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장 노예
노예제는 인류 ‘문명’ 역사 내내 지속된 듯 보이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상업이 발달하면서 노예에게 의식주를 제공하는 비용보다 노동자에게 임금을 주는 비용이 더 저렴해지면, 노예제는 사라지곤 했습니다.
헬레니즘 시대(BC 4세기~1세기)는 오늘날과 유사한 경제 구조 속에서 노예제가 사라진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당시 경제는 근대 산업혁명에 견줄 만큼 크게 성장했습니다. 알렉산드로스 대왕(BC 356~323)이 이집트 나일강에서 인도 인더스강에 이르는 광대한 지역을 정복하면서, 거대한 상업 교역권이 형성되었습니다. 페르시아 제국이 쌓아둔 막대한 금과 은이 시장에 풀리자 물가가 오르고, 투자와 투기 붐이 일었습니다. 정부는 세수를 늘리기 위해 상공업을 적극 육성하고, 그 결과 생산과 교역, 재정 체계가 크게 발전했습니다. 항만 시설이 정비되고, 해상 안전을 위한 전함이 건조되었으며, 도로와 운하가 새롭게 건설되었습니다. 더불어 원거리 통상로가 개척되어 대규모 무역 시장이 열렸습니다. 정부와 상인들은 20~30퍼센트에 달하는 높은 이윤을 챙겼습니다.
헬레니즘 시대에는 이상적인 국가를 그린 유토피아 문학이 유행했습니다. 이 작품들은 모두 탐욕과 압제, 경쟁을 피해 상상 속의 섬이나 먼 낯선 땅에서 경제적인 평등을 이룬 사회를 그렸습니다. 대체로 그곳 낙원 사람들은 돈을 모르고, 상업은 금지되었습니다. 재산은 공동 소유하고, 모두가 노동해 필요한 것을 직접 만들었습니다. 헬레니즘 시대에 이러한 유토피아 문학이 널리 확산된 사실은, 그 시대 사람들 역시 오늘날처럼 사회의 불의와 불평등을 개혁하려는 강한 열망을 품고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헬레니즘 시대에도 오늘날처럼 노예제가 쇠퇴했습니다. 임금이 크게 떨어지면서, 노예를 사서 먹이고 돌보는 비용보다 자유노동자를 쓰는 편이 더 저렴해졌기 때문입니다. 당시 아테네 노동자의 임금은 이전 페리클레스(BC 495?~429, 그리스-페르시아 전쟁과 펠로폰네소스 전쟁 사이 아테네 황금시대의 지도자) 시대의 절반 이하로 줄어든 반면, 생활비는 크게 상승했습니다. 농민과 도시 노동자는 몹시 힘든 삶을 견뎌야 했지만, 지배층과 상인은 상업과 교역의 확장으로 경제적인 번영을 누렸습니다. 그 시대 번영은 노동자들의 노력으로 이루어졌음에도, 정작 그들은 그 열매를 나누지 못했습니다.
작가 미상 <어느 남자의 머리>(BC 80?)
헬레니즘 시대 그리스인들이 겪은 심리 변화는 조각상에서 뚜렷하게 드러납니다. 이 시기 초상 조각은 이전 고대 그리스 미술에서 볼 수 있었던 이상적이고 영웅적인 인간상에서 벗어나, 보다 현실적이고 내면적인 표현을 보여줍니다.
우리는 두상에서 현대인이 느낄 만한 감정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지친 듯 흐릿한 표정, 자신감 없고 슬퍼 보이는 입매, 텅 빈 눈빛에서는 의혹과 불안, 비애가 느껴집니다. 그들도 우리처럼 내면의 혼란을 겪고 있었습니다.
중세 유럽의 천년 기간(5~15세기)에도 농노제가 계속 이어졌을 것 같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물론 11세기부터 13세기까지 봉건제는 전성기를 누렸고, 농촌의 농민 대부분은 영주에게 예속된 농노였습니다. 하지만 상업이 발달하기 시작한 도시 상황은 달랐습니다. 1000년경 농업 기술이 발전하고, 대성당과 성곽 건설이 활발해지면서 경제가 활기를 띠기 시작했습니다. 게다가 연평균 기온이 지금보다 2~3도 높은 ‘중세 온난기’ 덕분에 1000년과 1300년 사이 인구가 두 배로 늘고, 그와 함께 도시와 상업이 빠르게 성장했습니다.
