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장 진보나 발전
우리는 여전히 이성을 중시하는 계몽주의 사상에 지배받고 있습니다. 이성이 인류를 해방시킬 것처럼 보였지만, 계몽주의가 실제로 발전시킨 건 철학적인 ‘비판적 이성’이 아니라 과학 같은 ‘도구적 이성’이었습니다. 목표 달성을 위한 효율성만 강조되면서, ‘왜 해야 하는가?’라는 성찰은 사라지고 ‘어떻게 해야 하는가?’라는 기술적인 사고가 인간 의식을 지배하게 되었습니다. 지식은 늘었지만, 지혜는 줄었습니다.
철학자 조르주 바타유(1897~1962)는 자본주의가 ‘도구적 이성’을 극대화해 결국 인류를 파멸로 몰아갈 것이라고 경고했습니다. 기술 발전으로 연간 경제 성장률 2~3퍼센트가 미미해 보이지만, 경제학자 세르주 라투슈(1940~ )는 성장 중심 사회가 2030년에서 2070년 사이에 붕괴할 것이라 내다봤습니다. 그는 경제성장이 불러올 미래를 이렇게 요약했습니다.
“부의 축적이라는 꿈은 곧 악몽으로 바뀔 것이다. 성장에 대한 망상은 ‘복리(複利)의 위압적인 효과’ 때문에 우리를 감당할 수 없는 상황으로 몰아넣을 것이다. 연 3.5퍼센트의 경제성장률이면 100년 후 경제 규모는 복리 효과로 31배로 늘어난다. 2021년 중국의 8퍼센트 경제성장률을 기준으로 하면 10년 후에는 두 배, 100년 후에는 무려 245배가 된다.”
우리는 성장을 당연한 것으로 여깁니다. 성장이라는 말이 자연스럽게 들리기 때문입니다. 살아 있는 유기체는 모두 성장합니다. 하지만 자연에는 성장을 스스로 제한하는 논리가 있습니다. 유기체는 성숙 단계에 이르면 성장이 멈춥니다. 성장이 멈추지 않는다면, 암세포가 끊임없이 증식하듯 그것은 생명을 갉아먹는 성장이 됩니다.
자본주의가 역사상 다른 경제 체제와 구별되는 지점은, 지속적인 팽창과 성장을 지상 목표로 삼았다는 데 있습니다. 성장은 자원 이용과 생산, 소비 수준을 끊임없이 늘리는 과정이며, 우리는 이를 국내총생산으로 측정해 왔습니다. 성장은 자본의 핵심 지침입니다. 어떤 목적을 위한 성장이 아니라, 성장 그 자체를 위한 성장입니다. 모든 기업, 모든 산업, 모든 국가 경제는 종착점 없이 계속 성장해야 한다는 압박에 놓여 있습니다.
현재와 같은 성장 중심의 자본주의가 지속된다면, 자본주의 국가는 결국 살아남기 어려울 것입니다. 마르크스는 자본주의의 종말을 원했지만, 그의 시대에는 자본주의가 무너져도 지역 공동체는 자급자족하며 살아갈 수 있었습니다. 세계경제가 흔들려도, 삼시세끼를 스스로 마련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다릅니다. 자본의 흐름이 막히면 생존할 수 있는 지역은 지구상 거의 없습니다. 도시화와 산업화, 세계화로 대부분의 인류는 자급자족 능력을 잃고, 식량에서 에너지까지 대부분 생존 수단을 세계시장에 의존하고 있습니다. 자본의 흐름이 멈추는 순간, 수십억 인류는 몇 주 만에 기아를 겪고 연료나 전기 부족에 직면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현대 자본주의의 딜레마입니다. 우리는 자본 없이는 살 수 없지만, 그 자본은 자멸의 길을 걷고 있습니다.
