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장 행복
우리는 점점 더 많은 걸 누리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하지만 물질의 풍요는 오히려 불행의 원인이 되기도 합니다. 해마다 쏟아져 나오는 매혹적인 신상품은 소비자의 구매욕을 자극합니다. 하지만 많은 사람이 소유하는 기쁨보다 갖지 못하는 비참함을 더 크게 느낍니다. 루소는 “당신이 세상의 물질을 갖지 못하면 불행할 수 있지만, 가진다고 반드시 행복해지는 건 아니다”라고 했습니다.
오늘날 ‘필요한 것’과 ‘원하는 것’의 경계가 흐려지고 있습니다. 과거에는 대부분이 어려운 환경 속에서 식량이나 의약품 같은 ‘필요한 것’에 집중하며 불충분한 삶을 살았습니다. 이제는 ‘필요한 것’이 충족된 상태에서, 많은 사람이 ‘원하는 것’만 좇습니다. 하지만 일단 ‘원하는 것’에 집중하면, 마음의 평화를 얻기 어렵습니다. 인간 욕구는 끝이 없기 때문입니다. 억만장자조차 ‘원하는 것’ 모두를 가질 수 없으며, 욕구를 완전히 채울 수도 없습니다. 그 끝없는 추구는 마약 중독처럼 위험한 결과를 초래할 수 있습니다.
행복은 ‘원하는 것’을 얻는다고 지속되지 않습니다. 외부에서 주어지는 행복은 금세 사라지기 때문입니다. 가령 오랫동안 바라던 자동차를 사도 만족은 반년도 채 가지 않습니다. 인간은 어떤 일에도 쉽게 적응하기 때문입니다. 행복에는 ‘설정점’(set point)이 있어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시간이 지나면 원래 수준으로 돌아갑니다. 결국 아무리 애써도 행복을 계속 누리긴 어렵습니다. 마치 쳇바퀴 도는 다람쥐처럼, 잠시 바닥을 벗어날 뿐 다시 제자리로 돌아옵니다. 이를 ‘행복의 쳇바퀴’(hedonic treadmill)라 합니다.
애덤 스미스는 “우리가 행복을 성취할 수 있다는 믿음은 산업 사회를 끊임없이 움직이게 만드는 교묘한 착각”이라 했습니다. 사실 우리가 ‘행복의 쳇바퀴’ 위에서 제자리만 돈다면, 경제 발전이 곧 개인의 행복으로 이어진다는 믿음은 다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성장의 풍요에 금세 적응하고, 더 큰 성장을 끊임없이 갈망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늘 새로운 상황에 곧 적응하리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합니다. 예를 들어, 노인은 대게 건강 문제로 많은 고통을 겪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노인이 젊은이보다 더 행복하다는 말을 들으면 놀라게 됩니다. 대부분 사람은 만성 질환에 잘 적응하는 편입니다. 인간은 미래에 자신이 어떻게 느낄지 예측하는 데 매우 서툽니다. 우리는 자신 감정의 강도와 지속 시간을 모두 과대평가합니다. 로또에 당첨되면 평생 행복할 것 같지만, 그 기쁨은 오래가지 않습니다. 반대로 불구가 되면 평생 불행할 것 같지만, 예상보다 빨리 행복감을 회복하는 편입니다. 인간은 자신이 처한 상황에 놀라울 만큼 빠르게 적응합니다.
