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장 행복
아리스토텔레스(BC 384~322)는 삶의 목표로 ‘행복’을 주장한 철학자로 알려져 있습니다. 하지만 그가 말한 행복은 단순한 기쁨이나 만족이 아닙니다. 그리스어 ‘에우다이모니아’(eudaimonia)로 표현되는 이 개념은 인간이 성숙한 삶을 살아가는 상태, 곧 ‘완성’이나 ‘탁월함’에 더 가깝습니다. 공자의 ‘도’(道)도 이와 통합니다. 공자는 도가 일상에서 다른 사람을 대하는 태도 속에서 드러난다고 했습니다.
에우다이모니아와 도는 모두 일시적인 감정이나 결과가 아니라, 지속적인 자기 수양과 탁월한 삶의 실천을 뜻합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행복을 단순히 마음의 상태로 보는 견해를 반박하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행복이 단지 마음에 있다면, 평생 잠만 자거나 식물처럼 아무 활동도 하지 않는 사람도 행복할 수 있다. 이를 받아들일 수 없다면, 행복은 활동으로 이해해야 한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행복은 우리가 흔히 이해하는 순간적인 만족이 아니라, 행동하는 성숙한 삶 전체를 아우릅니다. 우리는 정의로운 행동을 통해 정의로워지고, 절제 있는 행동을 통해 절제하게 되며, 용감한 행동을 통해 용감해집니다. 그는 이렇게 덕을 실천하는 활동 그 자체를 ‘행복’으로 보았습니다. 행복은 인간적인 완결성과 긴밀히 맞닿아 있습니다. 인격적으로 탁월한 사람은 온전한 삶을 살아갈 수 있고, 그때 비로소 행복에 이를 수 있습니다. 결국 행복과 인격적인 완결성, 덕은 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학습과 습관을 통해 덕 있는 삶을 꾸준히 실천할 때 비로소 성숙한 삶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를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제비 한 마리가 왔다고 봄이 오지 않고, 하루아침에 여름이 되지 않듯, 인간이 복을 누리고 성숙해지는 일도 단기간에 이루어지지 않는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성숙한 삶’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우리는 누구도 성인군자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누구나 더 나은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선한 일을 할 때마다, 우리는 다음에 선한 일을 할 가능성이 높은 사람이 되어갑니다. 이건 분명 의미 있는 일입니다. 인간의 본성은 주어진 것이 아니라, 사회 속에서 만들어가는 산물입니다. 이미 정해진 본성은 없으며, 우리는 성숙한 삶을 향해 나아가는 과정에 있습니다. 바로 그 과정 자체가 진정한 행복에 이르는 길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행복이 성숙한 삶에 있다면, 오늘날 우리가 이상적이라 여기는 사회는 다릅니다. ‘모두가 열심히 일해 행복하게 잘 살자’는 자본주의 이념이 도덕적인 가치로 포장된 것에 불과합니다. 철학자 이마누엘 칸트(1724~1804)는 인간의 존재 이유를 이런 행복 추구에서 찾는 발상 자체를 혐오했습니다. 그는 “우리는 잘살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올바르게 살기 위해 존재한다”고 보았습니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는 잘 사는 것과 올바르게 사는 것을 구별하지 못합니다. 오히려 열심히 일해 잘 사는 게 가치 있는 일이라고 배우고 있습니다.
이런 사회 분위기 속에서 ‘여러분, 부자 되세요!’ 같은 광고 문구가 전혀 이상하게 느껴지지 않게 되어버렸습니다. 현대 사회에서 경쟁이나 탐욕은 더 이상 놀랍지 않은 일상이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자본주의 사회만 알고 있습니다. 자본주의가 요구하는 특유의 행동 양식이 마치 ‘인간 본성’인 양 받아들여집니다. 우리는 이러한 삶의 방식이 얼마나 기괴한지 깨닫지 못한 채 살아갑니다.
빈센트 반 고흐 <담배를 물고 있는 해골>(1885)
고흐는 해바라기나 붓꽃, 별이 빛나는 밤 같은 아름다운 풍경뿐 아니라, 시든 해바라기나 해골처럼 어두운 주제도 작품에 담았습니다. 그의 삶은 기쁨과 환희뿐 아니라, 고통과 절망도 함께하는 경험이었기 때문입니다.
16세기부터 17세기 서양 미술에서는 ‘바니타스’(vanitas)라는 정물화가 유행했습니다. 해골이나 시든 꽃이 대표적인 상징입니다. 바니타스는 ‘삶의 덧없음’을 뜻하는 라틴어로, 삶이 언젠가는 끝나기에 부와 명예, 순간적인 쾌락에 집착하는 일이 얼마나 무의미한지 일깨워 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