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첩(臣妾)과 재상(宰相)

- 5장 노예

by 북다이제스터



“노예의 삶에 익숙해지면,

놀랍게도 자신을 묶은 쇠사슬을

서로 자랑하게 된다.”

- 리로이 존스




우리가 ‘미개’하다고 여기는 노예제도는 인류 ‘문명’ 이전 시대에는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원시 수렵 사회에서는 사람들이 스스로 생계를 유지할 수 있어 노예가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한 사람의 자유와 권리, 생산수단을 빼앗고 그 사람을 물건처럼 사고파는 노예제도는, 원시 사회를 지나 ‘문명’ 사회로 발전한 뒤에야 비로소 가능했습니다.


예컨대 기원전 4,000년경 메소포타미아 지역의 수메르 ‘문명’에서는, 전쟁 포로가 채찍을 맞으며 강제 노역하는 모습이 점토판에 남아있습니다. 이 시기 공동체가 생존에 필요한 양보다 ‘더 많은’ 농산물을 생산하자, 지주들은 노동비용을 줄이고자 강제 노동에 의존하기 시작했습니다. 또한, 이 강제 노동을 안정적으로 유지할 군대와 관료 조직이 갖추어졌습니다. 잉여물 덕에 생산에 참여하지 않는 군인과 신관 계급이 등장한 것입니다.


수메르와 바빌론의 창조 신화에 따르면, 제사와 정치[祭政]를 모두 장악한 신관은 인간이 신에게 봉사하는 노예에 불과하다고 주장했습니다. 이런 믿음 속에서 백성들은 신과 그 대리자인 신관을 위해 고된 노동을 해야 했고, 이를 거부할 권리조차 없었습니다. 신관은 역법(曆法)에 대한 지식 덕분에 공동체에서 특별한 지위를 누렸습니다. 농경사회에서 역법은 가장 중요한 지식이었기 때문입니다. 계절과 기후를 예언할 수 있는 사람은 신과 특별한 관계에 있다고 여겨 존경받았으며, 사람들은 그의 말을 의심 없이 따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루소는 ‘문명’이 불평등을 낳고, 노예적인 악덕(비굴함과 시기, 미움)과 귀족적인 악덕(교만과 오만, 잔인함)을 양산했다고 보았습니다. 그는 문명이 인간 본성을 타락시키고, 삶을 인위적으로 변화시켰다고 비판했습니다. 루소는 “덕이나 악덕의 기원은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제도에서 파악되어야 한다”고 말하며, “인간을 완전하게 만들 유일한 희망은 사회의 개선에 있다”고 덧붙였습니다.


노예는 짐승처럼 취급받았습니다. 노예 거래는 가축 판매 조항에 포함되었고, 주인은 노예를 동물 이름으로 불렀습니다. 중세 초기 유럽에서 노예를 훔치거나 죽인 자는 벌금 35 솔리두스를 물어야 했습니다. 이는 돼지(15 솔리두스)보다는 비싸지만, 말이나 황소(45 솔리두스)보다는 쌌습니다. 노예는 가축과 동일시되었으며, 채찍질과 몽둥이질, 코나 귀, 혀의 절단, 심지어 처형 같은 잔혹한 처벌을 받았습니다.


노예제는 ‘결정론’ 관점에서 신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플라톤은 “남에게 모욕을 당하면서 겁에 질려 그대로 당하는 건, 양심의 가책을 불러일으키는 부끄러운 일”이라 했지만, 노예는 비참하고 모욕적인 처지를 신이 정한 숙명으로 받아들였습니다. 노예는 고통을 조금이라도 덜고자 자신 정신자세를 바꾸었습니다. 어쩔 수 없다는 생각에 주인의 가치관을 내면화하고, 그를 존경하며 봉사하려 했습니다.


노예는 주인 편을 들어 옹호하고, 주인 명예를 지키기 위해 애썼습니다. 이웃 간 싸움이나 내란이 일어나면 주인 명령에 따라 움직이고, 주인의 전사가 되었습니다. 심지어 주인이 노예나 그의 아내에게 초야권(初夜權, 결혼 첫날밤 신랑 이외 남자가 신랑보다 먼저 신부와 동침할 권리)을 요구해도, 노예는 ‘주인이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하는 건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는 금언을 떠올리며 그대로 따랐습니다. 주인이 농장을 찾는 날 밤이면 노예의 아내는 자연스레 침대에 들었습니다.


