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수결 원칙

- 10장 선거

by 북다이제스터



민주주의 선거에서 흔히 쓰이는 ‘다수결’ 원칙은 단순하고 공정해 보입니다. 하지만 이 원칙은 후보가 둘일 때만 비교적 합리적입니다. 후보가 셋 이상이면, 다수결은 쉽게 모순에 빠집니다.


노벨경제학상 수상자 케네스 애로(1921~2017)는 민주주의 선거가 전제하는 다수결 원칙이 합리적이지 않음을 증명했습니다. 이것이 ‘애로의 불가능성 정리’입니다. 개인의 다수 선호가 반드시 사회 전체의 선호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예를 들어, 유권자 3분의 1은 A > B > C 순으로 후보자를 선호하고, 또 다른 3분의 1은 B > C > A 순, 나머지 3분의 1은 C > A > B 순으로 선호한다고 가정해 보겠습니다. 이 경우 후보자 A는 B를 이기고, B는 C를 이기고, C는 A를 이기는 이상한 예상 결과가 나옵니다. 따라서 모든 후보자는 자신이 당선될 수 있다고 예상합니다.


이 때문에 유권자 3분의 2가 원하지 않는 후보가 당선될 수 있습니다. 이점이 민주주의 선거의 역설입니다. 1987년 우리나라 대통령 선거에서도 이 모순이 드러났습니다. 노태우(36.64퍼센트)와 김영삼(28.03퍼센트), 김대중(27.04퍼센트) 세 후보 가운데 유권자 60퍼센트가 원하지 않은 후보가 당선되었습니다. 후보가 셋 이상일 때 다수결은 공정성과 대표성을 보장하지 못할 수 있습니다.


이 문제를 보완하고자 결선투표처럼 투표를 여러 단계로 나누어도 새로운 모순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한 후보가 탈락하면 유권자의 선호 순서 자체가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가령 A보다 B를, B보다 C를 선호하면, A보다 C를 선호한다고 보는 게 타당합니다. 하지만 실제 상황은 훨씬 복잡합니다. A가 빠진 두 번째 투표에서, C보다 B를 선호하는 결과가 나올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모든 유권자가 빠짐없이 신중하게 행동하지 않으면 다수의 뜻과 상관없이 원치 않는 후보가 당선될 수 있습니다. 선호도가 가장 낮은 후보 A는 B나 C의 결정과 무관해 보이지만, 상대적인 순위에 영향을 줄 수 있습니다.


이를 보완하기 위해 모든 후보에게 순위를 매겨 점수를 합산해 가장 높은 점수를 얻은 후보를 선출하는 방법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 역시 완전하지 않습니다. 일부 유권자가 마음을 조금만 바꿔, 어느 후보의 순위를 단 한 단계만 바꿔도 결과가 크게 뒤집힐 수 있습니다. 1등 후보가 갑자기 최하위로 밀리거나, 그 반대가 되는 일도 가능합니다. 결국 다수결은 다수의 의지를 반영한다기보다, 상황에 따라 만들어지는 결과에 가깝습니다.


사실 결함 없는 투표 제도는 없습니다. 사회가 다수결 투표라는 ‘민주적인’ 방식으로 언제나 바람직한 결정을 내릴 수 있다고 논리적으로 보장할 수 없습니다. 개인의 선호를 합친다고 해서 사회 전체의 선호로 이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물리학자 존 배로(1952~2020)는 “선거든, 컴퓨터망으로 연결된 은행이든, 아니면 우리 뇌 속 뉴런이든, 각각의 합리적인 선택이 전체의 합리성을 보장하지 않는다”고 말했습니다. 어떤 체계든 부분만으로 전체를 설명할 수 없습니다.


이 때문에 거의 모든 선거는 전략적으로 악용될 수 있습니다. 겉보기에 무관한 대안이 선거 결과에 영향을 미쳐 전략적으로 조작될 수 있습니다. ‘무관한’ 대안이 추가될 때 선택이 바뀔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정치인 다수는 이 모순을 알고 이를 적극적으로 이용합니다. 그들은 의사결정 집단을 인위적으로 나누거나 합쳐 원하는 결과가 나오도록 조작합니다.


대표적인 사례가 ‘게리맨더링’(gerrymandering)입니다. 가령 경쟁 정당 지지자를 일부 선거구에 몰아넣고, 나머지를 다른 선거구에 분산시키면, 경쟁 정당의 표를 희석시킬 수 있습니다. 이 과정에서 경쟁 정당은 일부 선거구에서 압승하더라도 전체적으로는 패배하게 됩니다. 더 큰 문제는 많은 유권자가 이러한 결과를 여전히 공정한 다수결의 산물로 받아들인다는 점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는 민주주의에 의문을 던져보라고 요구합니다. 선거의 목적이 가장 뛰어난 인물을 뽑는 데 있다면 그것은 민주정이 아니라 귀족정이며, 경우에 따라 쉽게 과두정으로 타락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다수의 통치를 민주주의로 본다면, 오늘날 미국과 같은 선거 중심 체제는 소수가 권력을 행사하는 구조에 가깝습니다. 일부 정치학자들의 지적처럼, 이는 민주정보다 귀족정이나 과두정에 더 가까운 형태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니코마코스 윤리학』(BC 330?)에서 정체(政體)를 바람직한 것과 그렇지 않은 것으로 나누고, 우선순위를 매겼습니다. 그가 꼽은 바람직한 정체는 왕도정체와 귀족정체, 금권정체 순서입니다. 반면에 가장 타락한 정체는 참주정체와 과두정체, 민주정체 순입니다.


