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장 인본주의[휴머니즘]
우리는 목적론뿐 아니라 범주화를 통해서도 대상을 차별합니다. 대상을 분류할 때 일부 속성만 부각하고, 나머지는 축소하거나 은폐하기 때문입니다. 이 과정에서 대상의 다양성은 사라지고, 특정 특징만 남게 됩니다. 차이점과 유사점을 구분하고 이름을 붙이는 행위는 사물 자체가 아니라, ‘말이나 개념 차이’에 따라 이루어집니다. 따라서 말이나 개념에 따라 세상은 달라 보입니다. 현실에서 무언가에 이름을 붙이는 순간, 그건 단순한 ‘이름’이 아니라, 확고부동한 ‘차별적인 진실’로 굳어집니다.
자연은 그저 외부에 존재할 뿐이지만, 우리는 이름이나 범주를 부여해 자연을 차별합니다. 특히 어떤 범주는 너무 자명하게 보여, 누구에게나 동일하며 시간과 문화를 초월해 절대 변하지 않는다고 믿기 쉽습니다. 예를 들어, ‘짙은 빨강’ ‘옅은 빨강’ ‘짙은 파랑’ ‘옅은 파랑’ 네 장의 색깔 카드를 일반인에게 주고 비슷한 색끼리 분류하게 하면, 대부분 빨강과 파랑 두 그룹으로 나눕니다.
하지만 실어증 환자는 빨강, 파랑, 짙다, 옅다 같은 사물을 지칭하는 말을 잊어버려 분류 자체를 하지 못합니다. 엄밀히 보면, 이는 올바른 반응입니다. 카드 네 장은 모두 다른 색이므로, 비슷한 색으로 묶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정상인’은 익숙한 범주, 즉 빨강과 파랑이라는 말에 의존해 두 그룹으로 나눕니다.
우리는 매번 새로운 범주를 고민하기보다, 이미 익숙한 범주를 그대로 사용합니다. 그래서 한 번 만들어진 범주는 오래 지속됩니다. 일단 범주가 자리 잡으면, 우리는 그 이면에 있는 더 다양한 특징을 살펴보려 하지 않고, 익숙한 범주에 안주합니다. 그 결과, 우리가 익히 아는 범주에서 벗어나 애매한 경계에 놓인 대상을 낯설고 이질적으로 느끼며, 이는 쉽게 ‘차별’로 이어집니다.
가령 어떤 동물은 범주 경계에 있다는 이유로 징그럽게 느껴집니다. 물과 뭍을 오가는 ‘미끈미끈한’ 파충류나, 집 안팎을 넘나드는 ‘불결한’ 쥐가 그렇습니다. 반면 경계 밖에 사는 다람쥐는 친근하게 느껴집니다. 하지만 다람쥐 역시 쥐와 같은 설치류로, 위험하거나 세균을 옮길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다람쥐가 덜 위협적으로 보이는 이유는 단지 우리가 설정한 경계 밖에 있기 때문입니다. 결국 혐오와 차별의 근원은 대상의 본질이 아니라, 인간이 그어 놓은 경계에 있습니다.
이 논리는 동물에만 적용되지 않습니다. 현대 사회에서 규칙에 들어맞지 않는 경계선상의 사례들은 종종 외면됩니다. 어떤 문제가 발생하면 예외성이나 복잡성은 충분히 검토되지 않은 채, 규제와 처벌이 강화하는 방향으로 흐르기 일쑤입니다. 결국 세상의 섬세한 굴곡은 불도저로 밀어버리듯 평탄화됩니다.
성소수자는 기존의 성별 경계에 있다는 이유로 낯설고, 때론 위험한 존재로 인식됩니다. 우리는 스스로 만든 범주가 무너지면 세상이 혼란에 빠지고 붕괴될 것이라 믿습니다. 그래서 백인은 흑인을, 다수는 소수를, 중심은 주변을 경계선이나 밖에 있는 이질적인 존재로 규정하며 차별합니다. 타인을 그러한 존재로 간주하면, 인간에게 적용되어야 할 도덕 규칙마저 쉽게 배제될 수 있습니다.