경제성장은 또 다른 문제를 낳습니다. 중국 환경부에 따르면, 중국의 경제성장으로 인한 생태계 파괴 비용은 국내총생산의 8퍼센트 내지 10퍼센트에 달합니다. 이는 경제성장률과 맞먹는 수치입니다. 경제성장이 삶을 자동으로 개선한다면, 우리는 이미 낙원에 살고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경제성장은 생태계를 파괴합니다. 매년 생물 5만 8,000종이 멸종하고, 1970년부터 2014년 사이 전 세계 척추동물 개체 수가 60퍼센트 줄었습니다. 우리는 일부 과학자가 “생물의 절멸”이라 부르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이는 선사시대 다섯 차례 대멸종 사건에 필적하는 규모입니다. 우리는 아직 생태적으로 지속 가능한 산업사회를 만들 능력이 없습니다. 지금 우리가 그토록 자랑하는 ‘진보나 발전’은 결국 다른 생명체와 우리 미래 세대의 희생을 대가로 세워진 위태로운 탑에 불과합니다. 언젠가 우리는 그 대가를 치를 것입니다. 인간의 계략은 결국 헛된 것이 되어, 제 꾀에 자신이 넘어가 인류 운명도 다할 것입니다. 그때서야 비로소 삶에서 가장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 깨닫게 될 것입니다.
경제성장 중심 사회에서 국민총생산은 마치 ‘국민 삶의 질’이나 ‘국민 행복’의 지표처럼 취급되지만, 실상은 ‘국민총생산 = 국민 오염 생산의 총계’라는 냉혹한 등식이 여전히 유효합니다. 숲을 베어내면 노동력과 산출된 목재는 국민총생산에 포함되지만, 사라진 아름다운 숲과 시원한 그늘은 반영되지 않습니다. 누군가 말했듯, “유한한 세계에서 끝없는 경제 성장을 믿는 자는 미치광이이거나 경제학자뿐”입니다.
기업 활동으로 미세먼지가 늘고 호흡기 환자가 많아져도, 이 모든 것은 ‘성장’이나 ‘발전’이라는 이름 아래 국민총생산을 끌어올립니다. 대기오염이 심해지면 의약품 생산과 의료비 지출이 늘고, 그것마저도 경제성장으로 계산됩니다. 경제성장은 이렇게 국민 건강과 생명을 해치는 요소까지 포함합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왜 마이너스 성장을 걱정하고 5퍼센트나 8퍼센트 성장률에 열광하는 걸까요?
우리는 거대한 사기극에 속고 있는 동시에, 이 사기극을 스스로 거들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가령 생수 1리터는 같은 양의 수돗물보다 2천 배 이상 비용이 듭니다. 그 차이는 고스란히 경제 ‘성장’에 반영됩니다. 기업들은 생수를 깨끗한 물이라 선전하며 소비를 부추깁니다. 화산암반층으로 걸러졌다는 둥, 구름까지 뚫고 올라간 스위스 만년설에서 채취했다는 둥, 심지어 천사의 눈물을 담았다는 둥 온갖 이야기로 포장된 생수가 터무니없는 가격에 팔립니다. 그런데 생수가 정말 더 깨끗하고 안전할까요?
미국의 경우 수돗물의 99퍼센트는 마셔도 되는 물입니다. 더욱이 많은 사람이 사서 마시는 생수는 수돗물에 불과합니다. 시판 생수의 절반 이상이 약간의 처리 과정을 거친 수돗물입니다. 대표적인 생수 브랜드인 펩시의 아쿠아피나와 코카콜라의 다사니는 디트로이트시 수돗물을 걸러 플라스틱병에 담아 파는 것입니다.
우리는 사실상 사기에 가까운 소비에 막대한 돈을 쓰면서, 동시에 엄청난 양의 플라스틱병으로 환경을 파괴합니다. 플라스틱이 발명된 이래 2010년까지의 총생산량보다 지난 13년간 더 많은 플라스틱이 만들어졌습니다. 미국만 해도 생산량이 막대할 뿐 아니라, 플라스틱 생수병의 70퍼센트가 그대로 매립되어 토양과 바다를 오염시키고 있습니다. 그 결과 캘리포니아와 하와이 사이에는 한반도 크기의 여섯 배에 달하는 플라스틱 부유물 ‘섬’이 생겼습니다. 이 추세라면 2050년에는 바다 속 플라스틱이 물고기보다 많아져, 어업 자체가 불가능해질 것입니다.