“정체는 왕도정체와 귀족정체, 금권정체로 나뉘며, 각각 타락한 형태가 있다. 금권정체는 재산평가에 근거한 정체로, 혼합정체라 불리기도 한다. 셋 중 왕도정체가 최선이고, 금권정체가 최악이다.

왕도정체는 사악한 왕이 자신 이익을 추구하면 참주정체로 타락한다. 참주정체는 세 왜곡된 정체 중 최악이다. 귀족정체는 과두정체로 변질되며, 이 경우 부를 중시하는 소수 악인이 권력을 독점한다. 금권정체는 민주정체로 이어지는데, 두 체제는 서로 인접해 있다. 민주정체도 소수자 지배를 목표로 하며, 재산평가를 충족하는 자는 누구나 동등하다. 이는 가장 흔한 정체 변화로, 약간의 변화만으로도 쉽게 이루어진다.”


노자 역시 왕도정체를 귀족정체보다 높이 평가했습니다. 그의 정치철학 핵심은 성왕과 성인이 다스리는 세상으로, 공자와 달리 중간 귀족 계층, 즉 노자 용어로 ‘현자들’이 존재하지 않아야 합니다. 이는 일정부분 맹자의 견해와도 통합니다. 맹자는 민주정에서는 모두가 소양을 갖춰야 공동체가 만족스러운 상태에 이르지만, 왕도정에서는 군주 한 사람만 올바른 길을 따르면 충분하다고 보았습니다. 반면 공자 세계에서는 귀족, 정확히 말하면 공자의 기대치로 ‘군자’가 중심입니다. 그는 통치의 주체를 엘리트 집단으로 상정하고, 이들이 사회를 이끌어야 한다고 보았습니다. 공자는 윤리적인 상상력은 풍부했으나, 노자나 맹자와 달리 정치적인 상상력은 부족했습니다.


서양에서도 볼테르가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을 이어, 민주정체보다 왕도정체를 선호했습니다. 민주정체에서는 모두를 교육해야 하지만, 왕도정체에서는 철학자가 군주 한 사람만 지혜롭게 키우면 이상적인 국가를 세울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이는 맹자의 주장과 놀랄 만큼 닮아 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나 볼테르, 노자, 맹자의 견해와 달리, 대다수 서양인은 동양인이 과거 왕도정체에서 전제정치의 폭정에 시달렸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역사학자 브루스 커밍스(1943~ )는 동양인들이 대체로 만족하며 행복하게 살아왔다고 분석했습니다.


“우리 서양인이 이상으로 삼는 정부는 시끄러운 민주주의인 반면, 동양인은 현명하고 훌륭한 통치자 한 명을 이상으로 삼았다. 역사를 세심하게 읽고 비교하는 수고를 들인다면 의심할 바 없이, 동양의 모델이 대체로 더 나은 선택임을 알 수 있다. 동양에도 폭군이 있었지만, 대개 한 명에 그쳤다. 반면 서양 민주주의에는 폭군이 떼로 있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민주주의는 폭정의 정점’이라 말했을 때, 그는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이 관점에서 보면, 고대 동양의 군주 중심 체제는 단순한 전제정이 아니라 나름의 질서와 안정성을 지닌 정치 형태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민주주의를 보편적이고 최선의 정치 형태로만 보는 시각은 재검토가 필요합니다. 당시 동양이 서양을 여러 면에서 앞섰던 이유도 바로 왕도정체에 있었습니다.


18세기 서유럽의 절대 군주들 역시 흔히 생각하는 의미의 전제군주가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절대주의를 무자비하고 압제적인 권력 행사로 이해하지 않았습니다. 군주들은 권력을 강화하려 노력했지만, 함부로 포고령을 내리거나 지속적인 복종을 강요할 수는 없었습니다. 귀족과 성직자, 상인, 기업가 등 다양한 집단이 각자의 영역에서 군주의 권력을 견제했기 때문입니다. 또한 군주들은 반대 세력의 존재를 완전히 무시할 수 없었고, 법적인 절차 역시 일정 부분 존중해야 했습니다. 결국 절대군주제는 이름과 달리, 다양한 사회 세력과 제도적인 관습 속에서 제약을 받는 통치 형태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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