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선진화

- 13장 진보나 발전

by 북다이제스터



과학혁명 이전의 사람들은 인류가 진보한다고 믿지 않았습니다. 황금기는 이미 오래전에 지나갔고, 인류는 점점 내리막길을 걷고 있다고 여겼습니다. 하지만 근대 학문의 등장으로 이러한 인식이 바뀌었습니다. 지식을 쌓고 학문을 발전시키면 인류가 달라질 수 있다는 새로운 믿음이 생겨난 것입니다. 진보와 발전이라는 개념도 이때 비로소 등장했습니다. 인간은 역사상 처음으로 과거보다 더 나은 미래를 상상하게 되었습니다. 미래는 그저 다가오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적극적으로 만들어가는 대상이 되었습니다.


역사가 진보한다는 관념은 특히 18세기 유럽 계몽주의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이성과 과학의 힘으로 개인과 사회를 발전시킬 수 있다는 믿음이었습니다. 계몽주의 사상가들은 지식이 쌓일수록 인간의 경험과 이해가 깊어지고, 그것이 곧 진보로 이어진다고 보았습니다. 문화와 기술의 발전이 인간을 더 행복하게 만들고, 품성까지 향상시킬 수 있다는 낙관도 이때 등장했습니다.


칸트는 이러한 계몽주의 정신을 대표하는 철학자로, 역사 발전에 매우 낙관적인 시각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의 역사철학은 크게 세 가지로 요약됩니다. 첫째, 역사는 일정한 발전 법칙을 따른다는 법치주의. 둘째, 역사는 이성의 힘에 따라 점차 합리적인 방향으로 움직인다는 이성주의. 셋째, 역사는 점점 더 나은 상태로 향해 간다는 진보주의입니다.


칸트는 이성이 인간 상태를 향상시킬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역사에 우주적인 목적이 있으며, 인간은 자연법을 따르는 과정에서 자신도 모르게 그 목적에 인도된다고 보았습니다. 뉴턴이 행성의 법칙을 발견했듯, 역사에도 진보의 법칙이 존재한다고 확신한 것입니다. 교육이나 경제 발전, 정치 개혁으로 문화와 역사가 발전하면, 인류는 가난이나 전쟁, 무지, 인습에서 벗어나 도덕성까지 향상될 것이라고 예견했습니다.


콩도르세(1743~94) 역시 계몽주의를 낙관한 철학자였습니다. 그는 인간 역사를 야만에서 문명으로 나아가는 과정으로 보고, 인간의 진보가 무한히 지속된다고 믿었습니다. 칸트와 마찬가지로 인간 본성이 완전성에 도달할 수 있다고 확신했습니다.


초기 사회학자 생시몽(1760~1825)도 진보 이론을 내세웠습니다. 당시 신흥 학문이던 사회과학은 진보 개념에 초점을 맞췄습니다. 그는 진보를 단순한 이론이 아니라, 실현해야 할 목표로 보았습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사회과학은 진보에 대한 믿음에서 탄생했습니다. 생시몽은 황금시대가 과거가 아닌 미래에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사회질서가 완성되는 시기는 조상이 아닌 후손의 시대이며, 그 길을 여는 일이 우리의 역할이라 믿었습니다.


프랑스혁명의 폭력성과 비합리성에 실망한 생시몽은 산업화를 진보의 유일한 수단으로 보았습니다. 기계를 진보의 수단으로 옹호하며, 기술과 산업을 통한 생산적이고 발전적인 사회를 꿈꾸었습니다. 진보는 그에게 단순한 이론이 아니라, 헌신적인 노력으로 이루어야 할 목표였습니다.


계몽주의 시대는 자연과학의 방법론이 인간 사회에 처음 적용된 시기였습니다. 당시 물리학이나 화학, 생물학 같은 자연과학은 눈부신 발전을 이루었습니다. 반면 사회학이나 경제학 같은 사회과학은 그렇지 못했고, 예측력도 부족했습니다. 이에 사회과학자들은 지역과 문화를 초월해 공통된 법칙을 찾아낼 수 있다는 천재적인 아이디어를 떠올렸습니다. 이렇게 탄생한 개념이 바로 ‘발전’(development)이었습니다. 모든 사회가 같은 방향으로 발전한다는 가정 아래, 속도만 다르다고 본 것입니다.