히에로니무스 보스 <세속적인 쾌락의 정원>(1510)
이 작품을 처음 마주하면 큰 충격을 받습니다. 인간인지 동물인지 분간할 수 없는 존재들, 식물과 동물, 기계가 뒤섞인 형체, 현실과 동떨어진 색채와 비율, 도저히 하나의 범주에 넣을 수 없는 생명체가 그림을 가득 채웁니다. 우리는 이렇게 ‘경계가 흐릿한’ 대상을 가장 낯설고 위험하게 느낍니다.
보스는 이미 500여 년 전에 “우리가 경계와 개념으로 붙잡아두려는 세계는 실제로 혼종(混種)과 연속성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의 그림은 범주가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만들어낸 편의적인 허구임을 드러냅니다. 마치 ‘당신이 알고 있는 모든 개념과 분류는 이 세계를 설명하기에 충분하지 않다’고 말하는 듯합니다.
그럼에도 스피노자는 ‘정상인’도 차별하는 사고를 넘어, ‘경계’를 사유할 수 있다고 확신했습니다. 예컨대 오늘날 우리는 남녀를 동등하게 여기는 걸 당연하게 생각하지만, 이는 서양 역사에서 최근에야 보편화된 관념입니다. 고대부터 근대에 이르기까지 서양인들은 인간을 하나의 연속체로 이해하며, 남성을 완전하고 이상적인 존재로, 여성을 그보다 불완전한 하위 형태로 보았습니다. 이런 분류 방식을 ‘단성 모델’이라 부릅니다.
단성 모델에서 남성은 더 열정적이고 완전한 존재로 사다리의 맨 위에, 여성은 힘이 약하고 미완성된 존재로 사다리 아래에 놓입니다. 물론 당시에도 남녀의 구분은 있었지만, 이상적인 인간은 남성 하나뿐이라는 인식이 지배적이었습니다. 과거 여성 차별의 뿌리를 이해하려면, 이 범주의 문제를 살펴야 합니다.
장자(BC 369?~286)는 사람들이 사물을 분류하고 이름을 붙이며 정돈하는 방식에 깊은 회의를 품었습니다. 다양한 것을 분류할 때 겪는 어려움이 시사하듯, 세계를 이해하는 우리의 방식은 결국 인간 자신이 만든 인간 중심적인 사고, 곧 인본주의 사고라고 보았습니다. 이렇게 주관에 사로잡힌 사람들은 자신이 만든 세계에 각종 가치를 투영해 사물에 위계를 매기고, 온갖 시시비비를 가리려 합니다. 장자는 이런 인식과 가치 판단을 근본적으로 비판하며, 독단에서 벗어나 도(道)를 추구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문인 공손룡(BC 320~250)은 “백마는 말이 아니다”라는 역설, 즉 ‘백마비마론’(白馬非馬論)을 제시했습니다. 이 역설은 우리가 구체적인 사물을 일반적인 이름으로 부를 때, 그 이름이 가리키는 대상이 실제로 존재하는지를 묻습니다. 우리의 감각을 신뢰한다면, 백마는 분명히 존재하고, ‘말’이라는 이름으로 부르는 구체적인 생물도 실재합니다. 하지만 공손룡은 이름과 실재 사이의 간극을 철저히 파고들었습니다.
‘말’[馬]이라는 일반 명칭은 회색도, 갈색도 아니며, 한 마리의 말과 다른 말을 구분하는 어떤 구체적인 특성도 포함하지 않습니다. 공손룡은 구체적인 사물과 추상적인 보편 개념을 철저히 분리해, 개별 사물에서 일반 범주의 실재성을 추론할 수 없다고 지적했습니다. 이는 단순한 언어 논리가 아니라, 실재와 개념의 관계를 겨냥한 급진적인 사유였습니다. 오직 구체적인 것만이 실재한다면, 우리는 세상을 언제나 부분적인 조각으로만 이해할 수밖에 없습니다. ‘변하지 않는’ 보편적인 진리는 인간이 만든 개념일 뿐,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게 됩니다.
