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장 행복
사람들은 고통에서 벗어나 행복해지길 원합니다. 현대 사회에는 "항상 웃으세요"나 "웃으면 복이 와요"라는 표현으로 대변되는 ‘긍정적인 사고’를 믿는 신앙이 널리 퍼져있습니다. 긍정적으로 생각하면 낙천적인 감정이 생기고, 실제로 행복해질 수 있다는 믿음입니다. 억지로 웃다 보면 진짜 행복하다고 착각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때의 행복은 억지웃음이라는 좁은 맥락 안에서만 정의되고 제한됩니다. 그건 진정한 행복이 아닙니다. 누군가가 "긍정적으로 생각해!"라며 내 감정을 강요한다면, 그 감정은 더 이상 나의 것이 아닙니다. 타인에 의해 조종되고 통제되는 것입니다.
긍정심리학은 우리가 인간의 마음을 온전히 알고 이해하며, 스스로를 통제할 수 있다는 주장입니다. 하지만 이는 무의식의 깊은 영향력을 무시한 처사입니다. 인간 심리에는 개인 의지로 조절할 수 없는 깊은 층위가 있습니다.
더욱이 긍정심리학 지지자들은 개인의 자아에만 초점을 맞추고, 사회적인 맥락을 무시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웃음 전도사’ 중 자살하거나 우울증을 겪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을 애써 외면하려 합니다. 긍정심리학 지자들은 마치 근본적인 치료가 필요한 ‘중증 외상’ 환자에게 단지 마음만 가라앉히라고 권하는 사이비 치료사와 다를 바 없습니다. 개인 행복에서 상황이 차지하는 비중이 10퍼센트에 불과하다는 그들 주장이 우리 직관에 어긋날 뿐 아니라, 이러한 낙관론에 사로잡히면 우리 모두에게 고통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외면하게 됩니다.
쇼펜하우어는 삶에서 유일하게 실재하는 건 고통이라고 보았습니다. 쾌락이나 행복은 단지 고통의 일시적인 부재에 불과합니다. 많은 사람이 가난이라는 고통을 겪으며, 운 좋게 이를 면한 소수는 권태라는 또 다른 고통에 시달립니다. 삶이란 결국 6일간의 고된 노동과 제7일의 지루함으로 이루어진 반복입니다. 더 나아가 고독은 인간이 피할 수 없는 운명입니다. 결국 우리는 누구나 혼자이기 때문입니다.
“단테가 지옥을 묘사할 때 참고한 건 우리 현실 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것은 꽤 괜찮은 지옥 묘사가 되었다. 하지만 천국과 그곳의 행복을 묘사하려 할 때 단테는 해결할 수 없는 난관에 부딪혔다. 우리 세계에는 천국을 상상할 만한 재료가 전혀 없기 때문이다.”
부처는 “삶 전체가 고통으로 가득 차 있음을 깨닫고, 마음에 들지 않는 이들까지 포함해 모든 사람의 고통을 느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불교는 행복을 삶의 목표로 삼기보다, 생로병사(生老病死)라는 현실의 고통을 인식하고 받아들이는 데 초점을 둡니다. 기독교 신학자 아우구스티누스 역시 현생은 행복을 방해하는 장애물로 가득해, 진정한 행복은 사후에나 기대할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부처는 생로병사 외에도 네 가지 고통을 덧붙였습니다. 사랑하는 이와 헤어지거나 사별하는 고통(애별리고, 愛別離苦), 미워하고 싫어하는 이와 함께해야 하는 고통(원증회고, 怨憎會苦), 원하는 걸 얻지 못하는 고통(구부득고, 求不得苦), 눈과 귀, 코, 입, 몸이 늘 좋은 것만 원하지만, 그럴 수 없는 고통(오온성고, 五蘊盛苦)입니다. 불교는 이처럼 피할 수 없는 고통에 의미와 가치를 부여해 인간의 비극을 덜고자 합니다.
“슬픔을 느끼되, 그것이 사라지길 바라지 않는다면 슬프지만 괴롭지 않을 것이다. 슬픔은 슬픔으로, 고통은 고통으로 받아들일 때, 네 마음은 비로소 모든 걸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다.”
인생은 극한 상황과 예기치 못한 일들의 연속일 수 있습니다. 사실 절체절명(絶體絶命)이나 고립무원(孤立無援), 사면초가(四面楚歌) 같은 궁지야말로 바로 우리 삶의 본질입니다. 벼랑 끝에서 몸부림치는 그 과정이 곧 삶입니다. 『보왕삼매론』은 근심과 곤란이 오히려 거만과 사치를 막아준다고 말합니다. “세상살이에 곤란이 없기를 바라지 마라. 곤란이 없으면 업신여기고 사치한 마음이 생기니, 근심과 곤란 속에서 세상을 살아가라.”