인류학자 루이스 헨리 모건(1818~81)은 “모든 사회가 단순한 형태에서 출발해 현대적이고 복잡한 민족국가로 발전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이러한 주장에는 흔히 ‘단순한’, ‘맹아적인’, ‘미성숙한’, ‘거의 발달하지 않은’ 등 생물학적인 은유가 쓰였습니다. 미성숙한 사회가 성숙한 상태로 성장할 수 있고, 또 그렇게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여기서 ‘성숙’은 곧 서구의 정치와 경제 체제라는 인식입니다. 이는 서구 역사가 단선진화(單線進化)한 것이라는 믿음입니다. 즉, 현재의 저개발 사회는 과거의 서구와 같으며, 서구야말로 저개발 국가가 따라야 할 본보기라는 관념을 반영합니다.


이 발전 중심 사고는 서구를 기준으로 한 강자 중심의 보편성을 만들어냈습니다. 서구는 자신의 정치체계를 최상으로 여기며, 저개발 국가가 이를 따라야 한다고 확신을 심어주려 했습니다. 산업화와 민주주의, 시민권, 인권 등이 유럽에서 먼저 시작되었으니, ‘먼저 유럽에서, 나중에 다른 곳에서’라는 서사가 자연스럽게 자리 잡았습니다. 유럽은 이렇게 세계 모든 문명이 본받아야 할 ‘표준’으로 여겨지게 되었습니다.


서양이 자신을 ‘표준’으로 본 이유는, 스스로 합리성과 과학에 기반한 사회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이 믿음은 서양의 다른 모든 신념을 뒷받침하는 핵심입니다. 따라서 자신들의 과학은 사실이며, 법은 공정하고, 민주주의는 신성불가침하다고 여깁니다. 이 믿음 아래, 자신들의 틀을 벗어나는 모두 걸 부정하는 태도를 보입니다. 합리성을 곧 진보로 보는 관념은 나머지 세계가 지적으로 낙후되고 덜 진보했으며, 사고나 존재 방식이 서양보다 한참 뒤처진 곳으로 격하시켰고, 또한 사람들을 그렇게 믿게 만들었습니다.



쥘 세레 <파리 불로뉴 숲 동물원: 갈리비스의 인디언>(1882)



식민지 착취로 부를 쌓은 서구 사회는 인간 사이에 우열이 있다고 믿었고, 오직 백인 사회만이 진보했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러한 무지는 19~20세기 유럽과 미국에 ‘인간 동물원’이라는 비인간적인 공간을 만들어냈습니다.


프랑스에서는 인디언을, 미국에서는 피그미족 남성 오타 뱅가를 전시했고, 1958년 벨기에 브뤼셀 만국박람회에서는 콩고인들을 데려와 아프리카 마을을 꾸며 그들을 구경거리로 삼았습니다. 관람객들은 그들을 동물 보듯 구경하며 바나나를 던져 조롱했습니다.



‘성숙’이나 ‘발전’ 개념은 미성숙하거나 덜 발전한 국가들이 서구 모델을 따르도록 부추겼습니다. 그리고 그 무지개 끝에는 서구처럼 수준 높고 자유로운 정치·경제 체제로 발전할 것이라는 약속이 되었습니다. 소위 ‘선진국’들은 콩고나 이라크, 아프가니스탄처럼 어려움을 겪는 국가가 민주화되길 바란다고 말합니다. 이는 결국 총선거를 치르고, 가능하면 서구식 모델 – 칸막이 기표소, 투표용지, 투표함, 다당제, 선거 캠페인 등 –을 따르라는 요구와 다르지 않습니다. 서구 방식이 어디서든 재현되어야 한다는 주장인 셈입니다. 저개발 국가의 촌락회의 같은 고유한 민주 제도는, 소위 ‘선진국’ 형태가 아니라는 이유로 인정받지 못합니다.