복종이 미덕으로 여겨지면서, 주인에게 버릇없이 구는 다른 노예를 서로 비난했습니다. 노예는 여러 종류가 있고 학대받는 정도도 서로 달랐기에, 각자는 자신이 가장 천한 신분은 아니며, 어느 정도 특권을 누리고 있다고 여겼습니다. 서로를 시기하고 질투한 나머지, 자신들 모두가 겪는 고통을 제대로 볼 수 없었습니다. 가령 미국 농장에서는 한 노예가 다른 노예를 채찍질하는 일이 흔했습니다. 일단 어떤 제도가 자리 잡으면, 그 제도로 고통받는 이들조차 좋든 싫든 그 제도의 존속에 기여하게 됩니다.


역사에 따르면, 전쟁에서 승리해 포로를 노예로 삼거나, 상인에게서 노예를 사들이는 일은 노예 수급의 일부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대부분의 노예는 노예가 낳은 자식이거나 버려진 아이들이었습니다. 아기를 버리는 관행은 가난한 이들에게만 한정되지 않은 흔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노예 상인들은 신전 주변이나 쓰레기장을 돌며 아기를 주웠습니다. 때로는 가난 때문에 부모가 갓난아기를 장사꾼에게 팔기도 했습니다.


전쟁 포로로 노예가 된 사람들은 본래 자유민이었기에 과거의 자유를 기억합니다. 이들은 처지를 한탄하며, 자유를 빼앗은 주인에게 분노와 적개심을 품었습니다. 반면, 버려진 아이가 노예가 된 경우는 달랐습니다. 태어날 때부터 자유를 누려본 적이 없기에, 그런 기억도 없었습니다. 그들은 자신 처지나 대우에 대해 ‘세상은 원래 이런 거야’라 체념하며, 주인에게 순종하는 다루기 쉬운 노예가 되었습니다.


‘스스로’ 노예의 길을 택한 자유민도 많았습니다. 로마 시대 일부 야심 있는 사람은 귀족 가문의 관리인이나 황실 재정 담당관이 되고자 자발적으로 노예가 되었습니다. 중국 춘추시대 도시국가에서도 그런 노예가 있었습니다. 당시 남자 노예는 신(臣), 여자 노예는 첩(妾)이라 불렀습니다. 군주는 수많은 ‘신첩’을 거느렸고, 권력이 커질수록 그 수는 늘어났습니다.


군주를 도와 정치에 참여한 관료들은 처음엔 군주에게 봉사하는 노예 신분이었습니다. 이 가운데 유능한 자가 정치 고문이 되어 군주의 총애를 받으면, 신분은 노예였어도 지위는 높아졌습니다. 이들을 우러러보며 스스로 그 무리에 들어가려는 자들이 생겨났고, 그렇게 관료 집단이 형성되었습니다. 훗날 이 관료 집단의 우두머리를 재상(宰相)이라 불렀습니다. 재(宰)는 요리를 맡은 자, 상(相)은 거처를 시중드는 자로, 모두 본래는 노예를 뜻하는 말이었습니다. 이 관료들은 자신을 신(臣)이라고 칭하며 군주에게 충성을 다했습니다.


그렇지만 야심 때문에 스스로 노예가 된 사람들보다, 가난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노예가 된 이들이 훨씬 많았습니다. 굶주림을 견디느니 차라리 노예로 사는 편이 낫다고 생각했습니다. 예를 들어, 러시아 전신인 모스크바 대공국 시대에는 배고픈 사람들이 자신을 노예로 팔았습니다. 15세기부터 18세기 사이, 모스크바 인구의 10분의 1이 노예가 되었습니다. 그 결과 노예가 시민이나 군인, 성직자보다 더 많았습니다. 러시아의 노예제는 팔 것이라곤 자신밖에 없던 이들에게 전당포 같은 역할을 했습니다. 통상 노예 중 3분의 1은 도망쳤지만, 대부분은 자유에 지치거나 노예근성을 버리지 못해 다시 돌아왔습니다. 모든 노예가 자유를 꿈꾼 건 아니었습니다. 오랜 시간 남의 지배를 받고 난 뒤에는 험한 현실 속에서 자유롭고 싶다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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