떤 계획도 없어. 그리고 그런 게 있다고 말하는 사람은 그 누구도 믿지 마라. 그런 건 사람들이 이 모든 게 의미가 없고 자신도 의미가 없다는 무시무시한 감정에 맞서 자신을 달래기 위해 상상해 낸 것일 뿐이니까. 진실은 이 모든 것도, 너도 아무 의미가 없다는 거야. 우리의 꿈, 우리의 의도, 우리의 가장 고결한 행동까지도, 절대 잊지 마라. 아무리 네가 특별하게 느껴져도, 넌 개미 한 마리와 다를 게 없다는 걸. 네 몸집이 좀 더 크긴 하지만 그건 중요하지 않아.”
인간은 추구하는 의미를 위해 죽고, 죽이기도 하는 존재입니다. 우리는 생명을 잃는 것보다 의미를 잃는 걸 더 두려워합니다. 이런 ‘의미에 대한 갈구’는 때론 자살 폭탄 테러 같은 극단적인 행동을 낳기도 합니다. 인간은 말도 안 되는 꿈을 위해 죽고 죽이며, 그 꿈에서 삶의 의미를 찾기도 합니다.
하지만 인생은 본래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자연과학의 관점에서 보면, 인간의 삶은 손톱만큼의 의미도 없습니다. 우리는 단지 진화 과정에서 어쩌다 생겨난 존재일 뿐, 우리 삶에는 이유도 목적도 없습니다. 오직 ‘우연’만이 우리를 지배합니다. 우연이야말로 우리를 만든 것이자, 언제든 우리를 파괴할 힘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우리가 부여한 모든 ‘의미’는 인위적인 환상에 지나지 않습니다. 가혹하게 들릴 수 있지만, 우리가 말하는 모든 행복은 자기기만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철학자 볼테르(1694~1778)는 이를 시 한 편에 담아냈습니다.
“신은 말이 없고, 운명의 책은 우리 앞에 덮여 있다.
인간이 아무리 많이 탐구해도 자신을 알 수 없으며,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끝내 알지 못한다.
우리는 진창 속에서 괴롭게 허우적거리다
결국 죽음에 먹히는 미물이며 운명의 웃음거리일 뿐...
허영과 악의 무대인 이 세상에는
여전히 행복을 떠드는 병든 바보들이 무리 지어 산다...”
시에서 드러나듯, 볼테르는 인간의 한계를 정직하게 바라봤습니다. 의미를 찾아 몸부림치는 인간, 그 허무를 외면한 채 웃는 자들, 그리고 끝내 침묵하는 신. 이 모든 것이 인간 삶의 냉엄한 현실입니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무력하고, 삶은 우연과 무의미 속에서 흘러갑니다.
알베르코 자코메티 <걸어가는 사람>(1960)
조각가 자코메티는 자신 작품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마침내 나는 일어섰다. 그리고 한 발을 내디뎌 걷는다. 어디로 가야 할지, 끝이 어딘지 몰라도, 나는 걷는다. 그래, 나는 걸어야 한다. 당신과 나, 우리는 그렇게 계속 걸어야 한다.”
우리는 목표를 이루는 삶만이 바람직하다고 배웠기에, 목적 없이 반복되는 일상은 하찮게 보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자코메티의 앙상한 조각상은 이렇게 속삭이는 듯합니다. "나도 매일 목적 없이 걷고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