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장 진보나 발전
진보했다고 믿는 오늘날에도 생산력은 급격히 늘었지만, 극심한 빈곤은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노동자의 고통도 줄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빈부격차는 커지고 생존 경쟁은 더 치열해졌습니다. 일부는 막대한 부를 쌓는 반면, 많은 사람이 여전히 굶주립니다. 물질적인 진보는 사회 최하층의 삶을 개선하기는커녕, 더 악화시키고 있습니다.
경제성장의 성과가 소수 지배층에 집중되면서, 발전은 더 이상 공동 번영의 약속이 아니라 불평등을 심화시키는 재앙이 되었습니다. 우리 사회는 지금 그 현실을 뼈저리게 겪고 있습니다. 성장을 내세우는 정책은 모두 의심해 봐야 합니다. 허풍일 가능성이 크기 때문입니다. 성장의 혜택이 극소수에게만 돌아간다면, 그런 정책이 필요하다는 주장 자체를 경계해야 합니다.
우리나라의 현실은 이를 여실히 보여줍니다. 상위 1퍼센트가 전체 개인 소유 땅의 절반 이상을, 주식 부자 1퍼센트가 시가총액의 63퍼센트를 차지합니다. 결국 상위 10퍼센트가 전체 부의 66퍼센트를 독점합니다. 우리나라는 세계에서 부자 증가 속도가 가장 빠른 나라입니다. 가난한 사람은 더 가난해지고, 부유한 사람은 더 부유해지는 속도가 세계 최고 수준인 나라, 그것이 대한민국의 현실입니다.
우리나라 국민의 절반은 집이 없습니다. 비정규직으로 일하는 사람도 절반에 이릅니다. 자영업 실패율은 80퍼센트에 달하며, 자영업자의 부채는 실소득 대비 1.6배로, 임금노동자의 두 배입니다. 이들은 빚에 짓눌린 채 창업과 폐업을 반복하고, 장사가 안 되면 저임금 노동으로 생계를 이어갑니다. 기초생활보장 수급자는 245만 명, 사각지대에 놓여 지원조차 받지 못하는 극빈층은 66만 명에 달합니다. 전체 가구의 6퍼센트가 절대빈곤층으로 전락할 위기에 있습니다.
세계로 눈을 돌리면, 부자는 단순히 부유한 정도가 아닙니다. 세계 상위 20명의 재산은 총 2조 7,000억 달러로, 세계 8위 경제 대국인 이탈리아의 경제 규모를 웃돕니다. 상위 62명의 재산은 세계에서 가난한 35억 명의 재산을 모두 합친 것과 같습니다. 미국의 빈곤층조차 세계 소득 상위 14퍼센트, 중위 임금 소득자는 상위 4퍼센트에 속합니다. 2009년 전 세계가 경제 위기로 신음하던 해에, 투자은행 골드만삭스가 직원들에게 지급한 보너스 총액은 세계 최하위 2억 2,400만 명의 연간 소득 총액과 같았습니다. 이 극단적인 불균형 앞에서 다윈의 다음 말은 오늘날 더욱 날카롭게 들립니다. “빈곤의 비참함이 자연법칙이 아니라 우리의 사회제도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우리의 죄는 중대하다(great is our sin).”
성장에서 벗어나는 일은 흔히 상상하듯 과격한 전환이 아닙니다. 우리는 오랫동안 삶의 질을 높이려면 성장이 필요하다는 말을 들어왔습니다. 하지만 경험과 연구는 반드시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유엔에 따르면 인간의 기대수명이 뚜렷하게 늘어나는 구간은 일인당 국내총생산이 연간 6,000달러에 이를 때까지입니다. 교육 지표 역시 일인당 소득이 겨우 9,000달러 정도면 최고 수준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일인당 1만 달러 정도면 건강과 교육은 물론 고용이나 영양, 민주주의, 삶의 만족 등 핵심 사회 지표 전반에서 충분한 성과를 거둘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공공재에 투자하고 소득과 기회를 보다 공정하게 분배하기만 하면, 현재보다 훨씬 낮은 GDP로도 전 세계 모든 사람들에게 필요한 사회적인 조건을 충족시킬 수 있습니다.
일정한 지점을 넘어서면 경제 성장은 오히려 ‘비경제적’이 되기 시작합니다. 복지보다 해악을 만들어내기 때문입니다. 고소득 국가에서 성장 추구가 계속되면서 불평등과 정치적인 불안정성이 심화되고, 과로와 수면 부족으로 인한 스트레스와 우울증, 환경오염에 따른 건강 악화, 당뇨병과 심장병 같은 만성 질환이 확산되고 있습니다.