흔히 중세를 빈곤한 시대라고 여기지만, 유럽 곳곳의 고딕 성당들은 당시 상업이 발달하고 도시가 번창했음을 보여주는 증거입니다. 거대한 성당을 짓는 데는 통상 100~200년이 걸리고, 그만큼 막강한 교회 재정이 필요했습니다. 사회와 경제가 충분히 풍요롭지 않았다면 이런 장기 대규모 사업은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도시와 상업 발달로 자유 노동력이 늘고 인건비가 떨어지자, 노예는 더 이상 필요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노예는 비싸고, 구하기 어려웠으며, 양육을 통해 노예를 재생산하거나 늙은 노예를 부양하기 위한 비용도 부담이 컸습니다.
이후 영국은 양모나 수익 작물 생산을 위해 농민을 내쫓는 인클로저를 시행하고, 토지 가치는 급등했습니다. 13세기부터 현금이 부족해진 토지 귀족들은 자신 봉토를 더 이상 가문의 유산이 아니라, 돈을 벌 수단으로 보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수익 작물을 늘리고자 ‘공유지’였던 땅에 울타리를 치고[enclosure] 사유화했습니다. 영주는 이제 땅을 공동체가 아닌 오직 자신 이익을 위해 쓰겠다며, 경작지를 양 방목지로 바꾸어버렸습니다.
300년에 걸쳐 영국과 유럽 곳곳의 광대한 토지에 울타리가 쳐졌고, 그 과정에서 수백만 명이 삶의 터전에서 쫓겨났습니다. 역사상 처음으로 평민들은 생존에 필요한 거의 모든 기초 자원에 접근할 수 없도록 구조화되었습니다. 사람들은 집과 먹을 것을 잃었습니다. 인클로저는 농노제보다 훨씬 열악한 조건을 만들어냈습니다. 영국에서는 인클로저로 인해 형성된 ‘빈민’과 ‘부랑자’ 집단을 가리키는 말로 ‘가난’이라는 단어가 일반화되었습니다. 이전까지 영어에서 거의 쓰이지 않던 단어였습니다.
결국 농민은 땅을 잃고 도시로 내몰렸고, 농노제는 사라졌습니다. 농민들은 자신이 경작하던 공유지에서 ‘자유롭게’ 되어 일자리를 찾아야 했고, 일하지 않으면 감옥에 갇힐 ‘자유’도 생겼습니다. 당시 감옥은 가난한 이들을 임금노동자로 전환시키는 수단이었습니다.
사실 당시 과학기술은 프랑스가 앞섰지만, 자유로운 노동력이 먼저 공급된 영국에서 산업자본주의가 더 빨리 발전했습니다. 마르크스는 산업자본주의의 본질을 ‘노동력의 상품화’로 보았습니다. 노동이 상품이 되려면, 먼저 노동자는 신분이나 토지의 구속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이동할 수 있어야 합니다. 동시에 토지나 생산수단을 소유하지 않아야 합니다.
하지만 토지에 비해 노동력이 부족해지면 노예제는 다시 등장했습니다. 서유럽과 달리, 러시아에는 16세기 이전까지 농노제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1500년 이후 하루 평균 130제곱킬로미터씩 영토가 확장되면서, 대규모 노동력이 필요해졌습니다. 이때 흑사병으로 인구까지 줄자, 지주들은 황제에게 소작농 이동 제한을 요청했습니다. 그 결과 도망친 소작농을 처벌하고 땅에 묶어두는 농노제가 법으로 시행되었습니다.
18세기 들어 러시아의 노동력이 다시 늘고, 국가가 노동력에 세금을 부과할 수 있게 되자 농노제는 사라졌습니다. 표트르 대제(1672~1725)는 재정난 속에서 가구와 경작지에 매기던 세금을 폐지하고 인두세(人頭稅)를 도입했습니다. 이 세금은 사유지를 경작하는 농민뿐 아니라, 경작하지 않는 가구의 노예와 심지어 부랑자까지 부과되었습니다. 인두세 도입으로 농민과 농노의 구분은 점차 사라지고, 모든 사람이 국가에 예속된 신분으로 통합되었습니다.
그리고리 소로카 <낚시꾼>(1840?)
그림은 평화로운 시골 풍경을 담고 있지만, 분위기는 얼음처럼 차갑습니다. 소로카가 사는 세상은 햇살이 비치지만 반짝이지 않고, 강물은 흐르지만 물결이 일지 않습니다. 고요함을 넘어 숨 막히는 적막감이 감돕니다.
