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장 인본주의[휴머니즘]
스피노자는 인간이 자신만의 기준, 곧 인본주의 시각으로 세계를 판단한다고 지적했습니다. 이런 관점은 ‘식물과 동물은 인간에게 양분을 제공하기 위해 존재한다’는 식의 목적론 세계관에 빠지게 됩니다. 사람들은 자연에 어떤 목적이 있다고 상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예컨대, 눈은 보기 위해, 손은 잡기 위해 만들어졌다고 상상합니다. 이렇게 보면, 입은 애초에 ‘먹기 위한’ 목적(효용)을 위해 생겼다는 착각을 낳습니다. 하지만 역사학자 유발 하라리는 우리 신체가 특정한 목적을 위해 만들어진 건 아니라고 설명합니다.
“가령 입이 처음 생긴 이유는 초기 다세포 생명체가 외부의 영양분을 몸 안으로 섭취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고, 우리는 여전히 그 용도로 입을 사용한다. 하지만 동시에 입은 키스를 하거나 말을 하는데도 사용된다. 람보라면 수류탄의 핀을 뽑는 데도 써먹는다.”
자연에는 본래 어떤 목적도 없습니다. 모든 목적은 인간이 만들어낸 허구에 지나지 않습니다. 동양에서는 이 사실을 이미 오래전에 깨달았습니다. 기원전 4세기 도가 사상가 열자(列子)는 한 소년의 입을 빌려, 만물이 인간을 위해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일깨웠습니다. 좋은 음식을 먹게 해 준 하늘의 은혜에 감사하는 주인에게 소년은 이렇게 반문했습니다. “모기는 사람의 피를 빨고, 이리는 사람의 고기를 먹습니다. 그렇다고 하늘이 모기와 이리를 위해 사람을 만들었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서구는 오랫동안 목적론 사고에 따라, 모든 사물에 고정된 본질이 있으며 그러한 본질을 완성해 가는 존재로 간주합니다. 변화는 본질을 실현하는 과정으로 이해되고, 이를 벗어나면 비본질적이거나 비정상적인 것으로 치부되었습니다. 특히 그들은, 헤겔의 역사철학처럼, 서구인만이 본질을 완성한다고 믿었습니다. 이러한 목적론 사고는 인종주의나 제국주의 침략을 정당화하는 ‘차별주의’로 손쉽게 전용되었습니다. 스피노자는 바로 이런 차별주의 사고의 뿌리가 ‘인본주의’에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인본주의 시대라고 불리는 르네상스시기 유럽인들은 남미 원주민이 인간인지 아닌지를 두고 논쟁을 벌였습니다. 이는 단순한 인문학적인 논쟁이 아니라, 그들을 노예로 삼을 수 있는지를 둘러싼 ‘실천적인’ 논쟁이었습니다. 인본주의자들은 남미 원주민을 불완전한 존재, 곧 인간이 아닌 존재로 간주하며 노예로 삼고자 했습니다. 서양에서 말하는 인본주의 사상은 이처럼 ‘차별’과 무관하지 않으며, 신대륙에 도착한 서구인들이 극단적으로 잔혹했던 이유이기도 합니다. 그 참혹한 현실을 스페인 성직자 바르톨로메 데 라스 카사스(1484~1556)가 생생하게 기록에 남겼습니다.
“기독교도들은 말과 창으로 학살을 시작했고, 원주민에게 ‘이상할 정도’로 극도의 잔혹성을 드러냈다. 마을을 습격해 어린이나 노인, 임신부, 심지어 출산 중인 여인까지 한 명도 살려두지 않았다. 단순히 칼로 찌르거나 팔다리를 자르는데 그치지 않고, 도살장에서 양을 잡듯 사람들을 갈기갈기 찢었다. 한 칼에 사람을 벨 수 있는지, 머리를 단번에 자를 수 있는지, 칼이나 창을 한 번 휘둘러 내장을 쏟아낼 수 있는지를 두고 내기를 벌이기도 했다. 어머니 품에 안긴 아이를 낚아채 바위에 내던져 머리를 부딪치게 하거나 강물에 던지며, 그들은 웃음을 터뜨렸다.”
