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스로 규정한 모습을 믿는 동물

- 11장 인본주의[휴머니즘]

by 북다이제스터



영장류 학자 프란스 드 발(1948~ )은 인간이 늘 자신을 망상 속 사다리 꼭대기에 놓으려고, 다른 동물을 과소평가한고 지적했습니다. 그는 과학자들이 침팬지의 ‘키스’를 ‘입과 입의 접촉’이라고 부르고, 침팬지의 ‘친구’를 ‘특히 좋아하는 제휴 파트너’라고 표현하는 태도를 비판했습니다. 까마귀나 침팬지가 도구를 만든다는 증거가 있어도, 과학자들은 그것이 인간의 도구와 질적으로 다르다고 단정합니다. 새들이 씨앗 수천 개의 위치를 정확히 기억하는 등 인간보다 뛰어난 인지 능력을 보여도, 과학자들은 이를 지능이 아닌 본능으로 치부해 버립니다.


인간이 특별하다는 주장은 노래 후렴처럼 끊임없이 반복됩니다. 인간만이 비이성적인 야수들이 득실대는 세상에서 유일하게 선악을 구별하고, 이성을 지닌 존재라고 말합니다. 또 자유의지로 행동하는 건 인간뿐이라는 주장도 있습니다. 동물은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 죽음이 무엇인지 모른다고도 말합니다. 하지만 인간도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도 자신을 모르며, 죽음도 모릅니다.


데카르트는 동물이 고통을 느끼지 못한다고 보았으며, 따라서 동물을 학대해도 죄책감을 느낄 이유가 없다고 했습니다. 그는 이를 증명하려고 동물을 창밖에 던져 반응을 살폈습니다. 그는 또한 동물의 사지를 판자에 못으로 고정한 채 장기와 신경을 조사했습니다. 아내의 개를 해부한 일은 특히 기괴한 사례로 전해집니다. 동물들이 괴로워하며 몸부림치고 울부짖는 동안에도, 데카르트는 이를 단지 신체 자극에 따른 근육과 힘줄의 자동 반응, 즉 반사작용일 뿐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철학자 니콜라 말브랑슈(1638~1715)도 자신이 기르던 개를 때리며 “그것은 비명을 지르지만 느끼진 못한다”고 했습니다. 동물이 매질에 울부짖는 건 건반을 누르면 소리가 나는 오르간과 다를 바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이런 모습을 보면, 지각이 없는 쪽은 오히려 인간일지 모릅니다.


우리가 단지 인간이라는 이유로 동물의 고통을 외면한다면, 그건 인종차별이나 성차별과 다르지 않습니다. 동물도 고통과 쾌락을 느끼는 존재입니다. 그들도 인간과 유사한 신경계가 있으며, 고통을 느낄 때 괴로운 표정을 짓고 신음하며, 동공이 팽창하고 땀을 흘리고 맥박이 빨라집니다. 우리와 다르지 않습니다. 피부색이나 성별이 다르다고 차별할 수 없듯, 인간이 아니라는 이유로 다른 존재를 차별하거나 착취할 근거는 없습니다. 이 같은 맥락에서 철학자 제러미 벤담의 말이 자주 인용됩니다.


“피부색과 무관하게 모든 사람에게 인권이 인정되듯, 동물도 느낄 수 있는 존재로 인정되어야 한다. 인간과 다른 동물이 언어 능력이나 지성 면에서 다르든 말든, 핵심은 동물이 이성적으로 사유하거나 말할 수 있는지가 아니다. 중요한 건 그들이 ‘고통을 느낄 수 있는가’이다.”


과거 인간은 동물의 인지 능력을 알지 못해 그들을 지배하려 했습니다. 수 세기 동안 아무렇지 않게 동물들을 가두고 길들인 것도, 그들에게 생각과 감정이 있다는 사실을 몰랐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과학자들은 ‘동물도 의식이 있고 의지대로 행동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2012년 케임브리지 선언). 하지만 신경과학이 발전했어도 동물을 바라보는 인간의 인식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인간이 다른 동물과 구별되는 유일한 점이 있다면, 자신이 특별한 존재라고 믿고 싶어 하는 욕구일 것입니다. 인간을 한 문장으로 정의하자면, ‘스스로 규정한 모습을 믿는 동물’에 불과합니다. 인간처럼 잘 믿는 동물도 없습니다.


인간은 자신만이 지능이나 감정이 있는 존재라 믿고 싶어 합니다. 하지만 동물들은 우리가 잃었거나 애초에 갖지 못한 감각이 확장된 세계에서, 우리가 끝내 듣지 못할 목소리를 내며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그들이 우리에게 없는 걸 지녔거나, 적어도 우리와 닮았다고 인식할 때 비로소 그들에 대한 존중이 시작됩니다. 존중은 대개 자신과 닮은 점, 혹은 자신에게 없는 점을 상대에게서 발견할 때 생기기 마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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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츠 마르크 <푸른 말 I>(1911)



마르크는 평생 동물을 그렸습니다. 산업화가 인간에게서 빼앗아간 순수함과 아름다움이 여전히 동물에게 남아 있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작품에서 빨강과 파랑, 노랑의 삼원색을 즐겨 사용했습니다. 그중에서도 파랑은 그에게 정신을 상징하는 색이었고, 타락한 인간 사회와 대비되는 자연의 순수성을 드러내는 가장 정직한 색이었습니다.


마르크는 동물을 인간보다 훨씬 순수한 존재로 여겼습니다. 그래서 동물을 그리는 것이야 말로 자연에 대한 참된 감각을 일깨우는 길이라고 확신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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