중국 남송 시대 무문 혜개(1183~1260) 선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말은 사물을 있는 그대로 드러낼 수 없고, 어구(語句)는 진리 그 자체가 되지 않는다. 말을 그대로 받아들이면 진실을 잃고, 어구에 얽매이면 깨달음에 이르지 못한다.”
인도 승려 용수(龍樹, 150?~250?) 또한 말[言]이 의미하는 바를 그대로 실재라고 오인하는 걸 ‘희론’(戱論, 부질없이 희롱하는 아무 뜻도 이익도 없는 말)이라 했습니다. 그는 가장 높은 진리가 언어와 개념, 확정된 명제의 너머에 있기에, 여기에 집착하면 참된 의미를 파악할 수 없다고 보았습니다.
용수는 참된 의미를 파악하는 방법으로, ‘경계를 넘어서는’ 사고를 제시했습니다. 예컨대 ‘그렇다’나 ‘아니다’로 답을 요구하는 모든 물음에 대해 그는 ‘그렇다와 아니다, 둘 다 아니다’라고 경계를 넘어 답하라고 했습니다. 이는 ‘그 물음은 나와 무관하다’거나 ‘나는 긍정과 부정의 저편에, 그 위에 있다’는 뜻입니다. 용수에게 가장 높은 진리는 언제나 경계 밖, ‘둘 다 아니다’의 특성이 있습니다. 모든 구별과 분별이 사라진 자리에서만 진리가 드러난다는 이 깨달음을 불교에선 ‘중도’(中道)라 합니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마하반야밀다’를 말합니다. 위대한(마하) 지혜(반야)로 깨달음에 이른다(바라밀다)는 뜻으로, 여기서 ‘반야’가 온갖 분별에서 벗어나 존재의 참모습을 아는 것입니다.
서양은 12세기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이 사실을 깨닫기 시작했습니다. 서양 철학사에서 이를 ‘유명론’(唯名論, nominalism)이라 부릅니다. 유명론은 어떤 것에 이름이 붙기 전엔 그것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보는 사상입니다. 중세 철학자 피에르 아벨라르(1079~1142)가 이 사상을 본격적으로 체계화했습니다. 그는 개념이 실제로 존재하지 않으며, 오직 논리나 문법의 틀 안에서만 이해되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이는 ‘존재와 사유는 일치한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전통 서구 사상에서 벗어난 관점이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사물이 그 사물이게 하는 특성, 그 특성 없이는 그 사물일 수 없는 공통 속성, 곧 ‘개념’이 있다고 보았습니다. 성질이나 특성이 다르면 서로 다른 범주로 나누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아벨라르에게 개념은 논리학이나 언어학의 대상일 뿐, 존재론의 대상이 아니었습니다. 물론 관계나 집합, 수처럼 감각으로 직접 지각할 수 없는 많은 것을 개념으로 인식할 수 있습니다. 다만 아벨라르는 이런 존재에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실재성을 부여하는 일을 단호히 거부했습니다.
따라서 하나의 단어로 대상을 지칭한다고 해서, 그 대상이 하나뿐이라고 착각해서는 안 됩니다. 예컨대 ‘정신’이라는 말이 있다고 해서, 정신이 하나의 실체라 믿는다면 두 가지 오류에 빠집니다. 하나는 정신을 곧 뇌라고 동일시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뇌에는 질량과 부피가 있지만, 생각에는 둘 다 없으므로 이 발상은 맞지 않습니다. 다른 한편으로 정신이 비물질적인 실체, 즉 혼이나 유령, 생각이라 보는 것도 잘못된 결론입니다.
정신을 물질과 비물질 중 하나로만 구분하려는 이분법적인 사고는, 정신질환의 원인을 뇌나 마음 중 어느 한쪽으로만 선택하게 만듭니다. 이 때문에 심리치료와 약물치료 중 어느 쪽이 더 효과적인지를 두고 끝없는 논쟁이 벌어집니다. 하지만 이런 구분으로는 설탕으로 만든 위약이 항우울제와 거의 같은 효과를 내는 현상을 설명할 수 없습니다. 또한 우울증을 완화시키는 약물치료의 효과가 심리치료와 거의 동일하다는 사실 역시 설명할 수 없습니다. 결국 정신은 물질이면서 동시에 비물질입니다.