당시 쿠바의 어느 부족 추장은 기독교인들에게 쫓기다 붙잡혀 사형에 처해지게 되었습니다. 형 집행을 앞두고, 한 프란체스코 수도사가 그에게 천국과 지옥의 존재를 설명하며, 회개를 권했습니다. 그는 추장에게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영원히 지옥에서 고통받을 것이라 말했습니다. 그러자 추장은 물었습니다. “그럼, 모든 기독교인은 천국에 갔는가?” 수도사가 “그렇다”고 답하자, 추장은 말했습니다. “그렇다면 나는 차라리 지옥으로 가겠소.” 서구 문명은 다른 문명보다 우월해서가 아니라, '인본주의'에 근거한 가공할 정도의 폭력성 때문에 다른 지역 사람들에게 강요될 수 있었습니다.
기독교의 교리는 목적론(teleology; 그리스어 ‘텔로스’(telos)에서 유래, 끝과 종말을 의미) 관점에서 역사를 이해합니다. 역사가 예정된 목표에 도달하면 종말이 오고, 천년왕국이 도래한다고 말합니다. 후쿠야마(1952~ ) 같은 사상가는 이러한 기독교의 목적론을 이어받아 “역사의 종말(천년왕국)”을 주장했습니다. 그의 저서 『역사의 종말』(1989)은 자본주의나 자유주의가 더 이상 새로운 이념으로 발전하지 않으며, 우리가 사는 자유민주주의가 현실에서 다소 불완전하더라도 이념적으로는 역사의 완성이라 말합니다. 그는 “자유민주주의가 인류 이데올로기 진화의 종점이자, 인간 통치의 마지막 형태”라고 단언했습니다. 서구 ‘자유주의’는 역사의 귀결인 반면, ‘동양’과 ‘남반구’는 여전히 변변치 못한 ‘전통’과 ‘동양적인 전제’에 갇혀 있다고 평가했습니다.
역사의 종말을 믿는 전문가들은 종종 ‘우리’와 ‘그들’이라는 대립 구도로 여론을 몰아갑니다. 이 과정에서 ‘그들’을 하찮거나 악마로 묘사합니다. 순수한 악의 개념은 모든 걸 선과 악으로 나누려는 기독교식 도그마의 전형입니다. 사회학자 버나드 바버(1918~2006)는 이를 지하드(성전) 대 맥월드(맥도날드적 세계)의 대결로 표현했습니다. 정치학자 새뮤얼 헌팅턴(1927~2008)은 ‘문명의 충돌’을 주장했습니다. ‘악의 제국’ 소련이 붕괴한 후, 서구 전문가들은 이번엔 이슬람과 중국을 새로운 위협으로 지목했습니다.
그들을 순수 악으로 단순화하는 순간, 우리는 그들과 전혀 다른 존재라는 착각에 빠지게 됩니다. 그러면 증오와 편견이 우리 안에 도사리고, 조건만 갖춰지면 ‘악을 반드시 제거해야 한다’는 신념이 언제든 표출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신념이 바로 역사 종말론의 핵심입니다. 선이 결국 승리할 것이라는 믿음, 악이 극복될 종착점이 있다고 믿음이 그것입니다.
마르크스는 도덕적인 선이 결국 승리한다는 믿음을 “가장 오래되고, 흔하며, 케케묵은 합리주의 오류”라고 비판했습니다. 그는 이를 모두 “바보 천치 같은 주장이거나, 아무 내용도 없는 공허한 말”이라 일축했습니다. 그런 믿음을 설교하는 사람에 대해서는 “한없이 얼빠졌거나, 겁에 질려 언어유희로 도피하거나, 실현할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일부러 유토피아 이론을 떠드는 자”라고 지적했습니다.
적을 만들면 우리 지성은 마비됩니다. 일단 적에게 악을 발견하고 증오하면, 그들의 동기나 어려움을 이해하려는 마음은 사라집니다. 적도 따지고 보면 한 사람일 뿐, 전심전력을 다하지 않고, 겉보기처럼 악의에 차 있지 않다는 사실을 알려하지 않게 됩니다. 세상을 친구와 적으로 나눈 탓에, 온화한 개개인이 다른 이를 결사적으로 비난하고, 성전을 벌이며, 만나보지도 않고 공포로 몰아넣고, 처벌하며, 설명에 귀 기울이지 않게 됩니다. 적을 알고 싶어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목적론을 믿고, 선이 결국 승리할 것이라 확신하며 대결을 벌이고, 서로 대화하려 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침묵은 깨질 수 있습니다. 세상이 우연에 지배되며, 우리 모두가 나약하다는 사실을 인정할 때, 분노나 증오는 누그러질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