어디에도 출구가 없어 보이는 답답함은 소로카가 농노제라는 비인간적인 제도로 느낀 절망을 보여줍니다. 러시아인 소로카는 농노였고, 주인은 그를 해방시켜주지 않았습니다. 농민 해방운동에 연루되어 중형을 선고받은 그는, 마지막 희망이 사라지자 자살로 생을 마감했습니다.
우리는 노예제도가 ‘혐오스러운 일’이라 배웠습니다. 하지만 인류 역사를 보면, 사회가 노동 방식을 선택한 기준은 윤리의식이나 가치관이 아니라, 노동력 이용에 따른 수익성에 따라 결정되었습니다. 근대 노예제 폐지도 인권 보호보다는 경제적인 이유에서 비롯된 점에서, 헬레니즘 시대나 중세 유럽, 러시아 절대군주 시대와 다르지 않았습니다.
노예제는 노동력이 부족하고 토지 가치가 낮은 사회에서 유지됩니다. 반대로 상업이 발달하고 토지 가치가 오르며 값싼 잉여 노동력이 늘어나면, 노예는 경제적으로 더 이상 이득이 되지 않습니다. 예컨대 1850년 미국에서 노예 한 명의 몸값은 현재 가치로 4만 달러(약 6천만 원)에 달해, 그 비용을 노동으로 매우려면 20년 이상 걸렸습니다. 조선에서도 노비 한 명 값은 670일 치 일당, 즉 2년 치 연봉에 거래되었습니다. 당시 노예는 값비싼 투자 자산이자 보호 대상이었습니다.
미국의 노예제는 링컨(1809~65)이 원해서 폐지된 게 아닙니다. 개척 가능한 토지가 줄어 토지가치가 오르고, 대규모 이민자 유입으로 노동자 임금이 하락하자 노예제는 경제적으로 불리해졌고, 결국 사라졌습니다. ‘위대한 노예 해방가’로 알려진 링컨은 사실 개인적으로 노예 해방에 반대했습니다. 그는 “모든 노예를 자유롭게 하고 정치·사회적으로 백인과 같게 만드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말했고, “설사 내가 받아들인다 해도 대다수 백인은 그렇지 않을 것”이라 했습니다. 헌법의 “모든 인간은 평등하게 태어났다”는 문구를 인용하면서도, 흑인의 선거권이나 배심원 자격, 흑백 결혼, 시민권 부여 등에는 명확한 입장을 내놓지 않았습니다.
“나는 과거에도, 지금도 백인과 흑인이 사회적이나, 정치적으로 평등하다는 데 찬성한 적이 없습니다. 니그로에게 배심원 자격이나 선거권을 주는 데 찬성하지 않으며 찬성해 본 적도 없습니다. 그들에게 공직권을 주거나 백인과의 혼인권을 부여해 주자고 말한 적도 없습니다. 덧붙여 말하면, 두 인종은 신체적으로 엄연히 다르며 사회적으로, 정치적으로 두 인종이 평등하게 사는 일은 영원히 없을 것입니다.”
미국 남북전쟁은 노예 해방 전쟁이 아니라, 농업이 발달한 남부 지주와 공업이 발달한 북부 자본가 사이의 이권 다툼이었습니다. 남부는 영국에 면화를 수출하며 사실상 영국의 식민지나 다름없어 자유무역을 선호했습니다. 반면 북부는 인구 유입으로 노동력이 풍부하고 공업이 발달해 토지가치가 높았습니다. 따라서 북부는 노예가 필요하지 않았으며, 공산품 보호를 위한 관세 정책을 원했습니다. 하지만 1850년경 미국 주(州)의 절반 가까이를 차지한 남부의 정치적인 영향력 때문에 북부의 보호관세 요구는 충분히 반영되지 못했습니다. 공업이 발달한 북부가 우려한 것은 남부의 노예가 아니라, 자유무역이 가져올 피해였습니다.
일본은 16세기에 상업이 번창하면서 공장에 필요한 인력을 확보하기 위해 노비가 사라졌습니다. 반면 조선은 양반 집안 노비가 노동력의 대부분을 차지해, 자본이 있어도 자유노동자를 구할 수 없었습니다. 농업 중심 사회였던 조선은 20세기 초 망할 때까지 노비 제도가 유지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