물 같은 식품은 수요가 크게 늘거나 줄지 않습니다. 식품 가격이 내려가도 사람이 먹을 수 있는 양에는 한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식품 산업의 성장률은 인구 증가율과 비슷할 수밖에 없습니다. 식품 회사들은 이런 미미한 성장에 만족하지 않습니다. 맥도널드 같은 식품 회사가 인구 증가율보다 더 빠른 성장을 원한다면, 방법은 두 가지뿐입니다. 같은 양의 음식을 더 비싸게 팔거나, 소비자가 더 많이 먹게 만드는 것입니다. 실제로 식품 회사들은 이 두 가지 전략을 동시에 사용합니다.
세계 경작지에서 생산되는 식품의 총칼로리는 한정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농업을 에너지의 이동 형태로 생각하지 않지만, 농업의 본질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농부가 밭이나 논에서 밀, 옥수수, 쌀 등을 기를 때, 태양에너지를 인간이 먹을 수 있는 칼로리로 바꾸는 셈입니다. 인간이 고기를 먹는 것은, 소나 닭이 옥수수를 먹고 얻은 칼로리를 소비하는 것입니다.
문제는 이 과정에서 에너지의 대부분을 낭비한다는 점입니다. 예컨대 멕시코인이나 아프리카인처럼 옥수수를 직접 먹으면, 옥수수의 모든 에너지를 온전히 섭취할 수 있습니다. 반면 옥수수를 소나 돼지, 닭에 먹이면, 대사와 배설 과정에서 에너지의 90퍼센트가 손실됩니다. 채식주의자들이 ‘음식 사슬의 낮은 단계’에 있는 음식을 먹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음식 사슬에서 한 단계 올라갈 때마다 음식 에너지는 10분의 1로 줄어듭니다. 햄버거 1칼로리를 먹으면, 옥수수 수만 칼로리를 낭비한 셈입니다. 그 정도면 굶주린 수많은 사람을 배불리 먹일 수 있습니다.
발전의 역설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부가 늘자 사람들은 더 비싼 고기를 찾고, 농부들은 이를 위해 가축에 더 많은 곡물을 먹입니다. 그 결과 옥수수 같은 기초 식량의 가격이 치솟고, 아프리카와 아시아 곳곳에서 굶주린 이들이 늘고 있습니다. 유엔식량농업기구(FAO)는 2050년 세계 인구가 90억 명에 이르면, 식량 가격 폭등과 공급 부족으로 2억 명이 넘는 ‘식량 난민’이 생길 것이라 경고했습니다. 아는 이미 현실이 되고 있습니다. 과테말라나 소말리아 같은 지역에서는 농지에서 더는 생계를 유지하지 못해 떠나는 이들이 늘고 있습니다. 전쟁과 가뭄으로 고향을 떠난 사람은 6,500만 명에 달합니다. 이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가장 높은 수치입니다.
환경 문제는 이윤을 좇는 자본주의의 내재된 모순입니다. 자본주의는 유한한 지구가 감당할 수 없는 과도한 성장을 강요합니다. 이윤 확대를 위해 끝없는 재생산이 이루어지고, 더 많은 소비를 ‘바람직한 삶’처럼 포장합니다. 그 결과 자연 파괴는 가속되고, 이는 곧 재해로 이어집니다. 흔히 이를 ‘자연의 역습’이라 말하지만, 사실 인간은 자연의 역습을 받을 만큼 대단한 존재가 아닙니다. 인간은 자연의 극히 작은 부분에 불과합니다. 자연을 정복하거나 이용한다는 생각은 착각일 뿐, 인간은 자연과 같은 ‘급’이 아닙니다. 자연은 인간이 감당할 수 없을 만큼 거대하고 무서울 수 있습니다. 환경 파괴를 멈추려면, 성장과 생산 확대를 당연시하는 ‘진보’와 ‘발전’ 개념에서 벗어나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