일단 충분한 음식이나 비가 새지 않는 집, 깨끗한 식수 같은 기본적인 생활 조건이 충족되면, 경제성장은 더 이상 행복을 늘리지 못합니다. 오히려 더 많이 가질수록 행복해지는 정도는 점점 줄어듭니다. 미국의 경우, 1인당 GDP가 현재 달러 기준 1만 5,000달러였던 1950년대에 행복 수준이 정점을 찍었습니다. 이후 미국인들의 평균 실질소득은 네 배로 늘었지만, 지난 반세기 동안 행복은 정체되거나 오히려 하락했습니다. 영국도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1950년대 이후 소득은 세 배가 되었지만, 행복 수준은 더 낮아졌습니다. 이런 경향이 특정 국가에 국한되지 않고, 거의 모든 고소득 국가에서 반복되고 있습니다.
불평등한 소득 분배를 가진 사회일수록 사람들은 덜 행복합니다. 문제의 핵심은 성장의 크기가 아니라, 소득과 자원이 어떻게 분배되는가에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사회에서는 부와 기회가 극단적으로 불균등하게 배분되어 있습니다. 경제성장은 대다수에게 더 나은 미래를 약속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미 압도적인 다수인 가난한 이들의 수만 늘릴 뿐이며, 그들은 더 심각한 불평등과 굴욕을 겪게 됩니다.
경제성장은 소수에게는 부의 증가를 의미하지만, 다수에게는 사회 지위와 자존감의 추락을 뜻합니다. 불평등한 사회에 사는 사람들은 좌절과 불안을 경험하고, 자신의 삶에 대한 만족도도 낮아집니다. 그 결과 우울증과 중독의 비율은 높아집니다. 경제성장은 만연한 사회 문제를 해결하기는커녕, 오히려 그것을 지속시키고 심화시키는 주범입니다.
피터르 브뤼헐 <이카루스의 추락이 있는 풍경>(1560?)
언뜻 보면 그림은 평화로운 일상을 담고 있습니다. 아름다운 풍경 속 밭일과 양치기, 출항하는 무역선이 묘사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무역선 옆에 그리스 신화의 이카루스는 물에 빠져 죽어가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각자의 일에 몰두한 채 그의 추락을 전혀 보지 못합니다. 이렇게 개인의 비극은 세상의 무관심 속에 철저히 외면당합니다.
브뤼헐 작품은 번영하는 풍경 뒤에 숨은 개인의 고통을 드러냅니다. 그는 이렇게 묻는 듯합니다. ‘이 번영은 과연 진짜인가? 그 뒤에 어떤 고통이 감춰져 있지 않은가?’
경제성장이 인간의 삶을 실질적으로 개선해 왔다고 흔히 믿지만, 현실은 정반대입니다. 미국의 일인당 실질 GDP는 1970년대 이후 두 배로 늘었지만, 오늘날 빈곤율은 더 높고 실질 임금은 더 낮습니다. 반세기 동안 성장이 이어졌음에도 핵심 사회 지표들은 오히려 후퇴했고, 그 성과는 거의 전부 부유한 계층에게 집중되었습니다. 성장주의는 이데올로기에 지나지 않습니다. 우리 공동의 미래를 희생해 소수에게 이익을 몰아주는 이데올로기입니다.
미국의 사례는 부의 증대가 곧 삶의 질 향상으로 이어지지 않음을 분명히 보여줍니다. 소비의 상당 부분이 낭비되기 때문입니다. 미국은 일인당 석유 소비가 서유럽의 두 배가 넘지만, 기대 수명과 건강, 유아 사망률, 보육 서비스, 보편적인 의료보장, 최저임금, 노후의 경제 안정성, 휴가 기간, 공교육의 질, 예술 지원 등 삶의 질 전반에서 오히려 서유럽보다 뒤쳐져 있습니다.
쿠바는 심지어 경제가 ‘퇴보’ 해도 국민이 먹고살 수 있다는 사례를 보여주었습니다. 1990년대 말 냉전 종식 이후 쿠바는 미국의 석유 수입 제한과 경제 제재로 큰 타격을 받았습니다. 석유 수입은 절반 이하로 줄고, 화학 농약과 비료 사용은 80퍼센트 이상 감소했습니다. 밀 같은 기본 식량 공급도 절반으로 줄면서, 5년 만에 쿠바인의 평균 칼로리 섭취량은 3분의 1까지 감소했습니다.