인도 철학도 고통을 인식하는 데서 출발해, 그 극복을 궁극적인 목표로 삼습니다. 인도의 대서사시 『마하바라타』에는 이를 보여주는 우화가 있습니다.
가난한 사나이가 새로운 삶을 찾아 길을 떠났습니다. 며칠 뒤 광야에서 길을 잃고, 배고프고 목마른 채 헤매다 미친 코끼리에게 쫓기게 되었습니다. 가까스로 거대한 보리수나무 아래에 이르지만, 오를 수 없어 그 아래 우물 속으로 몸을 피했습니다. 하지만 우물 바닥엔 전갈이, 벽엔 독사가 있었습니다. 그의 목숨은 잡고 있던 칡넝쿨에 달려 있었습니다. 그런데 흰쥐와 검은 쥐가 그 넝쿨을 갉아먹고 있었습니다. 그때 미친 코끼리가 나무를 치자 벌집이 흔들리고, 벌떼가 그를 쏘기 시작했습니다. 그 순간 우연히 꿀 한 방울이 그의 입술에 떨어졌고, 그는 모든 위험을 잊은 채 그 꿀맛에 빠졌습니다.
우화가 보여주듯, 꿀 같은 행복은 겨우 ‘찰나’ 일뿐입니다. 한계 상황이나 위기가 삶의 본모습입니다. 우리는 꿀맛에 집착해 고통을 잊으려 합니다. 하지만 그 도취는 짧고, 상황은 여전히 절망적입니다. 진정한 행복은 쾌락이 아니라, 삶의 실상을 직시하는 데 있습니다. 위기는 특정 시기나 특정 사람에게만 나타나지 않습니다. 누구에게나 언제든 닥칠 수 있습니다. 이는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오직 나만의 위기입니다. 내가 알고 있는 객관적이고 보편적인 지식으로 넘을 수 없는 위기입니다.
철학자 쇠렌 키에르케고르(1813~55)는 삶의 고통을 이렇게 묘사했습니다. “아이를 낳을 때 어머니의 울부짖음을 들어보라. 죽어가는 자의 마지막 몸부림을 보라. 그 시작과 끝 사이에 행복이 있을 수 있는지 말해 보라.” 우리는 불안과 절망, 우울에서 벗어나고자 행복을 추구합니다. 하지만 출구는 없습니다. 아무리 유쾌하고 안락하게 살아도 마찬가지입니다.
키에르케고르에 따르면, 불안은 우리가 우연에 지배받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단지 이 시대, 이 장소에 던져졌을 따름입니다. ‘하필이면 왜 여기인가?’라고 그는 물었습니다. 우리는 필연적인 이유 없이 우연히 여기에 있으며, 그래서 삶은 불안합니다. 세상을 지배하는 법칙이 ‘우연’이라면, 어떤 일이든 일어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톨스토이(1828~1910)는 소설 『안나 카레니나』(1878) 첫 문장에서 “행복한 가정은 서로 닮았지만, 불행한 가정은 모두 저마다의 이유로 불행하다”고 말했습니다. 행복은 여러 조건이 모두 맞아야 가능하지만, 사실상 불가능합니다. 가족 중 한 사람이 아프거나, 우연히 단 한 가지 조건만 어긋나도 우리는 행복할 수 없습니다. 세상은 본래 고해(苦海)입니다. 인생이 고통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철학자 스베냐 플라스푈러(1975~ )는 고통을 단순한 장애나 극복 대상이 아니라, 인간 성장의 중요한 계기로 봅니다. 불행한 사람은 그 원인을 성찰하고, 배울 점을 찾아야 더 나은 출발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고통을 단지 극복해야 할 문제로만 여긴다면, 인간은 자기 실존과의 중요한 연결을 잃게 된다. 자신을 한계 있는 존재로 인정하고, 그 한계와 고통 속에서 내 인생과 사회가 대체 왜 이런지 따져 물어야 한다. 고통은 생각을 낳는다. 최대한 빨리 다시 시작하려고 고통을 억지로 참는 건, 성과(成果)의 강요에 굴복하는 것이다.”
리처드 세라 <페르난두 페소아>(2008)
페르난도 페소아가 말했듯, “수많은 배가 항구를 떠나지만, 단 한 척도 고통 없는 삶으로 가지 않는다”는 진실은 우리 모두가 피해 갈 수 없는 삶의 현실을 보여줍니다.
리처드 세라의 작품 <페르난도 페소아>는 우리의 슬픔과 고통을 시각화합니다. 거친 용광로의 철판을 그대로 사용한 이 작품은 고통을 부정하거나, 위로하지 않습니다. 대신, 슬픔과 고통이 삶이라는 계약서에 이미 새겨져 있음을 냉정하고 담담하게 보여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