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하공물

- 13장 진보나 발전

by 북다이제스터



경제학자 헨리 조지(1839~97)는 ‘진보’와 빈곤이 동시에 나타나는 현실의 원인을 토지 사유제에서 찾았습니다. 진보하는 지역에서 생산력이 향상되어도 노동자의 임금이 오르지 않는 이유는, 그 생산력의 증가분이 지대로 흡수되기 때문입니다.


“산업이 발전하면 토지 가치가 오르고, 이는 투기를 자극해 토지 가치를 더욱 끌어올린다. 이런 투기적인 지대 상승은 토지 소유자가 ‘노동을 배척’하는 효과를 낳는다. 부의 불평등한 분배는 결국 지대를 전유하는 토지 소유의 불평등에서 비롯된다.”


생산요소는 토지와 노동, 자본으로 이루어집니다. 생산된 부(富)는 이 세 요소의 대가로 모두 분배됩니다. 즉, 부는 지대와 임금, 이자로 분배됩니다(부=지대+임금+이자). 이를 지대 중심으로 보면, ‘부-지대=임금+이자’가 됩니다. 이처럼 임금은 노동 그 자체가 아니라, 생산물에서 지대를 제외한 잔여 몫에 의존합니다. 따라서 생산력이 아무리 높아져도, 투기로 지대나 토지가격이 오르면, 노동자는 정당한 대가를 받지 못합니다. 결국 부의 불평등은 지대를 독점하는 토지 소유의 불평등에서 비롯됩니다.


헨리 조지의 이론은 인도 사례에서 뚜렷하게 드러납니다. 영국 지배 이전 인도 무굴 제국에선 황제가 모든 땅을 소유했습니다. 백성은 경작의 대가로 세금만 냈을 뿐 토지를 소유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영국 지배 이후 그들 입장에서 보면, 토지 소유관계는 불분명하고 조세와 지대의 구분 또한 모호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영국 동인도회사는 영국식 토지 제도를 도입했습니다.


이 제도는 지주와 농업경영인, 소농으로 이어지는 위계적인 구조였습니다. 지주는 농업경영인에게 토지를 임대해 지대를 받고, 농업경영인은 다시 소농을 고용해 농사를 지었습니다. 이렇게 인도 무굴제국에 없던 사적인 토지 소유권이 확립되었습니다. 이후 인플레이션과 인구 증가로 토지 가치가 오르자, 부는 지주에게 집중되고 소농은 더욱 가난해졌습니다.


과거 인류 사회에서 토지는 대체로 개인의 소유물이 아니었습니다. 토지는 인간이 만들거나, 늘리거나, 옮길 수 없는 유일한 자원입니다. 인간은 자연을 생산할 수 없습니다. 인간이 생산한 일반 상품과 달리 토지는 오랜 기간 재화와 용역을 만들어내는 내구성을 지닌, ‘자연’의 다른 이름일 뿐입니다.


고대 이스라엘 왕국은 신의 이름으로 토지 소유를 금지했습니다. 북아메리카 인디언이나 페루 원주민, 인도 치타공힐 부족, 보르네오섬과 남태평양제도 주민들은 역시 땅을 공동으로 소유하고 경작하며, 수확물을 나누었습니다. 미국 네브래스카주의 오마하 인디언은 ‘땅은 물이나 바람과 같아 사고팔 수 없다’고 했습니다. 사모아에서는 백인들이 오기 전까지 토지를 판다는 개념조차 없었습니다. 하와이어를 비롯한 태평양 여러 토착 언어에서도 토지는 양도할 수 없는 것으로 여겨졌습니다.


동아시아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중국과 우리나라에서는 ‘왕토’(王土) 사상에 따라 국가가 토지를 소유했습니다. 이는 토지의 궁극적인 소유자가 왕이며, 누구에게도 토지를 넘겨줄 수 없다는 의미입니다. 물론 사고팔 수도 없습니다. 조선 중기의 문신 정여립(1546~89)은 “천하는 공물(公物)이니 어찌 일정한 주인이 있겠는가”라며, 토지의 공적인 성격을 강조하는 천하공물설(天下公物設)을 주장했습니다.


유럽 역시 근대 이전까지 토지를 자유로운 사적 재산으로 보지 않았습니다. 18세기까지 영국과 프랑스의 대부분 땅은 사실상 매매 대상이 아니었습니다. 자본주의가 등장하기 전까지 토지는 소수가 독점하거나 사고팔 수 있는 재산이 아니었습니다. 심지어 소유권을 옹호한 존 로크조차 “내가 소유하면 남이 소유할 수 없게 되는 것에는 소유권이 정당화될 수 없다”고 말할 정도였습니다.


근대로 접어들며 땅의 의미가 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토지가 재산권의 핵심으로 편입되고, 매매 가능한 사적인 자산으로 변모한 것입니다. 장 자크 루소는 『인간 불평등 기원론』(1755)에서 이 변화를 인류 불평등의 출발점으로 보았습니다.