많은 저개발 국가는 유럽을 발전 모델로 삼았습니다. 유럽이 지금처럼 발전한 건 그만큼 노력한 결과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는 사실도, 합리적인 판단도 아닙니다. 유럽의 발전은 노력보다 폭력이나 우연에 크게 의존했기 때문입니다. 유럽 전염병이 신대륙 원주민 사회를 파괴하여 땅을 쉽게 정복할 수 있었습니다.


유럽의 진보는 흑인이나 아랍인, 인도인, 동양인의 땀과 희생 위에 세워졌습니다. 유럽의 부는 저개발 국가에서 강탈한 재산에서 비롯되었습니다. 마르크스가 지적했듯, 유럽의 부 축적은 인클로저 운동과 농민 추방, 극심한 인플레이션, 무역 독점, 식민지 건설, 원주민 학살과 노예화, 광산 생매장, 동인도 제도의 약탈, 아프리카 노예사냥장의 전횡 등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저개발 국가는 선진국의 자원 활용 방식을 그대로 따라 할 수 없습니다. 세계 인구의 3분의 1에 불과한 선진국이 전 세계 자원의 3분의 2를 소비하면서, 나머지 국가에 ‘우리처럼 하라’고 말하는 건 명백한 기만입니다. ‘개발’은 착취나 신식민주의를 완곡하게 포장한 표현에 불과합니다. 그 결과 저개발 국가는 여전히 빈곤에 시달립니다. 결국 ‘발전’은 부유한 국가의 우월성을 과시하며, 약탈을 정당화하는 위선적인 수사이자 이데올로기에 지나지 않습니다.


서양을 모방하라는 ‘발전’ 개념은, 역사가 일정한 목적을 향해 나아간다는 ‘목적론’ 역사관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이런 관점은 역사에서 ‘우연’이 차지하는 역할을 대수롭지 않게 본 것입니다. 실제로 역사는 여러 가능성 중 하나가 선택되는 과정이 아닙니다. 예측할 수 없는 우연이 방향을 결정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따라서 역사가 진보한다는 칸트나 콩도르세, 생시몽의 주장은 설득력을 잃습니다.


그럼에도 서구 정부는 여전히 신자유주의만이 번영의 길이라며, 이를 다른 나라에 강요합니다. 나라마다 상황은 천차만별인데도 동일한 정책이 같은 효과를 낼 것이란 믿음은 비현실적입니다. 국제통화기금(IMF)은 우리나라를 비롯해 인도네시아나 나이지리아, 페루처럼 전혀 다른 나라에 동일한 개혁 정책을 강요했습니다. 이는 각 나라를 위한 정책이 아니라, 사실상 미국의 이익을 위한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1997년 우리나라 외환위기 당시, 클린턴 미국 대통령은 김영삼(1927~2015) 대통령에게 전화를 걸어 IMF 협상 타결을 서두르라고 압박했습니다. 클린턴은 한국의 재정 상황이 매우 심각하며, 국가 부도 위기가 임박했다고 경고했습니다. 또한 한국이 신뢰 회복을 위한 유일하고 현실적인 길은, 늦어도 월요일(1997년 12월 1일) 이전에 IMF와 합의해 워크아웃 프로그램을 발표하는 것이라고 강조했습니다. 통화 직후 클린턴은 정치 참모 딕 모리스(1948~ )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지금 우리가 한국에 하고 있는 일이 과연 옳은 건지 잘 모르겠소. 우리는 한국인들에게 실업자를 양산하게 하고, 외국인들이 한국 기업을 헐값에 사들이도록 강요하고 있소. 우리가 한국에 강요하는 자본주의 관행은 사실상 미국에서도 절대 용납되지 않을 것들이 아닌가요?”


결국 12월 24일 자정, 한국과 IMF의 협상이 타결되며 조기 자금 지원이 발표되었습니다. 언론은 이를 한국이 부도를 면한 ‘크리스마스 선물’로 보도했지만, 진짜 선물을 받은 쪽은 외국 투자자들이었습니다. 그들에게는 최상의 크리스마스 시즌 바겐세일이었으나, 우리에게는 대량 도산과 실업을 의미했습니다.


이전 01화옛날이 옳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