하지만 쿠바는 과학과 기술, 보건, 교육에 꾸준히 투자해 사회 유대를 강화하고 생활 능력을 향상시켰습니다. 토지를 재분배하고 부의 불평등을 줄이는 개혁도 성공적으로 추진되었습니다. 또한 미국의 봉쇄 이전부터 화석연료 의존을 줄이고자 생태농업을 연구하고, 지방 연구기관과 협력해 농부들을 지원하며 대비해 왔습니다.
이 과도기에 쿠바를 지탱한 핵심은 소농과 도시농업, 정원농업의 성공이었습니다. 이 모델은 훗날 국영농장의 기반이 되었습니다. 또한 노인이나 어린이, 임산부, 미혼모 같은 취약 계층을 위한 식량 배급 체계뿐 아니라, 전 국민에게 최소한의 식량을 보장하는 배급 제도도 함께 구축해 경제 위기를 극복할 수 있었습니다.
쿠바 수도에서는 도시 정원만으로 채소 소비의 60퍼센트, 전체 식량의 절반을 자급하며, 5년 만에 심각한 식량난을 극복했습니다. 예상치 못한 변화도 뒤따랐습니다. 칼로리 섭취가 3분의 1로 줄고 연료 사용이 제한되면서 성인들의 신체 활동은 두 배로 늘고, 비만율이 절반으로 줄었습니다. 그 결과 1997년부터 2002년 사이 당뇨병 사망률은 50퍼센트, 동맥경화는 35퍼센트, 심혈관 질환은 20퍼센트 감소했습니다.
이 시기 노동인구의 최대 4분의 1이 농업에 종사하고, 특히 주목할 점은, 외부와 단절된 상황에서 쿠바인들은 물건을 고치고 다시 쓰는 ‘재생 경제’를 구축했습니다. 경제적으로 어려운 환경이 오히려 창의적인 혁신과 기술 확산을 촉진한 셈입니다.
쿠바와 같은 중남미의 코스타리카 국민들은 ‘푸라 비다’(Pura Vida/Pure Life)라는 삶의 태도를 지니고 있습니다. 이는 순수하고 소박한 삶을 긍정하는 가치관으로, 무한한 경제성장이 바람직하지도 가능하지도 않다는 인식을 담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국가는 경제성장을 최우선 목표로 삼고, 정당과 이념을 떠나 지속적인 성장의 필요성에 암묵적으로 동의합니다. 반면 코스타리카는 영원한 경제성장이 존재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일찍이 깨닫고, 복지와 분배 중심의 제도를 꾸준히 정비해 왔습니다. 코스타리카의 일인당 국내총생산은 미국보다 약 80퍼센트나 낮지만, 높은 수준의 복지 덕분에 기대수명은 오히려 미국을 앞섭니다.
경제학자나 정책 결정자들은 인간의 후생(厚生)을 소득이나 경제성장률 같은 좁은 틀로 정의하곤 합니다. 하지만 충만한 삶에는 그 이상의 요소가 필요합니다. 공동체의 인정과 존중, 가족과 친구 사이의 편안함, 존엄과 자존감, 즐거움과 평온 같은 가치가 삶의 질을 좌우합니다. 소득에만 초점을 맞춘 시각은 정책 결정자들을 높은 경제성장률에만 맹목적으로 집착하게 만들고, 그 과정에서 인간의 진정한 행복을 외면하게 합니다. 성장이 반드시 필요하지 않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때, 우리는 직면한 위기에 대응하는 방식을 훨씬 더 합리적으로 다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성장에서 벗어난 사회는 실제로 어떤 모습일까요? 첫 단계는 경제의 모든 영역이 항상 성장해야 한다는 불합리한 신조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필요와 무관한 무분별한 성장을 멈추고, 청정에너지나 공중보건, 재생 농업처럼 우리가 키우고 싶은 부문에 선택적으로 집중할 수 있습니다. 반대로 화석연료처럼 시급히 탈성장해야 하는 부문도 분명히 정할 수 있습니다. 제품을 단기간에 고장나게 만드는 계획된 진부화나 우리 감정을 조작해 우리가 가진 걸 불만족스럽게 느끼도록 하는 광고 전략 등 이윤 극대화를 위해 고안된 경제 부문을 축소할 수 있습니다.
성장에서 벗어난 사회에서는 불필요한 노동의 고역에서 벗어나 주당 노동시간을 줄이면서도 완전고용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소득과 부를 공평하게 분배하고, 보편적인 의료와 교육, 저렴한 주거 같은 공공재에 투자할 여력도 커집니다. 이러한 조처들은 사람들의 건강과 삶의 질에 강력하고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습니다.