흔히 쾌락주의자로 오해받는 철학자 에피쿠로스(BC 341~270)는 행복을 다르게 정의했습니다. 보통 우리는 긍정적인 감정을 느낄 때 행복하다고 생각합니다. 반면 에피쿠로스는 행복을 ‘아타락시아’(ataraxia), 즉 근심 없는 평온한 상태로 보았습니다. 말 그대로 ‘문제(~taraxia)가 없다(a~)’는 뜻입니다. 만족은 무언가를 소유할 때가 아니라, 문제가 없을 때입니다. 에피쿠로스에게 행복은 고통의 반대가 아니라, 고통이 없는 상태를 말합니다. ‘다행(多幸)이다’라고도 표현할 수 있습니다. 쾌락 추구는 인생 목표가 될 수 없습니다. 쾌락은 결국 불쾌로 이어져 참된 행복인 ‘고통이 없는 상태’에서 멀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는 욕망과 야망, 자의식, 두려움 같은 불필요한 짐이 ‘마음의 병’을 일으킨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에피쿠로스는 쾌락주의자가 아니었습니다. ‘평정주의자’였습니다. 그는 사람들이 해롭지 않은 걸 두려워하고, 필요 없는 걸 욕망한다고 보았습니다. 불필요한 욕망을 마치 필요한 것처럼 착각할 때 고통이 생깁니다. 우리를 괴롭히는 갈망에 비해 성취감은 미미하기에, 쾌락은 결국 고통으로 끝납니다. 에피쿠로스는 문제를 해결하는 유일한 길은 오직 욕망을 줄이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우리의 육체나 소유물, 명성, 지위는 언제든 불운에 희생될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을 잃고 상처받는 까닭은 우리가 그 가치를 잘못 판단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것을 영원한 소유가 아니라, 신에게 잠시 빌린 것이라 여겨야 한다. 그러한 것은 우리 뜻대로 할 수 없는 우연한 사고로 언제든 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유발 하라리는 『사피엔스』(2014)와 『호모 데우스』(2016)에서 행복은 달성할 목표가 아니라, 다스려야 할 마음가짐이라 말합니다. 현실에서 가능한 유일한 행복은 내면의 자유뿐입니다. 이는 불확실한 현실을 받아들이고, 삶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려 하지 않는 태도에서 비롯됩니다. 그는 행복을 갈망하기보다 감정의 덧없음을 깨닫고 집착을 버릴 때 만족에 이를 수 있다고 조언합니다.
“행복이 주관적인 느낌이며, 자신이 행복한지 비참한지 가장 잘 아는 사람은 바로 자기 자신이라 믿기 쉽다.” 하지만 행복이라는 “특정한 감정을 끈질기게 추구하는 행위는 오히려 자신을 고통에 빠뜨리는 함정이다.” “번뇌에서 벗어나는 길은 덧없는 즐거움을 좇는 게 아니라, 이 모든 감정이 영원하지 않음을 깨닫고 갈망을 멈추는 데 있다.”
행복을 갈구하면, 그 감정을 끊임없이 쫓는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행복은 잠시 머물다 사라지고, 과거의 행복했던 순간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어 다시 처음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결국 행복을 좇을수록 오히려 스트레스와 불만은 더 커집니다.
고대 그리스 철학자 데모크리토스(BC 460?~380?) 역시 행복이 재산이나 물질, 쾌락에 달린 게 아니라고 보았습니다. 그것들은 짧고 고통을 낳으며, 끝없는 반복을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그는 참된 행복이 쾌락을 절제하고 삶의 균형을 찾는 데 있다고 보았습니다. 덜 원할수록 실망도 줄어들게 됩니다. 욕심을 줄이면 우리 뇌는 행복에 대한 기대치를 낮춰 사소한 일에도 큰 만족을 느낄 수 있습니다.
우리는 행복을 줄 것이라 기대했던 걸 얻자마자, 곧 잃을까 봐 걱정합니다. 늘 욕망의 대상을 쫒지만, 결국 그것 때문에 불행해질 것임을 마음속 깊이 이미 알고 있습니다. 부처가 깨달았듯, 진정한 행복은 이 욕망의 순환에서 벗어나는 데 있습니다.
“우리가 고정된 실체라 여기는 대상도 사실 매 순간 변한다. 실체가 영원하리라는 믿음은 반복되는 욕망을 낳고, 그 욕망은 고통을 부른다. 만족스러운 순간은 드물고, 있더라도 매우 짧기에 우리는 영원히 좌절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