“어느 날 누군가 땅에 울타리를 치고 ‘이 땅은 내 것’이라 주장했고, 순진한 사람들은 이를 믿었다. 이 사람이야말로 시민사회의 창시자다. 그때 누군가 토지 둘레의 말뚝을 뽑아내며, 이웃들에게 ‘저 사기꾼 말에 속지 마시오! 과실(果實)은 모두의 것이며, 땅은 누구의 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잊지 마시오! 그렇지 않으면 여러분은 파멸에 이를 것이오!’라고 외쳤다면, 인류는 수많은 범죄와 전쟁, 살인, 비참함과 잔혹함을 피할 수 있었을 것이다.”


자본주의의 출현 과정에서 결정적인 전환점은 토지가 상품이 되는 순간이었습니다. 토지가 사고팔 수 있는 대상으로 바뀌면서, 사람들 마음속에 이윤을 추구하려는 욕망이 자리를 잡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사실 이는 당연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오랫동안 사람들은 땅에서 자신이 먹고살 만큼만 경작했으며, ‘이윤을 위한 생산’이라는 관념은 자본주의 형성과 함께 서서히 학습되고 내면화된 결과였습니다. 이 점은 유럽인이 호주 대륙을 처음 마주했을 때 더욱 선명하게 드러납니다. 제임스 쿡(1728~79) 선장과 함께 탐험한 수석 과학 장교 조지프 뱅크스(1743~1820)는 원주민의 삶을 보고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그들이 여기 살고 있다. 나는 그들이 행복하다고 말할 수 있겠다. 아주 작은 것에도, 아니 아무것도 없는데도 만족하는 사람들... 부자가 되려고 안달하지 않고, 유럽인들이 필수라고 여기는 것조차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들을 보면 인간이 얼마나 적은 걸 바라고도 살 수 있는지 깨닫게 된다. 반면 우리 유럽인들은 이 사람들의 눈에는 믿기 어려울 만큼 갈수록 더 많은 걸 원하고 있다.”


뱅크스의 기록은 한 사회가 ‘원하는 것’이 본능이 아니라, 제도와 문화가 만들어낸 욕망임을 보여줍니다. 토지가 상품이 되고, 생산이 시장을 향하던 순간부터 인간의 내면은 점차 ‘더 많이 가지려는 마음’에 길들여졌던 것입니다.


나폴레옹 법전의 도입은 프랑스와 유럽 대부분 지역의 토지 개념을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법전은 토지를 개인이 자유롭게 사고팔 수 있는 완전한 사적 재산으로 규정하고, 그 결과 귀족들은 보유했던 토지를 상인과 자본가에게 점차 매각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때부터 토지는 더 이상 권력이나 신분의 상징이 아니라, 가격이 매겨지는 시장의 상품이 되었습니다.


토지가 상품이 되자 그 용도 역시 달라졌습니다. 토지는 예전처럼 농업 생산이나 봉건적인 권위의 기반이 아니라, 공장 설립이나 투자 대상으로 전환되었습니다. 지대(地代) 역시 더 이상 토지에서 나오는 전통적인 수익이 아니라 자본 수익의 한 형태가 되었습니다. 요컨대 토지는 권력의 토대에서 이윤 창출의 도구로 변했고, 이러한 변화가 자본주의 확산의 핵심 기반이 되었습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중국과 베트남의 현 체제가 ‘사회주의가 약화된 상태’라고 규정하는 건 성급한 판단일 수 있습니다. 두 나라 모두 여전히 공산당이 국가 권력을 독점하고 있으며, 주요 생산 자원 역시 개인이 아니라 국가나 공동체가 소유하고 있습니다. 특히 농지는 지역 공동체의 소유 아래 있으며, 가정은 이를 장기 임대해 사용합니다. 많은 지역에서는 평등을 유지하고 생계 기반을 보장하기 위해 땅을 주기적으로 재구획·재분배하기도 합니다.


중국과 베트남은 이러한 제도적인 기반 위에서, 토지를 전면적으로 상품화하지 않고도 산업화와 현대화를 이뤄내는 데 성공했습니다. 그들은 20세기말 서구나 일부 개발도상국이 겪은 토지의 ‘급진적인 사유화’라는 폭력적인 경험을 목격한 뒤, 그와 다른 길을 선택한 것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경제인류학자 크리스 한(1953~ )과 키스 하트(1943~ )는 “이러한 동아시아 사회주의 국가들의 경로가 오늘날 더 정당성이 있으며, 심지어 더 희망적인 대안을 보여준다”고 평가했습니다. 토지를 공공자산으로 유지하면서도 유연한 사용권을 통해 시장과 조화를 이루는 방식은, 불평등이 심화되는 오늘의 세계에서 오히려 더 지속가능하고 공정한 체제가 될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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