일단 ‘정신’이라는 단어가 단 하나의 대상을 지칭하지 않는다는 점을 이해하는 순간, 우리는 섣부른 결론을 피할 수 있습니다. 정신이 무엇인지 아직 알 수 없지만, ‘범주의 오류에 빠지지 말라’는 교훈은 언어의 속성과 세계의 속성이 서로 다르다는 점을 일깨워주는 유용한 안내자입니다.
언어는 사물의 본질을 드러내지 않습니다. 언어는 관념을 연관된 것끼리 묶어 붙인 꼬리표에 불과합니다. 아이들이 그린 무지개는 일곱 가지 색으로 또렷하지만, 실제 무지개의 색은 명확히 구분되지 않습니다. 아이들이 그린 무지개는 배운 단어로 표현한 것이지, 세계의 실제 속성을 반영한 게 아닙니다.
우리가 세상 만물에 붙인 꼬리표도 아이들이 그린 무지개처럼 종종 잘못된 것으로 드러납니다. ‘노예’는 정말 인간보다 낮은 위치에 있는 존재로, 자유를 누릴 자격이 없었을까요? ‘마녀’는 과연 화형당해야 마땅했을까요? 대항해 시대 남미의 ‘미개인들’은 도륙당할 만큼 인간이 아니었을까요? ‘난쟁이’는 전시되거나 궁정의 놀잇감이 되는 일이 당연했을까요? 이 모든 사례는 우리가 믿는 것, 우리 삶에서 가장 익숙한 것조차 늘 신중히 되돌아봐야 한다는 사실을 일깨워줍니다.
디에고 벨라스케스 <세바스티안 데 모라의 초상>(1642)
17세기 유럽에서 장애인은 신의 저주를 받은 존재로 여겨지며 인간 이하의 존재로 취급되었습니다. 기형적인 외모를 가진 아이들을 전시하거나 곡예를 시켜 돈은 버는 프리크 쇼(freak show)가 유행했습니다.
왕족이나 귀족은 난쟁이나 장애인을 애완동물처럼 곁에 두는 기괴한 취향 빠졌습니다. 장애아를 구하기 어려워지자, 범죄 집단은 평범한 아이들을 납치해 일부러 뼈를 부러뜨려 장애를 만드는 잔혹한 일까지 벌였습니다.
궁정화가 벨라스케스는 왕실 요청에 따라 왕실의 우월한 혈통을 부각하기 위해 난쟁이나 척추 장애인을 모델로 한 여러 그림을 남겼습니다.
더 중요한 건, 단어로 표현된 대상이 실제로 존재하는지, 아니면 허구에 불과한지를 구별하는 일입니다. 역사학자 유발 하라리는 이를 판단할 간단한 기준을 제시했습니다. “그 실체(existence)가 과연 고통을 느낄 수 있는가?”라는 질문입니다.
“어떤 실체가 실재하는지 아닌지 어떻게 아느냐고? 아주 간단하다. 그 실체가 ‘고통을 느낄 수 있는가?’라고 물으면 된다. 기업은 파산해도 고통을 느끼지 않는다. 한 나라가 전쟁에서 패배해도 그 나라는 고통을 느끼지 않는다. 반면 병사가 전투에서 부상을 당하면, 그는 고통을 느낀다.
허구는 단지 도구일 뿐이다. 허구가 목표나 잣대가 되어선 안 된다. 그것이 허구임을 잊을 때 우리는 실재에 대한 감각을 잃고, ‘기업을 위해 많은 돈을 벌거나’ ‘국익을 위해’ 전쟁을 시작한다. 기업, 돈, 국가는 우리 상상 속에만 존재한다. 우리는 우리를 돕기 위해 그것들을 발명했다. 그런데 왜 그것들을 위해 우리 생명을 희생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